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는 내가 읽지 않은 책이 있어서 좋다. 그것도 많이. 어떤 현안에 대해 아는 척하려다가도 그 책들을 떠올리면 절로 입이 다물어진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건 핑계일 수 있다. 점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른다. 매사에 젠체하며 살았던 일이 후회된다. 나의 경험과 지식은 손바닥만 한데 거기에 의지해 지금의 나와 이 세상을 판단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다.
읽지 않은 책들의 서가는 《블랙 스완》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됐다. 3만 권이 넘는 장서를 자랑하던 움베르토 에코의 서가를 방문한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와!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으셨나요?”라는 건 가장 흔한 반응이었다.
“읽지 않은 책들이기에 이렇게 꽂아둔 거죠”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읽지 않은 책들을 왜 꽂아두나요?”
왜냐하면 배우는 사람에게는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더 가치 있기 때문에. 하나를 아는 순간, 자신이 모르는 게 그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읽지 않은 책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서재의 역설이다. 집에 아무리 책이 많다한들 도서관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바다숲 작은도서관 입구 ⓒ김연수
2023년 새해 첫 날 새벽, 가까운 공원으로 나갔다. 첫 해가 떠오르는 풍경을 지켜보고 싶었다. 여전히 영하의 추운 날씨였다. 어둠이 걷히고 사방이 환해진 뒤에도 해는 건물에 가려져 좀체 보이지 않았다. 둘러보니 겨울나무들이 서 있었다. 잎을 다 떨군 채, 판화 속 나무들처럼 아침 하늘에 윤곽을 또렷하게 새기고 선 그 나무들을 쳐다봤다. 그때였다.
더 이상 탓하지 말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탓할 뭔가부터 찾는 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이다. 그게 정의라고 나는 생각했다. 남이든 나 자신이든 사람을 탓하거나 시스템과 조직을 탓한 적도 있었고 운명이나 신의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뭔가를 탓하게 되면 내가 그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낸 듯한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원인을 아니 내가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자만심도 생겼다. 그러나 내 쪽에서 원인을 찾는 일과 문제가 해결되는 일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인생의 문제는 종종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생겨났다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사라지곤 했다. 큰 문제일수록 더욱 그랬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알지 못하는 게 더 많다고 인정하며 살면 어떨까?
손바닥만 한 나의 경험과 지식에서 벗어나, 일이 어떻게 됐고 어떻게 될지 안다고 믿지 말고, 그게 남이든 나 자신이든 탓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며 살아간다면?
그러자 머리가 시원해졌다. 태양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숲 작은도서관 열람석 ⓒ김연수
바다가 보이는 도서관 중에서도 바다숲 작은도서관이 인상적인 이유는 바다 옆에 바짝 붙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바다에 비해 도서관이 너무 작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내가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어떤 도서관도 내게는 작지 않다. 게다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 열람석에 앉으면 내가 읽지 않은 책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더 많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눈앞에는 하늘과 바다와 파도와 등대와 오가는 배와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펼쳐져 있다.
부산시 기장읍에 있는 이 도서관은 2022년 6월에 문을 열었다. 해양수산특화 도서관으로 해조류연구센터의 4층에 있다. 당연히 어류도감, 수산과학서, 선박항해술 등 해양수산과 관련한 자료들이 반 정도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일반 서적인데 그 양은 많지 않지만 거개가 아직 누구도 읽지 않은 신간들이다.
낯선 책들이 꽂힌 해양수산 서가를 훑어보다가 책등에 ‘문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세 권이나 발견했다. 《아더 마인즈》에는 ‘문어, 바다, 그리고 의식의 기원’이라는, 《바다의 숲》에는 ‘나의 문어 선생님과 함께한 야생의 세계’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고, 《문어의 영혼》이라는 책도 있었다.
세 권 모두 문어가 속한 두족류의 지능이 꽤 높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두족류가 ‘머리 두(頭)’와 ‘다리 족(足)’의 결합으로 머리에 바로 다리가 붙은 동물을 뜻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두족’의 삶은 무엇일까? 앎이 행동으로 바로 이어지는 삶을 뜻하는 것일까?
《바다의 숲》은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인 〈나의 문어 선생님〉에 나오는 영화감독 크레이그 포스터의 사진과 바다를 향한 그의 열정에 사로잡힌 작가 로스 프릴링크의 글을 엮어 만든 책이다. 어린 시절 가정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상실감을 치유하는 과정을 담은 로스 프릴링크의 글이 본문이라면, 케이프타운 인근의 바다 속 동물들의 삶을 관찰하며 점점 더 깊은 사유 속으로 빠져드는 크레이그 포스터의 사진은 화보가 된다.
처음에는 서로 겉도는 듯한 글과 화보는 어느 순간, 같은 지점을 향한다. 그것은 삶으로 돌아가는 일, 대자연이라는 생명과 다시 연결되는 일이다. 이 일을 크레이그 포스터는 이렇게 설명한다.
해파리가 물고기를 사냥하는 장면을 지켜보던 그에게 의문이 생긴다.
‘이것은 중앙 집중화된 뇌가 없는 동물치고는 고도로 발달한 행동이다. 그렇다면 중앙 집중화된 뇌는 고도로 발달한 행동의 전제 조건이 아니란 말인가?’
스스로 찾은 그의 해답은 이런 것이다. 어쩌면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뇌 혹은 신경망은 실제로는 몸 밖에 존재하는 더 큰 마음이나 의식과 연결되기 위한 조율 메커니즘일 수 있다고.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자신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기에 이런 추측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두족’의 삶을 ‘지행합일’로 설명하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의 관점일 수 있겠다. 자기 뇌 안에 갇힌 인간이 아닌 동물들에게 삶이란 아는 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대로 아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살아가면서 무엇을 아는가? 아마도 ‘나’라는 개별적인 존재 바깥에 더 큰 마음이나 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바다숲 작은도서관 서가 ⓒ김연수
로스 프릴링크의 글은 크레이그 포스터에게 스킨다이빙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잃어버린 아버지와 다시 연결되고자 애쓰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추위와 호흡 곤란 등의 고통을 수없이 겪은 뒤 그 역시 크레이그 포스터와 마찬가지로 대자연과 연결되는 환희를 맛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오랜 트라우마에서 벗어난다. 그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를 찾아가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명하게 말한 뒤, 그와 영영 작별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이야기다. 상처, 방황, 그리고 되갚기. 우리가 모르는 건 그 다음의 이야기다. 로스 프릴링크는 조산아로 태어난 아들 조지프를 초등학교까지 태워주던 아침에 대해 말한다. 돌아오다가 그는 바다에서 고래의 꼬리를 봤고, 차를 세운다.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그는 말을 거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고래와 눈이 마주친다. 거기 그가 있었다. 평생 찾아 헤매던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 조지프가 있으니 아버지는 그 자신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있었으니 잃어버린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자연에게 받은 선물 같은 깨달음이었다.
바다숲 작은도서관에 다녀온 건 2022년의 마지막 나날이었다. 그 도서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2022년의 마지막 책으로 《바다의 숲》을 읽을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몰랐기 때문에 받는 선물이 너무나 많다.
김연수_소설가
경상북도의 작은 도시 김천에서 태어났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시를 좋아하게 됐다. 좋은 시를 읽고 날마다 뭔가를 썼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라 읽고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93년 시 〈강화에 대하여〉를 문학잡지에 발표하며 시인이 됐다. 이듬해에는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문학상을 받으며 소설가가 됐다. 이후로 줄곧 책 읽고 글 쓰는 삶을 살아왔다. 지금까지 《일곱 해의 마지막》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세계의 끝 여자친구》 《소설가의 일》 등 20여 권의 책을 펴냈고,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읽지 않은 책과 쓰지 않은 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
일년에 한 번은 경주에 가는 편인데, 그 이유는 모두 능 때문이다. 능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훨씬 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무덤이라면 어쩐지 무서운데 능이라고 말하면 평온하고 부드럽다. 말을 닮아 능은 둥글고 초록이어서, 또 제각각 따로지만 함께 모여 ‘능들’이어서 좋다.매번 같은 능을 볼 때도 있지만, 예전에 미처 몰랐던 능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거의 공짜에 가깝다.지인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무해한 대화 나누기, 흥미로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와 자기 전에 조금씩 읽기, 낯선 이의 플레이리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며 눈에 띄는 나무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그날의 기분과 함께 간직하기, 오늘의 날씨를 살펴보기 위해 매일 아침 하늘을 올려다보기, 존경하
이렇게 따뜻한 11월이 있을까 싶을 정도더니 12월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계절은 순식간에 바뀌어 문득, 겨울이다.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마산에 갔다. 80여 년 전 시인 백석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걸을 요량이었다. 그렇게 부둣가 어시장까지 이르렀다. 겨울 해는 이내 저물고 어둑신한 골목으로 짠물이 흘러갔다.오래 전 백석이 쓴 시를 떠올리니 어떤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