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에 아주 작은 공원이 있다. 골목의 서른 개쯤 되는 계단을 올라가 딸랑 그네 네 개가 있을 뿐인 놀이터로 접어들면, 근처 어느 집의 열린 대문 안이나 화단 덤불에서 서성이던 ‘귀(貴)’가 카트 바퀴 구르는 소리를 듣고 울면서 쫓아와 맞아준다. 하소연하는 듯도 하고 따지는 듯도 한 울음소리다. 귀의 정식 이름은 귀부인. 3년 전엔가, 공원 이웃에 사는 마샤 엄마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이가 귀를 설명하며 ‘뚱뚱하고 못생긴 고양이’라고 하기에 “못 생기기는요! 귀부인처럼 생겼구만”이라고 대꾸한 뒤 ‘귀부인’이라 부르고 있다. ‘버터플라이’던가, 아, 생각이 안 나네. ‘빠삐용’? 나비처럼 팔랑이는 커다란 귀를 가진 품종의 강아지와 공원을 산책하며 종종 고양이들한테 간식을 주는 아가씨랑 나랑 둘만 부르는 이름이다. 그 아가씨가 “시간이 안 맞나, 요즘 귀부인 통 못 봤어요”라고 처음으로 ‘귀부인’이라 칭했을 때는 연대의 정이 깊어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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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가는 놀이터 옆을 통과해 공터를 열댓 걸음 걸으면 정자가 있는데, 그 한 귀퉁이가 고양이 밥터다. 언제부턴가 거기서 가장 기세 있는 고양이는 냥냥이 딸이다. 제 엄마처럼 검정하양 얼룩 고양이인데, 엄마와 구별되는 건 하얀 꼬리 끝이다. 아, 그리고 자세히 보면 얘는 얼굴이 예쁘다. 냥냥이는 솔직히 말해서 인물이 좀 빠진다. 그런데, 마샤 엄마는 냥냥이가 너무너무 예쁘다고 한다. 이렇게 보는 눈이 다르다. “냥냥” 예쁘게 운다고 냥냥이라 이름 지어준 사람도 그이인데, 닭을 삶아뒀다가 자기 집 테라스에 찾아가는 냥냥이한테 먹이곤 했다.
제 엄마도 사람은 잘 따르면서 고양이들한테는 앙칼지기 짝이 없어 터주인 귀를 사납게 몰기 일쑤였는데, 딸한테 터를 물려준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쫓겨 간지도 모르겠다. 1년 가까이 안 보이다가 요즘 간간이 모습을 보이는데, 반기리라고 생각했던 그 딸은 인상을 구기며 공격할까 말까 망설이는 기색이었고 냥냥이는 걔 눈치를 보며 기가 죽어 있었다). 냥냥이 딸이 유일하게 순하게 대하는 고양이는 한 배 먼저 태어난 오빠 순돌이다. 얘는 고등어 줄무늬인데, 제 누이와 딴판으로 순해 터졌다. 아빠가 순했나 보다.
귀는 지난해 여름 일사병으로 쓰러졌었다. 그 이후 완연히 입이 짧아져서 먹을거리도 각별히 챙기고 있는데, 냥냥이 딸이 눈치 챘는지 먼저 챙겨준 밥을 먹다 말고 귀 밥그릇을 넘본다. 그래서 내가 귀 앞에 버티고 서서 다리로 방벽을 친 뒤 “싯!”(말하자면 ‘하악질’) 소리를 내가며 지킨다. 그럼에도 소심하기 짝이 없는 귀는 뒤숭숭해져서 툭하면 도망가곤 하는데 얼마나 속상한지 모른다. 제가 입을 대는 귀 밥그릇을 뺏어 들고 귀를 쫓아가는 나를 냥냥이 딸이 ‘왜?’ 의문과 설움이 비치는 눈빛으로 바라보면, 내 차별에 상심한 게 뻔해서 나도 좀 착잡하다.
그날은 평화로웠다. 마침 고양이들 최애 습식 ‘마구로 쥬레’가 배송된 날이어서 냥냥이 딸 밥그릇에도 듬뿍 얹어줬다. 귀도 모처럼 그릇에 코를 박고 먹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정자 아래 빙 둘러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밥을 먹는 고양이들. 그 옆에 쪼그려 앉아 냥냥이 딸이 딴눈 팔지 않게 ‘마구로 쥬레’ 하나를 더 따고 있을 때였다. 고양이 셋과 나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는데 숟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느닷없이 등 뒤에서 “으이~~샤!!” 고함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아니, 저 넓은 데를 놔두고 하필 우리 가까이 와서 저러고 있담. 마샤 엄마 ‘남친’이 마샤를 운동 시키려고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마샤는 갈색 반점이 있는 ‘보더콜리’다. 아홉 살인데 작년에 중성화 수술을 한 뒤 부쩍 살이 쪘다. 마샤 목걸이에 걸렸던 줄을 풀어 둘이 줄다리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줄의 한 끝은 사람이 쥐고 한 끝은 마샤가 물고 있었다. “으이~~샤!!” 소리 질렀던 처음에는 줄을 위로 당기고 있었고, 몇 차례 상하 줄다리기를 하다가 수평 줄다리기에 돌입했다. 마샤 입이 상하지 않게 마샤 엄마 남친이 힘을 조절하고 있겠지만, 양쪽에서 당기는 힘이 팽팽했다. 남자는 연신 “으랏챠!” “영차!!” “으잇쌰!!” 소리를 질렀다. 마샤는 어렸을 때 고양이 앞에서 얼쩡거리다 따귀를 맞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들을 좀 무서워하는 편이라서 그걸 아는 고양이들이 마샤한테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람의 소란이 여간 아니었다.
우리를 아직 못 봤나? 예민한 귀가 안절부절 못 하기 시작해서 나는 짜증이 바짝 났다. 언제까지 저럴 거야? 와중에 남자가 “마샤! ‘오빠 사랑해!’ 해 봐! ‘오빠, 사랑해!’” 하는 소리가 들려 살짝 뒤돌아봤다. 마샤의 ‘오빠, 사랑해’가 어떤 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마샤가 뒷다리로 서서 남자를 껴안았다. 저건가? 아무튼 참다못해 나도 모르게 혀를 차며 “아이 참!”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는 황황히 마샤를 데리고 공원을 떠났다. 미안하긴 했다. 쩝, 먀샤 엄마한테 고해바쳤겠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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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얘기는 언제 나오는 거야? 미시마 유키오가 기도 안 차겠다. 그러게요······.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의 파이널 경기를 본 사람은 평생 그 영상을 잊지 못할 것이다. 경기 내내 숨을 멈추고 눈을 떼지 못하다가 끝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 듯 참은 숨이 터지며 환호했었다. 비정할 정도로 섬세한, 완벽한 아름다움. 미시마 유키오의 〈오후의 예항〉은 그런 소설이다. 첫 구절 ‘“잘 자” 하고 어머니는 밖에서 문을 잠갔다’에서부터 끝 구절 ‘누구나 알겠지만, 영광의 맛은 쓰다’까지 어딘지 나른하면서도 숨 막힐 것 같은 긴장으로 독자를 몰아간다.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탐미주의자라지만, 미시마 유키오야말로 진정 탐미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흉부를 비수로 긋는 듯한 구조와 문장의 이 정밀함이라니! 천재란 이런 작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오후의 예항〉, 참으로 목가적인 제목으로 천연덕스럽게 참으로 잔혹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얀 볼에 보조개가 깊이 패고 손이 작은 소년, 부잣집 아들에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귀공자가 역시 비슷한 조건인 소년들의 대장이다. ‘고양이 사냥에 한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그들은 연약한 소리로 우는 길고양이를 찾아왔다. 얼룩덜룩한 털에 칙칙한 눈을 가진, 손바닥에 오를 정도로 작은 새끼고양이다’에서 급기야 ‘“우리 중 다음달에 14세가 되는 건 나와 1호와 3호지. 남은 셋도 3월이면 14세가 돼. 생각 좀 해봐. 우리 모두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로 진행되는, 말하자면 ‘촉법 소년’ 스토리가 소설의 중요한 한 축인데 미시마 유키오는 동물에 대한 폭력은 인간에 대한 폭력의 전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나 보다. ‘사이코패스는 사람을 해치기 전에 반드시 동물을 해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시대일 텐데, 역시 미시마 유키오는 예리하다.
‘지금 막 소형 화물선이 검은 연기를 가로로 길게 뿜으며 수평선 위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자신은 저 배에 타고 있을 수도 있었는데, 하고 류지는 생각했다.’
‘이렇게 소년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그는 점차 노부로 머릿속의 자신의 이미지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영원히 멀리 떠나는 자가 될 수도 있었다.” 아주 지긋지긋해하고 있었지만, 그 포기한 것의 크기가 새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저 바다의 파도가 품은 어두운 정념, 저 먼 바다에서 다가오는 해일의 비명, 높아지고 높아지다 부서지는 파도의 좌절, ······ 어두운 바다 밑에서 항상 그를 부르던 미지의 영광은 죽음과 섞이고 또 여자와 뒤섞여, 그의 운명을 따로 준비해놓았을 터였다.’
짧은 글에서 자꾸 딴 작품 얘기를 하는 게 민망하지만, 이 목가적인 잔혹극, 잔혹한 목가를 읽으면서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주제곡이 들리는 듯했다. 쏟아지는 햇빛 아래 파란 바다를 유유히 떠다니는 하얀 요트, 저 아래 스크루에 시체를 끼운 채. 가혹하게도 상황은 〈태양은 가득히〉와 정반대인데······.
황인숙_시인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있다. 최근 시집 《내 삶의 예쁜 종아리》를 펴냈다.
현대문학상(2017), 김수영문학상(2004), 동서문학상(1999)을 수상했다.
1. 두어 해 전 일이다. 마을버스 정류장 옆 전신주에 고양이 주인을 찾는 게시물이 붙어 있었다. 스코티시폴드(Scottish Fold)를 보호하고 있다며 연락처를 남겨놓았다. 노르스름한 빛깔의 귀 접힌 고양이가 찍힌 흐릿한 사진과 함께. 그 고양이가 곧 제 집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그즈음 우리 집 아래 골목의 고양이 밥 놓는 데 못 보던
1.우리 보꼬는 책을 좋아했다. 내가 방바닥에 엎어놓거나 펼쳐놓은 책들. 마치 끌어안고 있다가 잠결에 놓친 것처럼 앞다리를 책 표지에 나른히 늘어뜨리고, 머리통을 책등에 얹고. 펼쳐진 책에서는 그 위에 제 몸을 최대 면적으로 펼쳐 엎드려 새근새근 잤다. 나는 건성으로 “미안!” 하며 보꼬가 깔고 있는 책을 서슴없이 빼내곤 했다. 다른 책을 읽어도 됐으련만.
내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만난 것은 음악으로였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에서 접한 조르바의 춤이란 곡은 독특한 음색의 악기와 심장이 뛰는 듯한 리듬으로 나를 매혹시켰다. 자연히 그 영화가 궁금해졌고, 이어서 원작 소설도 읽고 싶어졌다. 이렇게 차례로 음악에서 영화로, 마침내 소설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났다. 영화의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