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두의 <백년 여행기>에서 보이는 횡단의 상상력의 기저에는 디아스포라 고통이란 정동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전시를 관람하는 과정에서 고통과 관련한 여러 사유의 거점들을 역동적으로 횡단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고통이 바로 사유의 시작이라고 했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예술을 ‘고통의 언어’라고 불렀던 테오도르 아도르노, 예술적 쾌락원칙의 역승화를 낳게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 현실원칙의 강고함에 있다고 했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야기와 함께 경험되는 허구적 체험을 일러 절망 속에서 하는 희망의 체험이라고 논의한 폴 리쾨르,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에 나타나는 상처/고통과 신궁의 기예 사이의 역설에서 예술가의 존재론을 착안하여 상처와 고통을 통한 예술적 영광을 강조했던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 등등의 사유와 고민들이 <백년 여행기>에 동참하면서 예술 수용의 지평을 심화하게 해준다. 어쩌면 ‘고통의 향유’란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가장 고귀한 예술적 과정이 아닐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응시하면서, 예술의 이름으로, 문학의 이름으로, 역설적으로 고통을 향유할 때, 예술이나 문학은 자연스럽게 치유의 지평을 알게 될 터이니 말이다.
나는 괴로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가령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을 창조했고 인간의 깊숙한 내부에 숨겨져 있던 무의식을 표출시킨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는 인간의 고통과 욕망과 열정의 극한까지 추구하며 우주의 심연을 향해 다가갔다. 두루 알다시피 저물어가는 황혼의 잿빛 러시아의 하늘 아래서 가슴을 짓이기며 살았던 인물이다. 영혼의 상처를 휘감고 도는 어둠의 정체를 그는 언제나 직시하고자 했다. 은총과 정의가 사라진 고통스러운 연옥, 그 불행과 절망의 황무지에서 전율해야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분노에 찬 이반 카라마조프가 말하듯, 도스토옙스키의 대지는 그 심연의 핵심까지 고통의 눈물로 젖어 있는 형국이었다. 어디를 가도 어디를 보아도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는 죄 많은 인간의 처참한 몰골뿐이라고 했던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탄식에서도 세계의 고통에 대한 감각은 뚜렷하다. 바로 이같이 타락하고 죄 많은 현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영혼의 구원을 갈망한다. 고통의 심연에서 고통을 초극할 수 있는 참 지혜는 그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통을 통해서만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한 이는 이반 카라마조프였다. 어쩌면 우리는 도스토옙스키 문학 세계를 횡단하고 성찰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괴로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이분법적 시선과 의식을 넘어선 횡단적 상상력
2016년 퓰리처상 및 2023년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 수상작인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 또한 독자들을 깊은 고통의 심연으로 자맥질하게 하는 텍스트다. 읽는 내내 고통스럽게 읽으면서 우리는, 그토록 깊은 고통의 이야기를 쓰는 동안 작가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면서 또 더욱 고통스럽게 된다. 그런데 작가는 깊은 고통 속에서 고통을 넘어서는 예지와 상상력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흔히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 고통 속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조자》처럼 그것을 아주 철저하게 수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매우 희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동조자》는 ‘두 마음과 두 얼굴을 가진 남자’(a man with two minds and two faces)의 이야기다.
북베트남의 스파이로서 남베트남에 침투했다가, 미군에 의해 스파이로 훈련받아 이중간첩이 된 공산주의자(communist double agent) 주인공의 초상은 매우 문제적이다. 이미 출생과 외모부터 상상력의 횡단 여정을 효과적으로 환기한다. 복합적인 스파이 소설이고 사랑과 우정과 배신의 대서사시처럼 보이는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1975년 베트남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묘출된 고통의 풍경이다. 거기엔 식민지 지배의 경험에서 온 고통도 있고, 그로부터 민족을 해방하려 했던 공산주의 투사들의 고통도 있으며, 베트남 전쟁 현장에서의 참혹한 고통도 있고, 보트피플 처지나 미국에서 난민 생활을 하는 베트남인들의 디아스포라 고통도 있다.
베트남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혼혈이란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따돌림을 심하게 당한다. 그러던 중 ‘만’과 ‘본’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이 일을 계기로 셋은 의형제를 맺는다. 공산주의에 이끌린 만을 따라 북베트남의 스파이가 된 후 만과 주인공은 남베트남에서 비밀리에 북측 정보요원으로 활동한다. 두 친구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본은 남측 공수부대의 부사관이 된다. 남베트남 특수부 소속 육군 대위이자 북베트남 스파이인 주인공은 1975년 4월,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에 상관인 ‘장군’ 가족과 함께 미국 CIA가 제공한 수송기편으로 탈출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간 주인공은 거기서 디아스포라 이중 스파이로 여전히 이중생활을 계속한다. 그러다가 미국의 스파이였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베트남 수용소에서 고문당하며 지난날의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하는 매우 고통스러운 처지가 된다. 소설 전체는 수용소장에게 고백하는 이야기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반부에서 주인공이 소장과 정치위원 친구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자기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대목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정치위원 친구의 권총으로 자기 삶이 마감될 것 같은 위기 상황에서, 즉 자신이 소멸해가는 순간에 역설적으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 발견은 매우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잡종 새끼’로 따돌림을 당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두 얼굴과 두 마음’을 지닌 이중 스파이로 ‘기형적 존재’처럼 살아온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육성이 실감 있게 다가온다. 앞에서 이 소설이 수용소장에게 보내는 자술서 형식의 소설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한 개인의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베트남인 전체를 위한 자술서로 확산되고, 더 나아가 20세기 세계인을 대신한 고해성사처럼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무엇보다 기존의 이분법적 시선과 의식을 복합적으로 넘어선 점이 인상적이다. 베트남 전쟁을 탈식민주의/식민주의 관점을 넘어서, 양쪽 모두를 포괄하면서, 남/북 베트남의 시선을 아우르고, 베트남과 미국의 시선을 통합하면서 아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특히 일방적인 가해자/피해자의 이항대립을 넘어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임을 고해하는 과정이 돋보인다. 저간의 민족주의적 희생자 의식으로부터 훌쩍 비껴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작가의 시선이 어느 한쪽에만 고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시선과 의식은 부단히 움직이고 횡단한다. 횡단의 상상력이야말로 통섭과 새로운 탈주의 주요 원천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존재론적 탐문
작가가 깊은 고통의 심연에서 엮어낸 소설의 스타일도 인상적이다. 실존과 기억, 서사의 관계를 형식적으로 잘 빚어냈다. 또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속한 집단과 국가, 세계를 통합적으로 환기하고 감싸 안는 이야기의 동심원 효과 역시 탁월하다. 아울러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존재론적 탐문은 20세기를 위한 애도의 장치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었다는, 그 안에 뭔가 의미론적 존재값이 들어 있다는 성찰의 세목이 각별하다. 두 얼굴과 두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었던 이중 스파이였던 주인공, 누구보다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삶은 살았던 그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의 심연으로 한없는 자맥질을 할 수밖에 없는 풍경의 깊이가 횡단 상상력의 어떤 절정을 형성한다. 《동조자》의 최종심급에서 작가가 철학적으로 탐문한 것이 바로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것!’의 경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상에의 추수로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진실, 역사와 현실 그리고 실존의 깊은 고통을 철저하게 체험하고 횡단하고 인식하고 상상한 사람만이 통찰할 수 있는 인생의 주제가 바로 nothing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탄력적으로 횡단하면서, 없는 것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있는 것의 없는 것 등으로 사유의 깊이를 더해 가고 있다. 혁명이나 이데올로기보다 한 인간이 되는 것, 보이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간을 탐문하고자 한 대서사시로서 넉넉한 감동의 지평을 연다. 응우옌의 이런 횡단의 상상력은 소설에서 그치지 않는다. 돈 맥켈리와 함께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HBO MAX의 오리지널 시리즈 드라마로 횡단하여 2024년 4월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우찬제_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대학교수.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카오스모스 수사학》(2023), 《책의 질문》(2023), 《애도의 심연》(2018), 《나무의 수사학》(2018), 《불안의 수사학》(2012), 《프로테우스의 탈주-접속시대의 상상력》(2010), 《고독한 공생》(2003), 《타자의 목소리》(1996), 《상처와 상징》(1994), 《욕망의 시학》(1993) 등을 썼고, 대산문학상, 팔봉비평상, 김환태평론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최근엔 기후 침묵을 넘어 기후 행동을 위한 생태학적 지혜와 상상력을 탐문하는 환경인문학을 모색하면서, 문학과 문화 교류 양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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