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분쟁에 미국까지 가세하며 그로 인한 희생과 피해는 해당 지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됐다. 인간은 입으로는 평화와 공존을 외치면서 손에는 무기를 들고 서로를 향해 겨눈다. 그 모순된 풍경에서도 봄은 여전히 색색의 꽃을 피우고 산천을 초록으로 물들이며 여름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 꽃을 바라보는 우리의 감정이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꽃노래를 흥얼거리며 계절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기에는 세상 도처에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시대의 불안과 고통을 견딜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음악이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 물론 음악이 당장 전쟁을 멈추게 하거나 상처를 아물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음악은 듣는 이의 마음에 들어가 그가 더 무너지지 않도록 잡아줄 수는 있다고 본다.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을 음악은 그 고유한 울림으로 버티고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음악은 우리를 슬픔의 바닥까지 데려갔다가 눈물을 쏟게 만들고 영혼을 정화하기도 한다.
20세기 폴란드 작곡가 헨리크 구레츠키(Henryk Mikołaj Górecki, 1933~2010)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가 바로 그런 음악이다. 1976년에 작곡된 이 작품은 인간의 야만과 폭력으로 희생된 영혼을 위한 긴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폴란드인들을 추모하려는 남서독일 방송교향악단의 의뢰로 만들어진 곡으로 알려졌지만, 작곡가는 이 작품에서 특정 사건을 묘사하지 않고 여러 비극적 사건에서 사라져간 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거대한 서사를 펼치는 대신, 인간 개개인이 겪은 슬픔에 주목한다.
이 교향곡은 소프라노 독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악장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악장마다 서로 다른 폴란드어 텍스트를 가사로 채택하고 있다. 이 세 악장은 ‘상실’이라는 하나의 감정을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관점(1악장, 3악장), 어머니와 떨어져 차가운 감옥에 수감된 자식의 관점(2악장)에서 비춘다. 구레츠키는 전쟁, 학살의 비극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슬픔으로 치환했다.
1악장은 15세기 폴란드 오폴레 지방에서 불리던 익명의 성모 애가(哀歌)를 바탕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 예수를 마주한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을 노래한다. 저음 현악기의 반복 위에 선율이 서서히 상승하며 쌓여가는 구조는, 마치 깊은 내면에서부터 차오르는 비탄을 형상화한 듯하다. 음악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고, 긴 호흡 속에서 시간은 비일상적으로 늘어진다.
2악장은 이 작품의 정서적 중심이자, 구레츠키 음악 세계의 핵심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텍스트는 폴란드 남부 자코파네의 게슈타포 감방 벽에서 발견된 18세 소녀 헬레나 브와주시아쿠브나(Helena Błażusiakówna)의 ‘오, 어머니, 울지 마세요’로 시작하는 짧은 기도문. 조국을 위해 나치에 저항한 가톨릭 신자의 이 기도문은 단순한 선율 위에서 반복되며 점점 더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헨리크 구레츠키의 기도문 발견 당시 회고는 특히 인상적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이 비문에는 ‘오, 어머니 울지 마세요. 하늘의 정결한 여왕께서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실 거예요. 아베 마리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보통 억울한 죽음 앞에서는 거창한 말로 복수해 달라고 하기 마련인데, 이 소녀의 문장은 완전히 달랐죠. 그 감옥 벽 가득히 쓰인 말은 ‘나는 무죄다’, ‘살인자들’, ‘형집행자들’, ‘나를 구해줘’ 이런 것들이었죠. 온통 아우성으로 느껴지는 그렇고 그런 말들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글을 쓰고 있었지만, 이 어린아이 같은 18세 소녀는 완전히 다른 말을 썼습니다. 절망하지도, 울지도, 복수를 위해 비명을 지르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직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이 문장은 특별했고, 저는 매료됐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자신이 아닌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그 숭고함이야말로 이 음악의 출발점이었다. 음악적으로 이 악장은 거의 정지된 시간 위에 놓여 있다. 화성은 단순하고, 변화는 미미하며, 소프라노 선율은 길게 호흡하며 떠다닌다. 오케스트라는 최소한의 음향으로 그 목소리를 감싸안는다. 우리는 이 느리고 반복되는 시간(음악) 안에 머무르면서 폴란드 소녀의 기도와 함께 슬픔을 견디는 법을 익힌다.
3악장은 폴란드 남서부 실레지아의 민요를 바탕으로,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는 어머니의 노래를 들려준다. 1악장이 성스러운 차원의 슬픔이라면, 3악장은 보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슬픔에 가깝다.
세 악장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여 있지만, 결국 하나의 감정 ‘상실—잃어버린 존재를 향한 끝없는 부름’으로 연결된다. 이 작품은 단순과 반복을 특징으로 하는 일종의 미니멀리즘 음악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단순한 반복을 넘어 서정성과 종교적 울림을 전한다는 면에서 특별하다. 이는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 1935~ )의 작품에서 받는 성스럽고 명상적인 것과도 통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 특히 슬픔이라는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인지 감상자는 곡에 더 공명(共鳴)하게 된다.
구레츠키 교향곡 3번 음반 표지
1990년대 초, 데이비드 진먼(David Zinman, 지휘)과 던 업쇼(Dawn Upshaw, 소프라노), 런던 신포니에타(London Sinfonietta)가 녹음한 음반이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며 이 작품은 하나의 신드롬을 일으켰다. 빌보드 클래식 차트 30주 이상 1위, 1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던 것이다. 그 신드롬은 단순히 음반의 흥행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보스니아 전쟁으로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인의 정신은 피폐해져 있었다. 시대를 관통하는 감정,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집단적 슬픔을 이 음악이 온전히 받아 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곡을 듣는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 슬픔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느낀다. 내 안의 감정이 서서히 타인을 향해 열리고, 고통은 연민으로, 고립은 연결로 변해 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혼자가 아니며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가정의 달’로 통칭되는 5월. 부부, 어린이, 부모, 스승을 향한 사랑과 존경, 감사가 넘치는 5월이지만, 지금 이 순간 지구촌 어디에선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족을 잃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아무 일 없이 지나치는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된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이 음악을 다시 듣는다. 슬픔과 고통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깊이 끝까지 느끼고, 다시 누군가를 향해 내 마음을 내어주기를 바라면서.
구레츠키의 〈슬픔의 노래〉는 우리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나지막하나 강하게 우리를 붙들어 주는 음악이다.
[음악 감상]
구레츠키 H. Górecki /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Op.36 중 2악장 렌토, 라르고-매우 고요하게 Lento e Largo-Tranquillissimo
던 업쇼(Dawn Upshaw, 소프라노), 데이비드 진먼(David Zinman, 지휘), 런던 신포니에타(London Sinfonietta)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고 느끼는 순간, 봄은 이미 한창 무르익은 것이다. 매화, 산수유, 벚꽃, 철쭉…… 봄꽃놀이 인파로 지방도로가 출렁일 때마다 나도 뒤처질세라 들썩거려 보지만, 나의 바쁜 일상은 늘 SNS에 올라온 꽃 사진만 들여다보다 꽃이 다 졌다는 소식으로 마감하곤 한다.나를 간질이듯 속삭이는 봄 햇살, 살랑이는 봄
윈터링(Wintering). 책의 영어 원제는 이렇다. ‘겨우살이’라든가 ‘겨울나기’ 쯤으로 번역하면 그만일 테지만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겨울이라는 계절의 함의를 다시금 생각해보라는 뜻인 듯하다. 우리는 지금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 서서히 추위에서 벗어날 채비를 하려 한다. 이번 겨울은 어땠는가. 견딜 만했는가? 아니면
어떤 책은 읽고 있으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남과 비교해서 낫다는 말이 아니라, 그 책을 읽지 않았을 때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잊고 지냈던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다든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나는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인가 생각해본다든가, 지구를 보전하기 위해 지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