2016년 일본 문학계를 들썩이게 한 뉴스가 있었다. 번역가 현재훈과 사이토 마리코가 공역한 박민규의 《카스테라》(도서출판 크레인)가 제1회 일본번역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일본번역대상은 12월부터 이듬해 12월 말까지 13개월 간 일본어로 번역된 책 중에 뛰어난 번역서에 주어지는 상이다. 후보 선정 과정에서 독자 추천을 반영하기에, 자연스럽게 그 해의 해외문학 추천 리스트가 만들어지면서 매년 해외문학 독자들의 축제의 장이 되곤 한다. 그런 상의 제1회 수상작이 한국문학이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기상천외하고 재미있기로 입소문을 타고 있었던 작품이어서 수상 소식은 곧장 화제가 되었고, 이 소식은 평범한 일본 독자들까지 널리 한국문학을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18년에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지쿠마쇼보)이 사이토 마리코의 번역으로 출판되자마자 화제가 되어 증쇄를 거듭하며 베스트셀러로 자리를 잡았다. 내가 오사나이 소노코와 공동으로 번역한 이민경의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타바북스)도 같은 시기에 출간돼 함께 화제가 되며 일본 독자들에게 한국 작가가 가진 언어의 힘을 각인시켰다.
이후에도 2022년에는 야지마 아키코가 번역한 손원평의 《아몬드》 《서른의 반격》 《프리즘》(쇼덴샤)과 마키노 미카가 번역한 황보름의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가 연이어 일본서점대상 번역 부문 1, 2위에 오르며 독자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림책 분야에서도 화제작이 연이어 나타나고 있다. 2018년에는 하세가와 요시후미가 번역한 백희나의 《알사탕》(브론즈신샤), 2022년에는 내가 번역한 김상근의 《별 낚시》(파이 인터내셔널)가 MOE그림책대상에서 각각 6위, 5위에 선정됐다. 그 밖에도 사이토 마리코가 번역한 안녕달의 《수박수영장》(이와나미쇼넨분코)은 여름마다 증쇄를 거듭하더니 얼마 전 8쇄를 찍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청소년문학 중에서는 내가 번역한 은소홀의 《5번 레인》(스즈키출판)이 2023년 청소년 독서감상문 전국 콩쿠르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과제 도서 중 한 권으로 선정돼, 어느 서점에 가도 책이 진열돼 있는 즐겁고 감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 콩쿠르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워낙 역사가 오래되었고 전국의 학생들이 여름방학 과제로 감상문을 제출해야 하다 보니 부모 세대의 관심 또한 크다. 덕분에 폭넓은 세대의 반응을 들을 수 있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 밖에 에세이에서 야마구치 미루가 번역한 백세희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시작으로 셀 수도 없는 책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
일본 독자들이 한국문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할 때 번역의 길로 접어든 행운
나는 이렇게 한국문학이 다방면으로 일본 독자들의 관심을 받게 된 시기에 정말 운이 좋게 한국문학 번역자가 되었다. 2016년 전에는 일본에서 한국문학 번역에 관심을 가지는 한국어 학습자가 많지 않았고, 그 덕분에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나였지만 일본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했기에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대학원생 때 평론가 선생님의 소개로 알게 된 일본 문예지에서 이승우, 강영숙, 최승호 등 한국 작가 분들의 대담 혹은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종종 통역을 맡아온 것도 번역의 길로 접어들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진로를 걱정해야 할 시기에 일본 독자들이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가 겹친 것은 정말이지 우연이었고, 어떻게 보면 그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찾아온 대운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인생에서 앞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가장 큰 운이 찾아온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많은 일본 출판사가 한국문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번역자는 많지 않았다. 김순희가 번역한 이승우의 《한낮의 시선》 작가 이벤트에서 통역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편집자가 번역 의뢰를 했다. 그렇게 번역하게 된 책이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쇼분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호기로운 도전이었다.
번역은 작품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소리에 귀 기울여 새로운 지도를 그려내는 일
번역 작업은 조금도 순조롭지 않았다. 경력이 많은 번역가들도 어려워하는 것이 번역이거늘, 생짜 초보자에게 쉬울 리 만무했다. 나는 곧 나락을 경험하고 말았다.
“이 번역으로는 출판이 어렵겠어요.”
번역 초고를 받아본 편집자는 수정을 요구했다. 재번역이라고 할 만큼의 많은 수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 한국문학을 편집한 경험이 있는 프리랜서 편집자 N 씨께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N 씨와는 오가다 몇 번 인사를 나눈 사이였는데, 대뜸 번역은 이번이 처음이며 일본어 네이티브가 아니기 때문에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긴 메일을 보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었으나 곧장 답장이 왔고, 한 번의 미팅을 가진 후 너무나 감사하게도 N 씨는 나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그 후로 둘만의 ‘번역 교실’이 월 1회 열렸다. 내 번역에 N 씨가 피드백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단순한 일본어 교정이 아니라 번역의 기본이 되는 부분들, 예를 들어 한국어로 된 원문을 어느 정도 일본어로 풀어 써야 일본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지 하는 것들을 나는 N 씨께 배운 셈이다. N 씨는 이후 손원평의 일본어판을 모두 담당했는데 모든 작품이 일본서점대상을 수상했으니 편집자로서의 실력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지금 메일을 확인해보니 2017년 7월부터 12월까지 5개월 간 N 씨의 ‘번역 교실’이 열렸다. N 씨는 정말 열정적으로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나는 최대한 많은 것을 단기간에 습득하기 위해 그의 메모를 거의 달달 외웠다. N 씨는 이렇게 빨리 실력이 느는 경우는 처음 봤다며 칭찬을 해주었는데, 그러고 보면 ‘번역 교실’이라기보다 ‘번역 특훈’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싶다. 6개월 간의 특훈으로 번역 원고는 새롭게 거듭났고 이후 책은 무사히 출간됐다. 이 글을 빌어 N 씨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남긴다.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가 포함된 ‘한국문학의 오쿠리모노(‘선물’이라는 뜻)‘ 시리즈는 사이토 마리코가 번역한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필두로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천명관의 《고래》, 후루카와 아야코가 번역한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로 구성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감사하게도 그 이후로 번역 의뢰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의뢰를 받게 된 작품의 장르가 아주 다양했다. 순문학, 장르문학, 청소년문학, 그림책, 에세이, 인문서 등등 많은 분야의 책을 번역해볼 수 있었다. 출판하고 싶은 한국문학보다 번역자가 많지 않은 시절에 일을 시작한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단순히 의뢰가 와서 번역했다기보다 다양한 책들 사이에 나를 놓아두는 작업 방식을 스스로 선택했던 것 같다. 번역자로서의 어떤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이 나를 거쳐 갈 수 있는 교차로와 같은 번역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2022년에 출판사 읻다에서 진행한 시 번역 프로젝트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은유의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한국 시 번역가 인터뷰》(읻다)에 인터뷰이로 참가했다. 해방촌에 있는 서점 ‘고요서사’에서 나의 삶과 번역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았더니 은유 작가님은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에서 이렇게 멋진 글로 풀어내주었다.
승미의 역사는 타인의 역사다. (중략) 그렇게 그가 포착한 타인의 반짝이는 순간들은 별자리가 되어 그의 삶을 인도했다.
이 글처럼 나는 누군가의 반짝이는 순간들이 내 앞의 어둠을 밝혀주기를, 그리고 내가 온몸으로 담아낸 그 빛들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빈 용기처럼 어떤 것이라도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후루이 요시키치의 《요오꼬·아내와의 칩거》(창비, 정병호 옮김)에서 앓아누운 주인공이 집 밖에서 들려오는 말에 계속 귀를 기울이듯이, 작품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소리에 온 정신을 쏟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아직도 유효할 것 같다.
“후루이 요시키치의 주인공들이 거의 비어 있어요. 대신 바깥에 있는 것들을 계속 받아들이거든요. 책의 문장이 들어오고 다른 사람의 말이 들어오고. 그들처럼 지내보는 것도 괜찮겠다, 이렇게 흔들리면서 살아 있는 지금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동안 작업한 작품들 덕분에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며 어디론가 계속 흘러가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새로운 지도를 그려내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2024년에 번역한 최진영의 《이제야 언니에게》(아키쇼보)에서는 어릴 적 믿었던 어른에게 성폭력을 당한 주인공 제야가 자신의 언어를 예리하게 다듬어 멈춰버린 듯한 시간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제야가 사건 이후에 갈고 닦은 생각과 언어들은 사방이 꽉 막힌 현실을 뚫을 수 있는 칼인 것이다.
나는 한국문학을 통해 일본 독자들이 자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 무기를 얻을 수 있길 바란다. 번역가 정영목은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에서 이렇게 말한다.
외국의 문화나 사회의 새로운 언어와 개념을 번역해내는 것이 단순히 거기에 딱 맞는 우리말을 발견해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현실이나 역사에, 또는 아직 우리 사고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흔하다.
나는 일본 독자들이 한국문학이라는 거울을 통해 현재의 사고에 없는 ‘바깥’을 경험하고 새로운 지도를 그려나가기를 바란다. 내 번역이 그 여정을 돕고 함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승미_한일 문학 번역자
한일 문학 번역자. 일본문학 번역으로는 나카지마 교코의 《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예담), 아오야마 미치코의 《달이 뜨는 숲》(알에이치코리아) 등이 있고, 한국문학 번역으로는 조남주의 《귀를 기울이면》, 임경선의 《호텔 이야기》,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 정세랑의 《옥상에서 만나요》 등이 있다.
지난 1월 말, 우리나라의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됐다. 마스크를 자유롭게 쓰고 벗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그렇다고 지금의 일상이 코로나19 발생 전으로 돌아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지난 3년 동안 학교를 마음대로 가지 못했던 청소년의 교육과 건강 문제는 코로나19 발생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영국과 웨일스 모든 공공도서관의 리딩웰 프로그램
The Liverary에서는 2022년 9월 창간호부터 다독가들을 운영하고 있다.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로,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되어 독자들의 호응이 큰 연재물이다. 이번에 The Liverary 에디터 팀에서는
마음을 헤아리는 디자인 핀란드 헬싱키 도심 한편에 자리 잡은 백년 가게 ‘사보이 레스토랑’ 탁자에는 북유럽 호숫가의 유려한 곡선을 닮은 유리 꽃병이 하나씩 놓여 있다. ‘알토 꽃병’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진 사보이 꽃병이다. 사보이 레스토랑의 실내 디자인을 맡은 핀란드 근대 건축가 알바 알토(Alvar Aalto,1898~1976)는 건축뿐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