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한 번은 경주에 가는 편인데, 그 이유는 모두 능 때문이다. 능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훨씬 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무덤이라면 어쩐지 무서운데 능이라고 말하면 평온하고 부드럽다. 말을 닮아 능은 둥글고 초록이어서, 또 제각각 따로지만 함께 모여 ‘능들’이어서 좋다.
매번 같은 능을 볼 때도 있지만, 예전에 미처 몰랐던 능을 새로 발견할 때도 있다. 이번에는 시내를 지나다가 아기코끼리처럼 작은 능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을 봤다. 하나. 둘. 셋. 나는 그 숫자를 헤아려봤다. 능이 셋이라면 세 사람은 확실히 이 세상에 살았던 셈이다. 신라의 전성기 때 경주에는 90만 명이나 살았다고 한다. 삶보다는 죽음이 훨씬 한적하다. 나는 사람이 드물 때의 경주를 좋아한다.
경주의 시립도서관이 경주의 도서관으로 보이는 건 기와를 올린 건물의 웅장한 외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쪽의 숲 덕분이기도 하다. 그 숲은 오래 전 화랑들이 수련하던 곳이라고도 하고, 신라시대 북쪽 땅의 약한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심은 나무들이 있던 자리라고도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 숲은 아름답고 신비롭고 깊다. 숲을 가진 것만으로도 경주시립도서관은 부잣집의 첫 아이 같다.
숲으로 들어가 나무들을 한참 바라봤다. 과연 신라시대의 나무들일까? 어쨌든 나보다는 아주 나이가 많아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지금쯤 모두 땅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숲을 따라 걸으니 어쩐지 나무들이 귀엽기도 하다. 그 나무들은 곧게 쭉 뻗지 않고 대개 뒤틀려 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앞줄의 친구와 친구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찍은 기념사진처럼 보인다.
칠월 경주의 햇살은 모든 색을 증발시킬 듯 강렬한데, 숲속에는 은은한 초록 기운이 감돈다. 매미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린다. 지난 밤 내린 폭우의 찬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 바닥에 깔린 맥문동 위로는 산들산들 바람이 지나간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제과점을 운영했고, 장사가 제법 되던 시기가 있었다. 작은 제과점들의 전성기랄까.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그때는 우리 말고도 작은 제과점들이 많았다. 그래서 친목 차원의 모임이 있었고, 여름이면 전세버스를 타고 가족들이 함께 휴가를 가기도 했다. 경주는 그런 휴가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여름의 끝에는 남는 것들이 있었다. 볕에 그을려 벗겨진 부위로 새로 자리잡은 하얀 살갗. 화장실에 걸린, ‘OO제과협회 하계휴가 기념’이라고 인쇄된 새 수건. 가족 앨범의 마지막 페이지에 새로 붙은 사진들. 그중에는 수영복을 입고 어깨에 큰 수건을 두른 엄마의 모습도 있었다.
가족 앨범을 한번 펼치게 되면 계속 다른 사진들도 보게 된다. 더 오래된 가족 앨범, 두꺼운 검정색 종이로 만든 옛 사진첩에는 훨씬 더 날씬하고 젊고 예쁜 엄마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아마도 십대 후반이거나 이십대 초반이었을 엄마가 봄꽃 아래에서 언니들과 함께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 엄마의 젊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엄마는 당신이 죽고 난 뒤의 나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 숲은, 질문만 있고 답은 없는 곳이어서 빈 곳이 많다. 도서관 옆의 숲은 경주를 닮았다. 거기 수십만 명이 살았대도 지금 남은 능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다른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나무와 나무 사이로.
능과 능 사이로.
아마도.
경주시립도서관의 아이들 그림 ⓒ 김연수
시립도서관의 일층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신기한 일이라며 제비와 뱀장어와 두꺼비를 그려놓고, 그 옆에 ‘세상에서 첫 번째 신기한 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일’이라며 자신을 그려놓은 그림. 또 엄마를 기다리는 ‘나’와, 그런 ‘나’에게 달려오는 엄마의 모습을 그린 그림. 그림 속 ‘나’와 엄마는 서로 눈이 닮아 있었다. 서로를 기대하는 눈. 지금은 없는 엄마를, 아직은 안 보이는 아이를 보는 각자의 눈. 그래서 웃는 눈.
이층 종합자료실은 신라시대의 숲만큼이나 넓다. 서가는 나무들처럼 적당히 떨어져 서 있다. 산책하듯 나는 서가와 서가 사이를 걸었다.
세상에서 첫 번째로 신기한 일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일.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길을 걸은 일. 사물이 두 개만 있어도 그 사이로는 길이 생겨난다. 그러니 지금까지 내가 걸은 길들은 모두 나무와 나무 사이라든가, 집과 집 사이,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이거나 능과 능 사이였다.
사이로 길이 난다.
그렇게 책장과 책장 사이를 걷다가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라는 책을 발견했다. 제목에 끌려 열람석에 앉아 펼쳐보니 21년 전에 나와 이제는 서점에서 사라진 책이었다(지금은 《우발과 패턴》이라는 새 제목으로 출간됐다). 제1차 세계대전을 예로 들며 ‘전쟁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책은 뜻밖에도 ‘지진과 산불의 규모를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가’로 이어졌다. 저자는 지진, 자본시장의 끔찍한 파탄, 혁명이나 파국적인 전쟁 등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산불의 원인과 규모 사이의 상관관계를 과학적으로 살펴본 뒤, 그는 이렇게 썼다.
”불이 나면 ‘불 자신도 처음에는 자기가 얼마나 커질지 모른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진, 주가 폭락, 전쟁 등 과거의 일에서 패턴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들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어떤 규모로 일어날지는 그 일 스스로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예측은 빗나간다. 미래는 늘 놀랍게 다가온다.
도서관의 한쪽 벽에는 전성기 경주의 모습을 그린 큰 그림이 붙어 있다. 바둑판처럼 보기 좋게 구획된 대도시다. 경주는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전성기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몽골이 침입했을 때 결정적으로 쇠락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큰 몰락이 있기 전까지 그보다 작은 규모의 몰락이 몇 배나 더 있었다. 이런 패턴은 규모를 줄여가면서 계속 반복된다고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말한다. 사라예보에서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이 피격된 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고 호사가들은 얘기하지만 그 죽음 이전의, 그보다 평범한 죽음은 훨씬 더 많았다. 평범해지면 평범해질수록 더 많고 더 잦다. 자잘한 지진들이 자주 일어나지만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2020년 대구에서 코로나19 환자들이 급증하던 그해 봄, 낯선 병원에서 엄마는 돌아가셨다. 밤을 넘기기 어렵겠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다음날 낮이었음에도 나는 무척 놀랐다. 그때 나는 바로 1분 뒤의 일을 알지 못했다. 이제 내가 아는 건 경주가 몰락하고 능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무덤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지금도 그때의 숲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도서관 옆에 그런 숲이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더 나이든 엄마의 얼굴을 이제 나는 볼 수 없다. 엄마의 마지막 얼굴은, 다행히도 편안했다.
그리고 나는 내 삶에 어떤 불이 일어났음을 안다. 그 작은 불로 나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 테지만, 그러자면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라져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김연수_소설가
경상북도의 작은 도시 김천에서 태어났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시를 좋아하게 됐다. 좋은 시를 읽고 날마다 뭔가를 썼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라 읽고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93년 시 〈강화에 대하여〉를 문학잡지에 발표하며 시인이 됐다. 이듬해에는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문학상을 받으며 소설가가 됐다. 이후로 줄곧 책 읽고 글 쓰는 삶을 살아왔다. 지금까지 《일곱 해의 마지막》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세계의 끝 여자친구》 《소설가의 일》 등 20여 권의 책을 펴냈고,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읽지 않은 책과 쓰지 않은 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
도서관에는 내가 읽지 않은 책이 있어서 좋다. 그것도 많이. 어떤 현안에 대해 아는 척하려다가도 그 책들을 떠올리면 절로 입이 다물어진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건 핑계일 수 있다. 점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른다. 매사에 젠체하며 살았던 일이 후회된다. 나의 경험과 지식은 손바닥만 한데 거기에 의지해 지금의 나와 이 세상을 판단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거의 공짜에 가깝다.지인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무해한 대화 나누기, 흥미로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와 자기 전에 조금씩 읽기, 낯선 이의 플레이리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며 눈에 띄는 나무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그날의 기분과 함께 간직하기, 오늘의 날씨를 살펴보기 위해 매일 아침 하늘을 올려다보기, 존경하
이렇게 따뜻한 11월이 있을까 싶을 정도더니 12월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계절은 순식간에 바뀌어 문득, 겨울이다.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마산에 갔다. 80여 년 전 시인 백석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걸을 요량이었다. 그렇게 부둣가 어시장까지 이르렀다. 겨울 해는 이내 저물고 어둑신한 골목으로 짠물이 흘러갔다.오래 전 백석이 쓴 시를 떠올리니 어떤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