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의 끝이라고 하지만 신학기가 시작되는 봄을 기다리기엔 아이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늘 새로웠고 불편했고 설레기도 했던, 복잡한 심경의 3월이었다. 새로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학교도서관에서의 3월 풍경은 아직도 삭막한 겨울의 한중간쯤에 와 있는 것 같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선생님도 아이만큼 자란다고 하지만, 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김소영의 책 《어떤 어른》을 읽고 나는 어떤 어른인지 생각해보았다.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저자의 시선이 나에게 머물기보다는, 어떤 어른으로 아이들에게 가닿아야 할지 고민이 많아진다. 어린이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어른이 옳다고 증명해주는 따뜻한 세상, 그런 세상을 그려가는 어른이 필요하다. 다양하고 폭넓은 사고를 하는 어른이 어린이의 세계를 밝게 하고, 새롭게 배우는 길을 열어간다.
“나에게 없는 것을 어린이에게 줄 수 없으니, 나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어린이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어떤 어른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린이책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관계를 확장해가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나와 어린이와의 관계를 어린이책에서 발견한 치유의 시간을 되짚어본다.
Ⓒ그나라어린이도서관
‘어린이책’에서 발견한, 광활한 우주를 여행하는 법
따뜻한 봄기운이 완연한 4월에 4학년 민권, 근우, 민재, 소현이는 쉬는 시간마다 학교도서관에 왔다. 조용한 공간에서 떠들고 싶기 때문이다. 구석진 빈백에 누워 떠드는 그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주의를 환기해보지만 다음 날에도 그들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너희들 다음에 오면 담임선생님에게 얘기할 거야.” 단단히 일렀지만 녀석들은 금방 잊어버렸다. 하루의 짜증이 치밀어 오를 때, 기분도 상하고 급식 맛도 없고 음식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기운이 빠진다. 좋은 어른으로 아이들에게 가닿는다는 것이 어렵다. 훈계해도 반성해도 그때뿐이니 마음이 힘들었다.
그림책 《멋진 미래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리사 스월링, 랄프 라자르 공저)를 읽으면서 책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얼마나 많은 호기심이 생길지, 흥미를 느낄지 궁금해졌다. 다시 시작하는 의미로 되새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도서관에 올 때마다 그 그림책을 볼 수 있도록 전시해놓았다. 아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은 배려가 책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녹음이 짙은 5월에는 6학년 책모임을 진행했다. 수다를 많이 떠는 여학생들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남학생의 경우 몇몇이 수동적으로 발표에 임해 소원할 때가 있다.
“황보나의 《네임 스티커》를 읽으면서 아주 좋았던 구절이나 궁금했던 것을 적고 이유를 얘기해보자.”
“선생님, 궁금한 것은 있지만 ‘왜’라는 이유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궁금해요.”
이유를 넣어 표현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아이들이 많았다.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넣지 못하는 학생도 있었고, 그냥 그 구절이 좋았다고 단순하게 표현하는 학생도 있었다. 함께 나누는 책모임에서 시간이 끊어질 때 난감했다. 글쓰기와 대화에서 말의 표현들에 세대 간 차이도 있고 거리감이 느껴질 때도 많았다. 그런 차이, 괴리감이 쌓이면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기는 불가능하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아이와의 거리를 좁혀가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허풍을 떨며 스쳐가는 어른이 되고 말 것이다.
학교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은 저학년이 많다.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다.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왜’라는 질문이 귀찮아질 정도다. 그중에 2학년 정원, 준원, 은우, 상우는 졸졸 따라다니며 많은 질문을 한다.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앞으로 내가 없을 때 너희들이 도서관에서 떠드는 아이에게 주의를 주고 궁금한 것을 친구들에게 얘기할 수 있겠니?”
아이들은 바로 대답할 정도로 좋아했다.
“너희들을 도서관 어벤저스 지킴이로 임명한다.”
더 좋아한다. 아이들은 작은 배려에 신이 날 정도로 자랑하고 서로 힘껏 돕는다. 한두 달 정도 지나면 시들해지는 것이 단점이지만, 책임감과 학교도서관에 대한 착한 관심에 칭찬을 보냈다. 이처럼 학교도서관에서 아이들의 착한 공기는 우리를 자라게 하고 성장하게 만든다.
네 명의 아이와 함께 슬라비아 미키의 그림책 《페기, 불가능은 없어!》를 읽었다. “어려운 일은 있어도 불가능한 일은 없어. 그저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야”라고 리사네 엄마가 기니피그에게 다정하게 한 말이 좋았다. 기니피그를 응원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아이들의 삶과 책, 도서관, 그사이를 학교도서관 사서가 이어준다. 간격이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아이들은 책 읽는 공간으로 스며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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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을 매개로 나누는 어린이들과의 감정적 교류
2024년 10월 10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사서 선생님, 노벨문학상 받은 한강 책 있나요?”라는 질문이 많았던 날이다. 다행히도 우리 학교도서관에 한강 작가의 책이 몇 권 있었다. 어린이가 읽기에는 어려웠다. 그나마 《소년이 온다》는 읽을 수 있겠지만 어른 책인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흰》 《검은 사슴》 등은 어른들도 읽기가 난해하다. 4학년 민진이는 “어머니가 읽고 싶다고 하세요.” 5학년 경재는 “《채식주의자》를 꼭 읽고 싶어요. 민진이와 경재에게 말했다. “어린이가 읽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 있어.” “많은 책을 읽은 뒤 커서 보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다행히도 한강 작가가 1983년 열두 살의 여름에 마치 운명의 실에 엮인 듯 읽었고 “나의 내면에서 80년 광주와 연결된 책”이라고 했던 아스트리트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경재에게 이 동화책을 추천했다. 형 요나탄이 동생 스코르판에게 한 말이 인상적으로 남는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
학교도서관에 오는 아이들 중 윤과 한겸, 보경, 나경은 6학년이다. 아침에 매일 방문한다. 수학 문제를 풀거나 독서기록장에 오늘 읽은 책을 기록한다. 윤과 한겸은 동생을 잘 챙기고 보경과 나경은 그 반대다. 책의 주제도 로맨스와 SF로 다르다. 읽는 취향이 다르다 보니 추천할 때 어려움이 많다. 어린이 독자는 한마디로 까탈스럽고 개성이 강하다.
김다노의 《최악의 최애》에서는 처음 느끼는 낯선 사랑의 감정들로 혼란을 겪는 열세 살 소년 소녀의 이야기로, 사랑이라는 낯선 감정을 나답게 극복하고 찾아가는 마음은 나이만큼 ‘성장’한다는 내용이다. 어린이들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낯선 것은 당연하다. 짧게 지나가는 것이라도 그 시간이 소중하다. 학교도서관은 그런 다양한 감정을 만나는 공간이다 보니 사서는 복잡한 감정을 잘 붙잡아놓아야 한다.
‘아이는 어른이 없는 사이에 자란다’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 하고 싶고 간직하고 싶은 아이들의 작은 소망이 가슴속에 자라고 있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어른이 없는 사이에 어린이는 자라고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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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닿을 수 있는 마음과 마음
나는 종종 책을 많이 읽는 어린이에게 책을 선물하는 것을 좋아한다. 5학년 나윤이는 방과 후 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열심히 한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다. 청구기호, 분류기호도 잘 알고 찾을 수 있어 웬만한 사서보다 책 정리가 탁월하다. 나윤이에게 김민서의 《율의 시선》을 선물했다. 이 책은 고립된 청소년기의 혼란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내용이다.
5학년 나윤이 시선을 통해 나는 보았다. 그 아이에게는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사서는 시선에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책을 빌려가는 아이들 중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럽지 않고 차가운 경우가 있다. 하지만 차가운 시선은 어린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시선이 부드러울 때와 다르게 어린이가 걱정하는 것은 진심 어린 눈빛이다.
사서는 그런 눈빛을 함께 알고 받아주어야 한다. 마음이 통하는 지점에서 아이의 세계에 닿을 수 있다. 거기서 착한 마음이 보인다. 착한 마음이 책과 연결되고 감정의 작은 영혼들이 나를 어린이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인도한다.
좋은 독자는 어떤 독자일까. 함께 공감하고 고민을 나누는 독자다. 어린이책은 그들의 세계에 닿을 삶을 가치 있게 읽고 들여다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일 년 일 년 아이들은 기대 이상으로 빨리 자라고 읽는 범위도 넓어진다. 나 또한 좋은 어른으로 가고 있을까? 질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읽은 책만큼 바라보는 관점을 살피고 또 다른 기대와 설렘으로 채워지는 시간을 즐겨보면 좋을 것 같다.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그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진지한 모습들이 보인다. 친구처럼 대할 때 아이들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대출할 때, 마주쳤을 때, 눈짓과 몸짓, 발짓에서 오가는 감정의 순환들이 학교도서관에 스며든다. 학년이 바뀌면서 감정이 복잡할 때, 나의 경험과 오감을 최대한 불어넣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이들은 언어와 글, 행동, 생각들이 점점 더 넓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교도서관에서 책 추천만큼 사서와 어린이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없다. 어린이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 사서인 나도 마음의 치유를 얻고 보람되게 온기를 채울 수 있다. 참 고마운 일이다.
강상도_도서관 사서
경상남도 김해시 경운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읽고 떠들며 재미난 일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함께 성장하고 싶어 아직도 무한한 공간에서 새로움을 꿈꾸고 있다. 도서관은 가슴 벅찬 멋진 일이기에 ‘나’를 위한 책 여행을 위해 오늘도 그 길 위에 서 있다.
경남일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면서 책 공간의 아름다움과 이야기들을 엮어 꾸준히 글을 써왔다. 쓴 책으로 《책과 사람, 삶이 머문 공간》 《삶과 맞닿아 있는 도서관의 힘》 《사서가 떠나는 책 여행》이 있다.
Book 메신저는 책과 언어 그리고 독서를 매개로 다양한 실험과 변화를 모색하는 분들을 만나는 인터뷰 코너이다.7월호에서는 경운초 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글 쓰는 사서’ 강상도 선생님을 만났다.책을 둘러싼 다양한 시선과 해석을 통해 책과 독서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Q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A 안녕하세요. 경운초등학교 도
어린이를 평생독서가, 평생학습자로 자라날 수 있는 소양을 길러주는 학교도서관,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맞춰 읽기 방식의 다양화를 도와야 한다. 자신의 색깔로 책을 만나는 학교도서관학교도서관에서 근무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 10년 동안 학부모와 지역주민, 교직원, 아이들과 책 그리고 도서관이라는 공통의 매개체로 인연이 되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 · 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신구도서관재단 이창경 이사가 노작홍사용문학관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5월호(첫 회)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동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