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 인터뷰] '정의'와 '도시'라는 키워드로 춤추는 도시 만들기_서울대 건축학과 백진 교수
백진_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2025-11-0518:06
이번 호 석학 인터뷰에서는 최근 《정의와 도시》를 출간한 서울대 건축학과 백진 교수를 만났다.
“건축학을 넘어 철학,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다방면의 방대한 지식을 통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건축과 도시는 어떤 것인가를 제시해준다.”
런던대학교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가 《정의와 도시》를 위와 같이 추천했다.
또 2024년 프리츠커상 수상자 야마모토 리켄 교수는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제4차 산업혁명의 성과에 매료된 이 시기에 더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모여 사는 방식의 혁신과 기술문명의 결합을 통한 공존의 모색이 대안임을 제시하는 백진 교수를 만나본다.
영상 차례
도시의 존재 이유와 정의
[00:53] ‘정의’와 ‘도시’를 연결하게 된 계기
[03:42] 도시가 상실한 ‘별’은 무엇일까
모여 살기의 이득
[05:37]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가 경이로운 이유
[09:05] ‘모여 살아가는 도시 자체가 인간에게는 자연이다’, 그렇다면 서울은?
건축의 포용성
[13:51] 공공시설의 질을 높이는 것이 행복한 공동체를 구현하는 길
[17:38] 건축적으로 ‘포용’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나
[23:45] 아파트가 많은 우리의 도시, 도시와 집의 관계에 대하여
교정시설 사유하기
[26:43] 교정시설은 어떠해야 하는가
모여 살기를 시도하는 사람들
[35:54] 모여 사는 하나의 방식, 공동체 마을
정의의 회복
[42:15] 공간과 도시가 한 사회 내의 단절을 불러일으킨다
살아 있는 도시
[45:19] 춤추는 도시를 낳으려면 은유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49:43] 지금 우리 사회,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는?
도시의 존재 이유와 정의
더 라이브러리(이하 ‘더’): ‘정의’와 ‘도시’를 연결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백진(이하 ‘백’): 보통 정의와 도시, 이 두 단어를 잘 잇지는 못할 것 같아요. 정의 그러면 보통 법정에서 따져야 하는 그런 문제로 생각할 것 같고, 도시가 무슨 정의와 관련이 있을까 생각할 거 같거든요. 도시가 이런 것들을 해야 한다고 할 때 보통 주거 공급, 사람‧물자‧정보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거나 전염병 예방, 범죄 예방을 얘기하겠죠. 우리가 이런 것들을 계속 해오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문제들이 계속 터지고 있어요. 행복지수가 낮고, 출생률도 낮고, 고독사하는 분들도 많고 그래요. 어쩌면 우리가 뭔가를 놓치고 잘못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연히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중에 《정치학》이라는 책을 보면 도시가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에 관한 이야기를 펴고 있어요. 거기에서 그리스의 스파르타를 예로 들어 우리가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스파르타 같은 경우 도시국가의 존재 이유가 뭐였냐면 군사적으로 강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라고 얘기하냐면, 스파르타의 가장 큰 문제는 군사력을 키워가지고 전쟁에 나가 이겨서 드디어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는데, 그 평화의 시기에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는 이 도시국가의 목표가 군사 강국을 이루는 것이 아니었고 행복한 시민의 삶이 목표였는데 수단과 목표를 혼동한 것이죠.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도시가 돌아가기 위해서, 시민들이 행복하게 오래도록 모여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그것이 ‘정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현대의 도시를 말할 때 언급되지 않았던 가치였고, 뭔가 얻어맞은 것처럼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정의와 도시가 별개의 문제가 아니고, 정의라는 논리가 기저에 깔려 있어야 도시가 오래 존속할 수 있는 거구나, 그래야 시민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구나. 그 외 다른 것들은 수단인데, 우리가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상태에서 계속 도시를 운영하고 만들어왔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이 정의와 도시를 연결하게 된 계기입니다.
더: 시인 이상이 도쿄의 긴자를 돌아보고 ‘별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도시라는 표현을 했는데,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도시가 상실한 ‘별’은 무엇일까요? 백: 시인 이상이 동경에 대해서 쓴 짧은 글이 있어요. 1936년도에 쓴 글입니다. 동경의 긴자(銀座)를 쭉 걸어보았던 것 같은데 굉장히 실망했어요. 밤에 가보면 네온사인이 막 화려하게 빛나고 그래서 대단한 도시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낮에 가보니까 그 네온사인 뒤에 철골 구조물 이런 것들이 건물에 닥지닥지 달라붙어 있고 굉장히 추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낮에 긴자의 모습은 해골바가지와 같다고 일갈을 하고, 그 긴자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은 별을 잃어버린 카인의 마지막 후손들 같다고 말합니다. 이상이 무슨 의미로 별이라는 단어를 썼고 별을 잃어버렸다고 했을까. 그건 정확히 알기가 어렵고요, 별을 잃어버렸다라고 하는 말이 굉장히 큰 영감을 주었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인용할 수 있을까, 활용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요.
지금 살고 있는 도시가 굉장히 거대한 도시잖아요. 살아가는 도정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그게 모여 살기의 가치 이런 게 아닐까. 우리가 이렇게 큰 도시를 만들어 살다 보니까 모여 산다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고 염증으로 느껴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고, 굉장히 피곤하잖아요. 경쟁에 내몰리고 있고, 각자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노후도 걱정해야 하고, 항상 불안하죠. 이런 삶을 살다 보니까 모여 살기라고 하는 것의 가치를 우리가 상실하게 된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모여 살기의 이득
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를 경이롭다고 표현하셨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백: 우리가 왜 도시를 만들어서 타자들과 모여 살기로 마음먹었을까. 그 연원을 찾아 올라가보면 이득이 있었기 때문이거든요.그 이득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선’이라고 얘기하죠. 우리가 이걸 잃어버린 거예요. 이 모여 살기 감각의 상실은 뭐하고 연결되어 있냐면, 모여 살기의 감각을 활성화시켜주었던 공간의 상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테네라는 도시를 보면 이 도시가 왜 인류 사회에서 굉장히 특별한 도시인가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아테네는 BC 6세기경에 민주주의를 고안하고 정착시킨 곳이거든요. 이게 어마어마한 일이잖아요. 그 당시 모든 다른 곳들은 패권주의가 판을 치고 있을 때, 여기에서는 타자들이 가족, 씨족, 부족을 넘어서, 혈연을 넘어서, 지역을 넘어서 사람들이 만나 “야, 우리 모여 살자” 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모여 살아야 하느냐. 우리가 모여 살기 위해서는 소통을 자주 해야 되는데, 소통할 수 있는 공적인 장을 만들고, 폭력이 아니라 수사로 서로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고 타협하고, 융합 승복 이런 것들을 지향해야 해요. 그런 어떤 원리, 이걸 돌려야만 우리가 오래도록 지속 가능한 도시라는 틀 안에서 공동의 선을 이루어내면서 살 수 있겠다, 라고 사람들이 합의를 본 것이죠. 그래서 여러 가지 제도와 시설들이 고안됩니다. 예를 들면 아고라에 가면 토론하는 곳이 생기고, 대의회라는 곳이 생기고, 소의회가 생기고, 법을 만드는 곳이 생기고, 법을 집행하는 법정이 생기고요. 비극 극장 같은 것도 생각해보시면, 사실은 인간이 신하고 서로 뭔가 엮여 있는 것 같은데 또 조건이 다르잖아요. 이것들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인생사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가, 이거를 보여주는 게 비극 극장이거든요. 이것도 소통의 문제이죠. 그다음에 우리가 굉장히 세속적인 시설로 생각하는 스타디움 같은 경우도, ‘너하고 내가 누가 더 창을 잘 던지나 보자’, 이거를 공적인 장을 만들고 한 6천 명에서 1만 5천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룰을 가지고 겨루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아테네가 고안해낸 것이에요. 우리가 서로 차이가 있는데 이 차이를 어떻게 드러내고 모으고, 여기에서 어떤 승복을 하고 타협을 하고 융합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것과 다 관련이 있는 것들이거든요. 이런 제도와 시설들을 곳곳에 포진시킨 것이 아테네이고, 이것이 바로 모여 살기의 감각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이유죠.
그래서 정의라고 하는 것은 잃어버린 별인데, 이것은 그냥 막연한 가치라기보다는 모여 살기의 감각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 모여 살기의 감각은 소통을 위해 폭력이 아니라 수사를 통해 공적인 장에서 서로의 차이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고 제3의 길을 찾아가는 제도화 시설로 구체화되었던 거죠.
더: 책에서 언급하신 ‘모여 살아가는 도시 자체가 인간에게는 자연이다’라는 표현이 와 닿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서울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백: 서울은 굉장히 독특한 진화의 궤적을 갖고 있는 도시입니다. 서울 인구가 대략 천만이잖아요. 근데 천만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중국에는 행정구역상 충칭 같은 도시는 3천만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럼 천만이 뭐 대단한 도시야, 라고 생각하실 수가 있는데, 서울 인구가 천만을 찍었을 때가 1988년이거든요. 그때 한국 인구가 4천 200만이었습니다. 4천 200만에서 천만을 모아낸 거잖아요. 그러니까 4.2분의 1을 모아낸 거고 대략 4분의 1을 모았다고 볼 수 있죠. 현재 중국 인구의 4분의 1을 모으면 그 도시의 인구가 얼마가 될까요? 3억 5천만이 됩니다. 그래서 천만짜리 도시니 뭐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엄청난, 상상할 수 없는 집적의 결과로 만들어진 도시가 서울이에요. 사람들이 막 몰려들죠. 그러면 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들을 계속해서 빨리 생산을 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업, 업무, 주거를 고층으로 고밀화해서 계속 지어냈고, 이 과정에서 도시라고 하는 게 기능별로 나뉘고 영역별로 나뉘고, 어느 순간에 보니까 계층별로 나뉘어 살고 있고요.
또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도시를 과밀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유탄을 맞은 시설들이 있는데, 그게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기피 시설입니다. 기피시설로 낙인찍히는 시설들 중 대표적인 게 교정시설이죠. 예를 들면 마포교도소, 영등포교도소, 수원교도소, 이런 것들이 아파트나 관공서를 짓는 데 자리를 내주고 다 외곽으로 밀려났죠. 마포교도소가 밀려난 게 안양교도소입니다. 그리고 마포교도소가 소유하고 있던 부속 농장 자리에 들어선 게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단지라고 하는 마포아파트 단지입니다. 도시라고 하는 게 결국은 상업, 업무, 주거, 엔터테인먼트, 이런 걸로 가득 채워지게 되고, 부담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용해야 하는 시설들, 죽음에 관한 시설, 교정시설, 장애와 관련된 시설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게 됐죠. 그래서 도시에 스펙트럼이 굉장히 좁혀졌고요. 빤빤하고 아름답고 건강하고, 이런 것들로만 채워진, 편집된 도시가 만들어지게 된 거죠. 이런 곳에서 살면 우리의 시야는 좁아질 수밖에 없고, 상상력은 굉장히 피폐해질 수밖에 없고, 포용력이 사라지는 그런 도시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는 거죠.
도시가 엄청나게 성장을 했습니다. 세계사의 도시 역사에서 자랑할 만한 도시가 서울이에요. 문명의 도시를 우리가 짧은 시간에 일구어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성장은 했는데 성숙한 도시를 만들지는 못했어요. 성숙한 도시라는 것은 삶의 스펙트럼이 다 보여야 해요.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죽는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가잖아요. 거기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보고 싶은 것들로만 다 편집해내고,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우리 시야에서 지워버리고 그게 어디에 가 있는지도 모르죠. 누군가는 그런 시설 속에 들어가서 힘든 삶을 살고 있을 거고. 이런 도시 공간이 탄생을 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성장도 지향해야 하지만 성숙을 같이 지향해야 하는데 그 부분을 놓쳐왔어요. 성숙한 도시는 포용력 있는 도시,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부담스러운 것도 삶의 진실과 연결이 된다면 안고 가는 도시, 다양한 계층이나 직업, 다양한 사고와 가치 체계를 가진 사람들과 다양한 세대,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들이 다 어울려서 똑같은 길과 시설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는 도시, 이런 도시가 성숙한 도시겠죠. 저희가 성장을 목표로 쭉 달려왔는데, 여기에다가 성숙이라는 걸 더해서 새롭게 방향을 잡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건축의 포용성
더: 책에서도 언급하셨는데, 마이클 샌델 교수도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학교, 도서관, 시청, 동 사무소, 체육관 등 공공시설의 질을 높이는 것이 21세기 도시가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넘어 오래도록 행복한 공동체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우리의 공공시설은 어떻습니까. 백: 제가 가끔 전주에 가는데요, 전주는 도서관의 도시인 것 같아요. 기차역에서 내리면 도서관이 방문객을 맞아주고요, 아주 낡은 오래된 도서관인데 이걸 굉장히 근사하게 리모델링해놓은 곳도 있고, 시청 1층 홀 자체가 도서관으로 꾸며져 있죠. 그리고 숲속에 작은 시집 도서관이라고 해서 계절, 또는 뭐 사랑, 우정 등의 주제로 큐레이팅을 해가지고 선별된 책들을 모아놓은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도서관에서는 아이들, 청년, 노인, 남녀가 다 어울려서 책을 보고 있고, 또 놀이방 역할도 하고 있는 것 같고, 키즈 카페 그런 역할도 하고 있는 것 같고요. 어떤 도서관에 가보니까 어린이 자치 영역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 층의 한 부분을 어린이들이 알아서 운영하고, 어떤 프로그램을 여기다 가져올지 이런 것도 상의하고, 공작실도 일부 가지고 있고, 뭐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서로 의견을 나누고 모아가고 이런 것들을 계속 훈련받으면서 크는 거잖아요. 이런 아이들이 자라면 나중에 서로 소통하고, 의사를 나눌 줄 알고, 어떻게 타협을 해야 하고 또 어떻게 제3의 공동의 좋은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이해하는 청년들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공시설도 많이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법원 같은 걸 제가 좀 연구할 기회가 있었는데, 시민들이 들어오면 내가 안 들어와야 할 데를 들어온 것 같다, 뭔가 어색하다, 배척받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환영받는 느낌이 들도록 법원도 시설 개선을 하려고 연구도 하고 방향을 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권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권위주의는 가부장적인 또 전체주의적인 제도가 낳은, 폐기되어야 할 유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검찰청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 같고요. 기타 시청 등 행정 관련 시설들도 권위주의적인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공공시설은 가장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는 시설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집에다가 엄청난 공력을 들이잖아요. 좋은 마감재를 쓰고, 좋은 가구를 들여다 놓고, 뭐 좋은 음악 설비를 갖추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이렇게 많은 공력을 들이죠. 그런데 사실은 더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하는 시설이 공공시설입니다. 도서관, 주민시설, 동사무소라든가 법원 같은 시설을 공력을 들여 질 높게 만들면 시민들의 삶의 질이 올라가는 겁니다. 이런 부분을 앞으로 많이 신경을 쓰면서 도시민의 삶의 질을 올리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더: 책의 후반에서 루이스 칸도 예로 드셨고 ‘도서관은 사람을 모아주는 지속적인 포용의 무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건축적으로 ‘포용’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나요? 그리고 노숙자들 같은 사람들을 포함해 누구나 다 도서관에 들어가지는 못하는데요. 백: 몇 가지 측면이 있을 것 같아요. 기획의 측면이 있고, 또 운영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운영의 측면이 있고, 그다음에 건축적 공간의 관점에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이 다 같이 고려가 되어야만 포용력 있는 도서관이 나올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기획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저는 기획의 초기부터 시민들이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분들이 나중에 결국은 사용자가 되고, 애정을 갖고 운영할 수 있는 운영의 한 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기획 단계에서부터 시민을 배제하지 않고 참여시키는 틀을 짜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건축적인 측면에서 말씀을 드려보면, 포용력 있는 도서관이 나오려면 일단 위치가 좋아야 할 것 같아요. 공공시설을 잘 만들었느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요소 중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느냐죠. 도시에서 예를 들어서 조망이 좋은 곳, 빛과 바람이 잘 드는 곳, 모든 사람이 쉽게 갈 수 있는 곳, 이곳에는 개인이 독점하는 건축물을 지어서는 안 되고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건축물을 지어야 하거든요. 예를 들면 공공시설이겠죠. 그다음에 그 시설 앞에 마당 같은 것들을 내어놓고 있느냐, 그러니까 오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받아주고 또 건물 앞에 사람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옥외 공간을 갖고 있느냐, 도시에 대한 이런 자세들도 중요할 것 같고요. 그러니까 내가 쉽게 들어갈 수 있는가, 내가 들어가도 되는 공간인가 아닌가, 이런 스크리닝 없이 내가 그냥 쓱 들어갈 수 있는, 문턱이 낮은 건축적 구성을 하고 있는가, 이런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안에 들어가 있는 각 공간들의 질도 굉장히 높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공부를 하는 공간이다, 독서를 하는 공간이다 그러면 거기에 어떤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해낼 수 있어야 하죠. 제가 갔던 어떤 도서관은 꼭 조용하고 내밀한 곳에서만 사람들이 공부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어요. 약간은 소음이 있어도 상대방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같이 공부할 수 있는 그런 공간도 만들고, 또 앞쪽에 굉장히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그쪽으로 좋은 창을 낸 공부하는 공간도 만들고, 그렇게 다양한 질을 가진 공간을 만들고 있는 걸 보았거든요. 이런 것들은 사람들한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가겠죠. 오고 싶어하고, 오면 또 내 상황에 맞는 공간을 찾아 들어갈 수가 있으니까.
또 중요한 거는 공간을 만들 때 그 지역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같이 협의해가지고 끼워 넣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게 도서관의 일반적인 프로그램하고는 안 맞는 것이라 하더라도 시민들한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끼워 넣었을 때 결과적으로 굉장히 창의적인 도서관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이고 또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그런 도서관이 되는 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케임브리지의 시립도서관에 한번 가본 적이 있었는데, 긴 테이블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긴 테이블에서 딱 분위기를 보니까 앞에 계신 분은 학자예요,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은퇴하신 분이거나 어쨌든 노 교수님인 것 같아요. 케임브리지는 대학교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는 게 아니고 도시 곳곳에 침투해 다른 시설들하고 섞여 있거든요. 그런데 그분 옆에 아이가 앉아 있었고, 그 아이 옆에 그 아이를 도와주는 사서분이 앉아 계셨어요. 이쪽 편에는 누가 앉아 있냐면 딱 봐도 노숙자인 게 뻔한 그런 분이 앉아 계셨어요. 근데 도서관에서 그 노숙자 분이 들어오는 거를 막지 않았어요. 저는 여기서 문화적인 충격 같은 걸 받았습니다. 저희 같으면 당연히 문에서 못 들어오게 막았겠죠. 그 노숙자를 보니 자기의 잡동사니들을 담은 낡은 비닐봉지 네다섯 개를 쭉 옆에 놓고 앉아서 책을 꺼내 읽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걸 아무도 제지하지 않습니다. 그 테이블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도서관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테이블이 뭘 모으고 있냐면,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어쩌면 세계적으로 유명할지도 모르는 노 교수와 아이와 사서와 노숙자를 같이 모아주고 있잖아요. 도서관이 그렇게 모아주고 있는 것이잖아요. 여기에서 그 아이는 어떤 감각이 움틀까, 싹틀까, 이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노숙자를 보고 케임브리지대학교 노 교수를 보고 사서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이가 이 세상에 대해서 갖는 생각은 어떤 것일까. 만약에 노숙자를 쫓아냈다면 그 아이는 세상의 100퍼센트를 보는 게 아니고 70퍼센트, 80퍼센트, 50퍼센트 정도만 보면서 살아가겠죠. 그 아이의 시야는 제한이 될 것이고, 상상력이 제한될 것이고, 내가 어떤 사람들을 케어링하면서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가 상상할 때 제약이 오겠죠. 그래서 도서관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아파트가 많습니다. 도시와 집의 관계가 우호적이지 않은데요. 백: 박완서 선생님 집하고 승효상 선생님 집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바로 그런 현상이죠. 도시가 바깥에 나가면 불안하고 안정감이 없고요. 바깥 도시가 너무 황량한 거예요. 개인이 버텨나가기가 너무 힘들어요.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거예요. 돌아다니면 사방이 다 공사판이잖아요. 흙먼지 날리고 잘못하면 지게차에 치이고. 지금은 그게 1단계 끝났으니까 그런 모습이 드러난 것처럼 보이지만 80년대, 90년대, 70년대는 다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피난처가 필요한 거예요. 그 역할을 해준 게 단독주택이었죠. 대문을 열고 담장으로 둘러쳐진 그 집 안에 들어서면 중정이 있고, 우물을 통해서 이렇게 보는 하늘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고요하고 내밀하고 평온한 거죠. 지금은 우리가 단독주택을 짓고 살 수는 없으니까 아파트나 공동주택에 주로 살고 있는데, 도시와 집의 적대적인 관계는 똑같아요. 오히려 더 강화됐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전통 가옥을 생각해보면 담장이 애매하게 높아요. 교도소 담벼락처럼 높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확 낮은 것도 아니에요. 이렇게 하면 보일 만한 정도고 그다음에 마당이 있잖아요. 그다음에 툇마루가 있고 대청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신발 신고 마당까지 들어갈 수 있죠. 그리고 툇마루에 걸터앉을 수도 있죠. 아직 신발을 안 벗었잖아요. 내가 그 집 안으로 침범해 들어간 게 아직 아니에요. 다시 말하면 이 마당이라든가 그 주변에 딸린 툇마루, 대청마루는 중간 영역이었던 거예요. 내가 남의 내밀한 것을 너무 방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집 바깥에 소외된 것도 아닌 중간 영역을 나름대로 갖고 있었던 거거든요. 이런 것들이 저희가 많이 상실한 그런 공간이고요. 이런 공간이 사실은 굉장히 소중한 것들이거든요. 모여 살기의 감각을 키워주는 것들이에요. 공공시설도 마찬가지인 거고요.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예요. 강제적으로 모이라고 그래서 모이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교육을 통해서 주입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판을 깔아주는 거거든요. 이런 곳에서 모여 살기에 대한 감각이 움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정시설 사유하기
더: 동부구치소 등 교정시설에 대한 사유가 흥미로웠습니다. 우리나라 교정시설은 어떤가요. 백: 일단 이 교정시설은 교도소와 구치소 이 두 개가 구분이 돼야 합니다. 구치소는 미결수를 수용하는 곳이고 교도소는 기결수를 수용하는 곳이죠. 그래서 구치소의 경우는 법원, 검찰에 같이 붙어 있어야 돼요. 계속해서 출정을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그런 예가 몇 개 안 되는데, 그 예 중의 하나가 동부구치소입니다.
동부구치소는 서울 도심에 들어와 있는 구치소예요. 바로 옆에 법원이 있고 검찰이 같이 붙어 있죠. 지하에 3미터 폭, 한 350미터 길이의 통로가 있어서 이 통로로 미결수들이 오가면서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고 이러죠. 이거는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예외적인 현상이에요.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교도소, 구치소 상관없이 이 5미터 담벼락 안에 있는 것들은 똑같이 안 좋은 곳, 혐오시설이기 때문에 똑같이 외곽으로 보내는 일을 계속해서 해왔습니다. 그래서 구치소에서 매번 호송차에 태워가지고 법정으로 검찰청으로 출두시키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는 겁니다.
교도소와 구치소는 좀 구분을 해야 합니다. 교도소는 외곽으로 보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기결수이기 때문에 1년, 5년, 또는 그 이상 있을 수 있잖아요. 그 기간 동안 있으면 되는 거기 때문에 괜찮아요, 상대적으로. 그런데 구치소는 교도소랑 같이 묶어가지고 외곽으로 보내버리면 엄청난 행정력 낭비가 일어나는 겁니다. 법원하고 검찰청이랑 같이 세트로 묶여서 건축되는 게 사실은 바람직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현재 그렇지 못한 상황이고요. 그다음에 이 담장 안에 그것만 있느냐, 그게 아니고 여성과 남성 영역이 또 나뉘어 있어요. 그럼 생각해보세요. 교도소, 구치소, 여성, 남성, 그러면 영역이 네 개가 생기는 겁니다. 근데 이 네 개가 성격이 다 너무 달라요. 이걸 한 담장 안에다가 묶어서 처리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교정시설의 현주소예요. 여기에서 많은 어려움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도 앞으로 우리가 풀어나가야 되고요.
그리고 지금 교정시설을 지을 때 독거실 위주로 많이 지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혼거실 위주로 많이 짓고 있어요. 독거실은 1인실이죠. 혼거실은 3인실, 5인실이 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는 과밀 수용 문제에 시달리고 있잖아요. 과밀 수용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건 뭐냐 하면 3인실에 다섯 명, 많을 때는 일곱 명까지 들어간다는 거고, 5인실에 일곱 명에서 많을 때는 열두 명까지도 들어간다고 그래요. 근데 상상해보세요. 변기가 하나잖아요 아침에 열 명이 변기 하나를 두고 싸워야 하는 겁니다. 과밀 수용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독거실로 교정시설을 지어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수용자 1인에 대한 면적 기준이 굉장히 낮아요. 이것을 국제 기준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1인당 적정 면적 기준이 국제적십자위원회의 경우는 제가 기억하기로 독거실의 경우 5.4제곱미터, 혼거실의 경우 3인실일 때 1인당 면적 기준이 3.5제곱미터 이렇거든요. 그동안 우리는 국제 기준에 부합해서 교정시설을 지어오지 못했고, 지금 새롭게 짓고 있는 시설들은 거기에 부합하게 지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죠. 저희가 일제강점기에 맨 처음 강제적으로 받아들였을 때는 교도소가 방사형이었어요. 그게 제일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간수소를 가운데다가 놓고 날개를 달면 간수를 몇 명 안 두더라도 많은 수용자들을 수용할 수가 있었죠. 그게 우리 독립운동과 관련된 지사들을 잡아들여가지고 효율적으로 수용을 하겠다고 도입한 형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근데 그게 통풍이나 채광에 굉장히 안 좋아요. 특히 날개가 접히는 부분들은 통풍이 더 안 되는 거죠. 우리나라는 여름에 덥고 습한데 통풍이 안 되는 곳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상상할 수 있습니까? 일본도 비슷한 풍토에 있기 때문에 이제 다행히 일본도 문제를 깨닫고 이거를 바꿔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도입이 된 것이 ‘전주형’이라고 제가 이 책에서 부른 거예요. 이게 쭉 성냥갑 놓듯이 놓는 아파트랑 비슷합니다. 그래서 한 동, 한 동, 한 동, 이렇게 놓는 거거든요. 복도를 옆에다 쭉 붙여가지고 이어주는 거죠. 이렇게 되면 예를 들어서 남쪽으로 방향만 잘 맞으면 빛이 들어오고 바람이 잘 들어온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전주형으로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이걸 바꿨는가를 잊어버렸어요. 지금 잊어버린 상태예요. 원래 수용자들의 거주 환경을 좀 더 개선하기 위해서 바꿨던 건데, 이걸 잊어버리고 인동(隣棟, 인접한 동) 간격을 좁힌다거나 굉장히 폐쇄적인 공간을 만들다 보니까 바람이 통해야 하는데 통하지 않는다거나 이런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고요. 그래서 다시 왜 우리가 방사형에서 전주형으로 바꿨을까, 이걸 다시 생각해보면서 적절한 채광, 통풍 이런 것들을 확보할 수 있는 건축 계획을 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에 왔습니다. 우리 사회 인식이 수용자 처우에 대해서 굉장히 박한 편입니다. 범죄자한테 왜 우리가 이런 처우를 해야 되느냐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단기간으로 보면 맞는 생각일 수 있는데, 중기 장기로 보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사형수나 무기징역수 빼고는 다 다시 돌아옵니다. 제가 평균 복역 기간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는데, 한 5년 또는 그 아래일 거예요. 이분들은 다시 사회에 돌아옵니다. 사회에 돌아왔을 때 이분들이 교정시설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회로 돌아와서 같이 또 어울려 살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분들이 교정시설에서 조금 더 인간적인 거주 환경에서 지내다가 돌아왔느냐 아니면 인간 창고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다 돌아왔느냐는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학교시설에 들어가는 공사비가 얼마인 줄 아느냐, 교정시설에 들어가는 공사비가 얼마인지 아느냐. 교정시설에 들어가는 공사비보다 학교 시설 건축에 들어가는 공사비가 작거나 똑같다, 이게 말이 되느냐는 논리를 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겁니다. 교정시설은 24시간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거주 공간입니다. 그리고 벽의 양이 엄청나요 방을 쫙 나눠줘야 되잖아요. 그 벽이 방음벽이어야 하고 두꺼운 구조벽이어야 해요. 그다음에 설비 같은 것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학교 공간에 들어가는 공사비하고는 사실 비교하면 안 되는 공사비를 내야 되는 그런 시설인 거예요. 이런 차이를 이해하지 않고 우리가 학교시설을 조악하게 지으니까 그거를 비판하기 위해서 교정시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잘못된 비교죠. 교정시설에서 일하시는 분들이나 수용자 분들, 또 법무부 관계자분들한테는 굉장히 부적절하게 다가올 수 있는 이야기이고요. 그래서 교정시설과 학교는 사실은 공사비를 가지고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전혀 아니예요. 교정시설은 학교시설과는 달리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24시간 생활하는 거주 공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은 공사비가 책정되어야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고, 그래서 앞으로 교정시설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시 들여다봐야 하겠습니다.
모여 살기를 시도하는 사람들
더: 모여사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가나자와의 ‘셰어 가나자와’와 고마쓰시에 있는 ‘사이엔지’를 예로 드셨는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공동체 마을이 있는지, 소개하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백: 제가 일본 가나자와에 있는 ‘셰어 가나자와’하고 ‘사이엔지’를 방문하고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저희가 앞으로 모여 살기의 어떤 재편을 한다면 그런 것들이 우리한테 지향점이 되어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보면 유사한 사례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예 중의 하나가 도봉구의 ‘은혜공동체’라고, 지금은 ‘오늘공동체’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거기서 운영하는 공동 주거가 있습니다. 이 공동 주거는 현재 세 개인가 네 개인가 지어가지고 계속해서 모여 살고 있는 걸로 아는데 공동육아, 공동식사, 공유 오피스 활용, 그리고 대안학교 운영, 그다음에 공동체 지원 창업 활동, 이런 것들을 권장하고 지원하는 그런 모여 살기를 하고 있어요. 제가 알기로 14가구에 한 47명 정도가 모여 살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제가 답사해보니까 가족이라는 틀에 매이기보다는, EBS에선가 다큐를 찍을 때 보니까 ‘간헐적 가족’이란 용어로 비혈연 관계라도 가족의 유대감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지향하면서 행복하게 사시는 것 같아요.
발달장애인 관련해서 조금 색다른 모여 살기를 시도하고 있는 곳들도 있는데요, 구산동에 가면 ‘다다름하우스’라고 있습니다. 저도 잘은 모르는데 발달장애인이 성인이 되면 지원 시설에서 독립을 해야 한다고 해요. 독립을 하는데 다시 부모님한테 가서 부모님의 케어를 받고 부모님 댁에서 살 수도 있겠죠. 근데 본인한테도 그렇고 부모님한테도 그렇고 좀 부담이 될 수 있겠죠. 부모님도 일을 하셔야 하고 이럴 수 있는데. 그래서 다다름하우스는 성인이 된 발달장애인이 자립할 수 있도록 발달장애인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런 자립지원형 공동 주거인데요, 여기는 발달장애인만 사는 게 아니고 일반 청년들도 같이 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임대료를 싸게 책정했기 때문에 다른 일반 청년분들도 이득이 있는 거죠. 그다음에 강화도에 가면 ‘우리 마을’이라고 있는데 역시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자립을 지원하는 시설입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거기에서 생활을 하고 주말이면 부모님들이 데리고 가서 주말을 보내고 다시 월요일에 시설로 돌아오고 하는 형태로 운영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이게 그냥 단순히 발달장애인들을 돌보는 시설이 아니라 자립을 도와주는 시설이에요. 그래서 제가 알기로는 콩나물 공장을 운영합니다. 풀무원에서 콩나물 생산을 위한 자문을 해주는 걸로 알고 있어요. 발달장애인들이 단순히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참여하고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수입도 만들고 자립의 기초를 만드는 그런 지향점을 갖고 운영되는 마을이죠. 성공회 소속 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대안공동체입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게 남양주 ‘별내 위스테이’라고 하는 아파트 단지예요. 한 500세대에 육박하는 아파트 단지인데(500세대라고 보면, 세대 당 2.5명이나 3명 잡으면 1천 500명 정도의 공동체) 굉장히 공동체 활동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주민분들이 여러 가지 다양한 취미활동 그룹을 만들어가지고, 주민 공유시설 이런 것들을 도서실에 포함하고, 취미활동과 관련한 음악이라든지 막걸리 제조라든지 이런 걸 위해 공유 공간들을 잘 구비해가지고 굉장히 활기찬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런 아파트 단지인데요. 입주 전부터 입주할 분들이 미리 모여서 우리에게 어떤 공유 공간이 필요하냐, 어떻게 공동체를 운영해야 하느냐, 이런 부분들을 상의해서 건물이 준공되었고, 입주한 후에 또 다른 분들이 추가로 입주해 들어오셨는데 계속해서 유지해나가면서 지금까지 굉장히 행복한 공동체가 활성화되어 있는 그런 아파트 단지로 잘 알려져 있어요.
제가 가서 보고 놀랐던 점 중의 하나는 아이들이 굉장히 많은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공동육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기가 쉬운 겁니다. 그래서 들어올 때는 그냥 아이가 하나였던 분들도 여기 들어온 다음에는 둘째, 셋째를 낳는대요. 보통 하나도 낳지 않거나, 낳아도 하나 낳으면 끝이잖아요. 근데 하나를 낳고 들어왔던 분들이 여기 와서 보니까 아이 키우는 게 쉬워서 둘째, 셋째, 이렇게 많이 낳고 있고, 그래서 다른 단지와 달리 뛰어노는 아이들의 수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정의의 회복
더: 공간과 도시가 한 사회 내의 단절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주장이 매우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이 책의 결론으로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을 말씀해주세요. 백: 제가 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도시라고 하는 것이 오래도록 존속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행복하려면 우리가 다시 붙잡아야 하는 그런 가치가 있는데, 그게 ‘정의’인 것 같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저는 도시학자라고 이해를 하고 있어요. 이 사람이 물론 철학자이기는 하지만 정치학, 윤리학에서 하는 이야기를 쭉 보면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니까, 이 도시가 자연이다 이런 얘기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고 이 책에도 제가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인간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보면 도시를 빼놓고 이해해서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허구적이고 이론적인 이해일 수밖에 없다고 깨달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까 이 도시라고 하는 걸 꼭 같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게 아닌가 싶고요. 그래서 정치학, 윤리학에서 이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아리스토텔레스가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말씀드린 것처럼 도시가 오래도록 존속하면서 그 안에 살아가는 시민들이 오래도록 연대를 할 수 있으려면 ‘정의’라고 하는 원리가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제일 중요한 게 사람 간의 소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기술은 사람의 소통을 촉진하기 위해서 활용을 해야 하는 것이지, 기술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기술 자체에 도시를 맞춘다거나 하는 것은 수단과 목적이 혼동된, 그래서 오도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소통을 하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나면 생각지 못한 어떤 기회가 생기게 되죠. 창의력이 생기게 되고,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면서 경제적인 기회도 생기고, 사람들의 행복도가 높아질 수도 있고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해결되는 상황도 사람들 간의 소통이 이루어질 때 일어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단절된 공간 구조, 사람을 자꾸 떼놓고 계층 간 가르고 세대 간 가르고 장애인 비장애인 가르고 이런 공간 구조를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서울의 경우는 지난 60년간 만들어왔는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우리가 앞으로 타파해나갈 것인가. 도시 공간 구조의 혁신 그리고 제도화 시설의 혁신, 소통을 활성화하는 제도화 시설의 활성화, 거기에 이제 공공시설 같은 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야 되겠죠.
살아있는 도시
더: ‘춤추는 도시를 낳으려면 은유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설명해주신다면요? 백: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혼돈이 불가피하다’ 이렇게 이야합니다. 그런데 제가 별을 도시로 바꾸었고 혼돈을 은유로 바꾸었습니다. 크게 보면 혼돈 그러면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고 사실은 긍정적인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물을 이미 누군가가 다 습관적으로 고정시켜놓은 의미로만 바라보면 혼돈이 생길 수가 없죠. 모든 것들이 명쾌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것처럼 그렇게 다가오겠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주구장창 짓는 아파트는 상품이야, 그러면 그냥 아파트는 상품이라고 보면 혼돈이 안 생기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파트를 이게 상품인가? 이거 혹시 우리가 정주해야 되는, 상품 이상의 의미 또는 다른 의미를 갖는 거주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이게 일종의 혼돈인 거죠. 그래서 혼돈은 기존의 어떤 관습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깨고 우리가 도전장을 던질 때 부딪히게 되는 세상의 새로운 모습, 이걸 혼돈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이제 이 혼돈을 은유라고 바꾸었습니다. 은유는 a가 b로도 보이는 게 은유죠. 사물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것이 저것으로 나타나는 것, 그게 은유이죠. 사과가 돌멩이가 될 수도 있고, 그걸 이 책에서 얘기를 하는데요. 도시를 어떻게 바라볼까. 우리가 그동안 도시를 이해해왔던 방식은 굉장히 범주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었다고 생각을 해요. 이거는 요거야, 이거는 뭐 상업시설 오피스, 이거는 뭐 무슨 공장, 이거는 무슨 거주지, 이거는 공원, 여기까지는 도로 여기 여기서부터는 건물……. 집 안에도 보세요. 여기는 화장실, 여기는 거실, 여기는 무슨 키친다이닝, 이렇게 탁탁 나누잖아요. 이렇게 범주로 정확하게 명징하게 나누어놓는, 이런 세계관에 기초해서 도시를 이해하고 도시의 질을 평가하고 성능을 평가하고 계획을 하고 이래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집을 예로 들어보면 거실은 때로는 극장이 되거든요. 요즘은 잘 안 모이겠지만 명절에 어쩌다 한 번씩 모이면 장기자랑을 할 때도 있거든요. 그러면 안방은 백스테이지가 되고, 거실은 관객들이 앉아 있고 앞쪽이 무대고 뒤쪽에 관객들이 앉아 있는 곳이 되고, 혹시 로프트가 있는 집이라면 로프트는 또 발코니 석이 되겠죠. 극장인 거예요. 그래서 어떤 건축물 또는 공간이 갖는 장소의 의미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계속 다른 의미로 다른 행위를 품으면서 나타날 수가 있죠. 그런데 이런 상상을 하기가 되게 어려워요, 범주적인 사고를 하면. 그래서 자꾸 도시는 명료하게 분절을 시켜놓고 이거는 이것만 해야 되고 저거는 저것만 해야 돼, 여기까지는 도로고 여기서부터는 집이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공원이고 그래서 공원과 관련 없는 다른 것들은 여기에 침입을 하면 안 돼, 이런 식으로 분절적인 사고를 많이 해왔던 것 같아요. 이게 생명력 없는 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고요. 생기로운 도시, 좀 과장하면 춤추는 도시, 이런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분절적인 사고를 넘어서 이것이 저것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는 사유, 또 이것에 기초한 도시 만들기는 어떤 걸까 상상하는 것, 이것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지금 우리 사회,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백:저는 모여 살기의 어떤 감각을 조금 회복하는 것, 이게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저희가 주거를 만드는 방식을 보면 철문이 닫히고 나면 세상과 단절되잖아요. 그래서 모여 살기의 감각이 실종된 그런 시대를 살고 있고요. 모여 살기의 감각을 활성화하는 중간 영역을 우리가 상실했는데, 그게 내 집 안과 바깥 사이에 존재하는 영역이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그런 영역들을 어떻게 활성화해나갈까, 시대가 건축 도시를 더 진화시키는 과정에서 고민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백진_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울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와 도쿄대에서 강의했고, 현재는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로 건축 및 도시 이론을 강의한다. 건축, 도시 분야의 세계적 석학들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건축과 현상학’, ‘아시아의 도시문화’ 등 다양한 국제 심포지엄을 기획하고, 네이버TV ‘서울대 지식교양 강연-생각의 열쇠, 천 개의 키워드’ 시리즈에서 ‘건축의 구축과 문화적 의미’, ‘정의와 도시’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최근 ‘정의’와 ‘도시’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연결한 저서 《정의와 도시》(전2권)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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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 휴먼라이브러리에서는 책이 아닌 ‘사람’을 빌릴 수 있다. 2000년 봄 덴마크 출신의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로부터 시작된 ‘사람책’ 프로젝트는 현재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처음에 사람책은 난민이나 소수자 등 쉽게 만나기 어렵고, 목소리를 잘 들어볼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휴먼라이브러리에서는 누구나 사람책이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