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어릴 적 특별히 좋아한 책이나 작가가 있었는지? 지금의 이수희 작가를 만든 독서 경험이 궁금하다.
9살 무렵에 읽은 아인슈타인 위인전. 엄마가 독후감 노트를 사주고 감상문을 쓰게 했다. 어린이 독자를 위한 짧은 평전이었지만, 줄글로 된 책을 읽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며칠에 걸쳐서 힘들게 읽고 쓴 독후감을 들고 부모님에게 달려가자 아주 열렬히 칭찬해주셨다. 지금 그 독후감을 떠올려보면 거의 책 내용을 필사하다시피 써서 내 생각이라거나 감상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첫 독후감을 쓴 내게 작가가 되라고 했다. 나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더니, 화가도 작가라고 해서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처음으로 완성된 글을 써본 강렬한 기억이다. 그날의 짜릿함이 작가 이수희를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지금 글 작가와 그림 작가 양쪽을 다 이뤄내긴 했으니까. 애가 하는 일은 뭐든 칭찬하고 볼 일이다.
Q 《동생이 생기는 기분》으로 2020년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을 수상했다. 수상을 하고 단행본이 나오기까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를 돌이켜본 소회를 듣고 싶다.
《동생이 생기는 기분》은 10살 어린 동생이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을 네 컷 만화와 에세이로 묶은 책이다. 나를 작가로 만들어준 고마운 책. 브런치로부터 메일을 받고 펑펑 운 날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한동안은 이 책을 만들면서 겪은 감정 소모, 작업물의 아쉬움, 가족에 대한 여러 생각 때문에 씁쓸함도 느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읽어봤는데, 아주 좋았다. 앞으로 내가 이 책보다 더 좋은 책은 만들 수 없겠다는 예감이 들 정도로. 작가로서 슬프다거나 두렵지는 않다. 오히려 기쁘다. 정말로 좋은 책을 만들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무 자화자찬하나 싶지만, 그동안 너무 안 했으니까 하고 싶다. 《동생이 생기는 기분》은 좋은 책이다!!
Q 일기를 꾸준히 쓰고 독서도 쉬지 않는다고. 자기만의 ‘쓰기-읽기’ 루틴이 있는지, 꾸준한 쓰기와 읽기가 창작 외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지도 궁금하다. 일상을 소재로 만화를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이니, 독서가 ‘거리 두기’ 혹은 ‘환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거칠어진 얼굴을 정성껏 세수하고 로션을 바르면 피부 결이 전보다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일기와 독서는 생각과 마음을 정돈해준다. 그래서 나는 내 상태가 안 좋네, 싶으면 일기를 쓰고 책을 읽는다. 문제는 상태가 항상 안 좋아서 항상 쓰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종이 일기장보다 블로그 일기를 좀 더 열심히 쓰고 있다. 종이 일기는 나중에 다시 읽는 일이 거의 없고 나만 이해할 수 있는 형사수첩이자 암호지만, 블로그 일기는 나중에 다시 읽기도 하고 친한 친구들과 공유하는 글이니까 환기되고 재미있다. 독서는 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과 연결 지으며 책을 읽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내 작업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책을 읽을 때도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무언가를 잘 하고 싶은데 돌파구가 없을 때 책을 읽기도 한다. 다독은 무조건 남는 장사다.
Q 브런치에 연재한 ‘도서관 만화’ 중 ‘도서관의 덕후들’ 에피소드가 있다. 거기에 도서관에서 읽은 가장 특이한 책, 도서관 공용 PC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이용자를 목격한 내용 등이 나온다. 문득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다양한 책과 사람들로 생생하게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수희가 ‘도서관’을 다른 단어로 바꿔 부른다면 무엇일까? 그렇게 부르고 싶은 이유도 듣고 싶다.
자취를 시작하고 집에 혼자 있으니까 너무 좋았다. 그런데 프리랜서로 연차가 쌓여가면서, ‘자기만의 방’만큼이나 공공장소가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프리랜서는 물리적으로 고립되기 쉽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교차하는 곳에 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도서관은 정말 완벽한 곳이다. 돈이 없어도 갈 수 있고, 앉을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빌릴 수 있다. 심지어 연체를 해도 나중에 용서해준다(수많은 용서를 받았다). 무엇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 대화를 나눌 일도 없고 성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곳에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도서관을 다녀오면 내가 사람들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감각, 나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감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감각으로 종양처럼 자란 고립감을 다룰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을 나의 ‘또 다른 방’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송도국제도서관이 나의 ‘또 다른 방’이다. 내 방 으리으리하고 너무 좋다! 너무너무!
Q 《동생이 생기는 기분》 《사진의 기분》 《난 슬플 때 타코를 먹어》를 보면, 지나치기 쉬운 일상 속 순간이 풍성한 이야기로 확장되는 게 무척 인상적이다. 일상 속에서 이야기가 될 순간을 어떻게 발견하고 포착하는 편인지 듣고 싶다.
다른 에세이 작가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 에세이 작가는 주인공병, 자의식이 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그래야 자기 일상에서 포착하는 것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있고, 장면으로 기억하고 표현할 수 있다. 난 내 동생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아기라고 생각했고, 내가 타코집에서 알바한 경험이 정말 재밌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주인공병으로 자신의 일상에 대해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산문 쓰기의 재미있는 점은, 쓰다 보면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구나’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결국 내가 직접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읽어보며 객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에세이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은…… 자의식 과잉이라 그렇다.
Q 작품 제목에 ‘기분’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수희 작가에게 ‘기분’이란 무엇일까?
지금 내 스마트폰 배경화면에도 ‘의무를 다하는 것이 기분 관리’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렇게 보니 기분이란 단어를 정말 좋아하나보다. 그래서 친구들과 장난으로 ‘기분 전문가’ 이런 말도 한다. ‘기분’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번역되기 힘들다는 얘기도 어디서 봤다. 이유가 ‘feeling’, ‘mood’ 같은 단어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좀 더 흐릿한 범주의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그런 점에서 ‘기분’은 되게 많은 걸 품을 수 있고, 놔줄 수도 있는 단어다. 그리고 기분 좋아! 기분 나빠! 하면서 획획 바뀔 수 있다. 개인이 미세하게 느끼는 농도 같은 것. 에세이에 정말 어울리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기분’이 들어가는 책을 한 권 정도는 더 내고 싶다. 이수희 기분 삼부작!
Q 민음사에서 발행하는 문학잡지 《릿터》에서 ‘첫 책을 내는 기분’이라는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인터뷰어가 되어 첫 책을 낸 작가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할 때의 마음가짐이랄지, 피하고자 하는 질문, 처음 진행했던 인터뷰와 지금 진행하는 인터뷰에 달라진 점 등이 궁금하다.
‘첫 책을 내는 기분’은 내가 첫 책을 낸 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만화와 일러스트를 그리는 코너다. 오랫동안 진행해왔는데도 작가님들을 뵙기 전에 굉장히 설렌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나면, 정리된 인터뷰 녹취록 안에서도 그 생생한 즐거움이 전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작가님과 함께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순위 목표다. 궁금한 건 최대한 다 물어보고, 이런저런 농담도 한다. 피하고자 하는 질문은 딱히 없는데, 그러다 보니 좀 엉뚱한 질문을 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럴 때 작가님들의 재밌고 놀라운 답변을 듣기도 한다. 첫 인터뷰를 했을 때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서하 시인, 정대건 소설가가 인터뷰이였는데, 그때 나는 정말 내가 뭘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 또한 첫 책을 낸 지 얼마 안 된 작가여서, 첫 책을 낸 흥분과 감동에 대해서 공명했다. 그 이후로 조금씩 경험이 쌓여가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에서 ‘그래도 하다 보면 돼!’로 자신감이 붙었다. 조금 성장한 셈이다. 이렇게 답변을 하다 보니 ‘첫 인터뷰를 한 기분’도 굉장히 소중한 것이구나…… 깨닫게 된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 매춘부의 아이들을 키우는 로자와 그곳에 맡겨진 소년 모모의 이야기다. 아이가 화자인 책을 좋아해서 《동생이 생기는 기분》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아무 때나 펼쳐도 눈물이 난다(그래서 잘 안 펼친다). 사랑은 추함과 아름다움, 정상과 비정상, 도덕과 비도덕을 막론한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다. 사랑은 아름다움과 무관하다는 것, 그래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
장자크 상페의 《겹겹의 의도》 : 사실 상페의 모든 책을 우열 없이 균등하게 좋아한다. 이 책이 더 좋다거나 하는 게 없다. 그냥 다 좋다. 설렘을 느끼고 싶을 때 펴고, 웃고 싶을 때 보고,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때 읽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상페를 보는 것은 옳다. 상페의 삽화가 좋은 점은 ‘정확하다’ ‘사랑스럽다’ ‘맹렬하다’ ‘우스꽝스럽다’ ‘편안하다’와 같은 다양한 층위의 감상을 한 장의 그림에서 모두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삽화’라는 일의 가장 정확한 설명은 ‘상페’다.
하마노 지히로의 《성스러운 동물성애자》 :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저자가 독일의 동물성애자 단체를 인류학적으로 관찰하는 연구 에세이다. 읽는 동안 역겨움부터 선함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감상을 단 한 권의 책에서 느낄 수 있다. 제목만 보면 다들 “엥? 왜 그런 걸 읽어?”하는데, 읽어봐야 안다. 얼마나 좋은 책인지. 다시 읽고 또 생각해봐도 끊임없이 거대한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뜨거운 책. ‘민음사 라디오’에서도 다뤘으니 들어주시길!
Q 차기작은 어떤 내용일까? 간단히 소개해준다면?
《인형의 시대》라는 만화책이 민음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이번에는 일상물이 아닌 창작 스토리물이다. 인형이 움직이는 사회라는 설정 안에서 다양한 인형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로 진행된다. 왜인지 자꾸 꺼드럭대는 대형마트 곰인형 ‘코코 씨’와 인형 옷을 입고 인형인 척 알바를 하는 ‘밀리’라는 아이가 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캐릭터 산업, 아이돌 인형, 가챠 등 인형으로 찾아낼 수 있는 주제와 소재들을 엮고 또 엮는 중이다. 창작물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일상물만큼이나 나의 배경을 담기도 했다.
Q 마지막으로 공통 질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팟캐스트나 라디오 듣는 걸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그래서 난 언제나 말하는 사람, 말하는 일이 멋지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최근에 팟캐스트 ‘민음사 라디오’의 PD로 일을 시작하면서, 듣는 사람들이 참 귀하고 멋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진행자들과 진행자들의 대화를 경청하는 청취자들 덕분이다. 들어야 말을 걸 수 있다. 들어야 대화할 수 있다. 교류와 관계는 듣기, 귀 기울이기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듣는 일에 대해서 다시 배우는 것만 같다.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나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듣기’일 것이다. 그리고 읽는 일도 듣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수희_만화가
만화가. 《동생이 생기는 기분》으로 카카오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도서관에서 일기를 쓰거나 책을 뒤적거릴 때 안전한 행복을 느낀다. 《동생이 생기는 기분》 《사진의 기분》 《난 슬플 때 타코를 먹어》를 그리고 썼으며,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공저)에 참여했다. 슬플 때 타코를 먹고, 고수 화분을 키워서 나눠주는 걸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