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24자밖에 되지 않는 단출한 시 <풀꽃 1>이 시민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광화문 글판’ 시로 선정되었는데, 선생님의 시가 시민들을 위로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A 본래 우리 인간은 이기주의자예요. 그리고 개인주의자고요. 이걸 나쁘다고 말하면 안 돼요. 우리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사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거예요. 자기 배부르기 위해서, 자기 좋아지기 위해서.
근데 자기가 좋아지려면 ‘너’가 좋아져야 ‘나’도 좋아지는 게 아닐까요. 나 홀로 좋아지는 건 없어요. 독야청청(獨也靑靑)은 그야말로 성삼문 선생 시절에나 있었던 거지요. 지금은 ‘함께청청’이라고 생각해요. 함께 병들고, 함께 푸르고, 함께 좋아지고, 함께 건강해지고, 또 함께 불안해지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는 ‘너의 입장에서 내가 보겠다’ 하고서 그 시를 쓴 것이지요. 시각도 그렇고, 내용 자체도 나와 너와의 대립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와의 조화, 화합, 소통, 그런 것들이 밑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가 독자들한테 좋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괴테라고 하는 독일 시인이 말했어요. “좋은 시란 어린이에게는 노래가 되고 청년에게는 철학이 되고 노인에게는 인생이 되는 시다.” 나는 한 편이라도 그런 시를 쓰고 싶었어요. 그 시가 <풀꽃 1>이라고 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Q 선생님께서는 한국 사회의 여러 중요한 곳, 그중에서도 특히 교육 현장에서 오래 일하셨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느끼시는 한국 사회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긍정적인 점도 많지만 한국 사회는 현재 약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500만 명, 10년 전부터 자살률 1위, 네 명 중 한 명만 아기를 낳으려고 하는, 심각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A 우리가 너무 빨리 잘살아서 이런 거예요. 겉으로만 빨리 잘살아서요. 내면을 채우지 않고 겉으로만 자란 거예요. 그래서 속이 비어 있는 거예요. 제가 사회학자나 교육학자가 아니므로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렇게 힘든 건 제가 볼 때는요,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가치관의 다양화가 안 돼 있어서 그렇다, 그렇게 생각해요. 가치관의 일원화인 거죠. 한 통으로 가는 거예요. 막 쏠리는 거예요. 하지만 가치관이 다양해진다면 ‘너는 그 길로 가. 나는 이 길로 갈 거야’가 되겠죠.
더 얘기한다면 아이덴티티 문제이기도 해요. 자존감, 자의식, 자기 존재감, 아이덴티티. 이게 없는 거예요. 자기에 대한 확실한 자기 인식이 없으면 ‘남이 가니까 나도 간다’가 돼요. ‘남이 의대에 가니까 나도 간다’ 하는 식으로요. 그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남들이 저렇게 가도 나는 내 길을 간다’가 되어야 해요.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함께 그냥 한 통으로 가는 가치관의 일원화, 이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소외가 생기는 거고 경쟁이 심해지는 것이고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아닌가 해요. 가치관의 일원화 때문에 속도가 빨라지는 거예요. 아니, 나는 내 속도대로 가면 되는 거예요. 가다가 힘들면 좀 천천히 가고, 더 힘들면 쉬고, 또 빨리도 가고. 이래야 되는데, ‘남이 빨리 가니까, 남이 뛰니까 나도 뛴다’ 이러다 보니까 자기 인생도 매몰되고 지치고 힘들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어렵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우선 가치관의 일원화를 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Q 빠른 속도를 요구하는 세상 속에서 말씀하신 가치관의 다양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아이를 키우기 위해 어떤 교육관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A 제가 애들이 둘 있습니다. 그 애들한테 쓸 돈이 없었어요. 미안하죠. 장난감 사주고 군것질감 사주고그래야 되는데, 그 돈으로 책 사서 보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참 미안하고 책이 징그럽기도 하고 그랬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컸어요.
우리 아이, 서울대학교 교수하는 나민애. 그 애는 유치원을 마치지 못했어요. 이유는 독감에 걸렸는데 우리 집사람이 마지막 한 학기 수업료 안 내려고 못 가게 했어요. 걔가 지금 40대 중후반인데, 그렇게 가난하게 어렵게 힘들게 살았지요. 우리 애들은요, 할 것이 없어서 책 봤습니다. 우리 집에 뭐 할 게 있어요? 장난감도 없고 뭐 군것질감도 없고 놀잇감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뭐 하겠어요? 아비가 글 쓰는 사람이라 집에 오면 아무것도 안 하고 책만 보고 있죠, 우리 집사람은 또 교회 다니니까 성경책 보고 있죠, 그러니까 애들이 뭐 하겠어요? 심심하니까 책 봤습니다. 오늘날 부모들이 너무나 애들한테 잘 해주는 것을 나무라고 싶지는 않지만, 심심하게 안 하는 것 같아요. 너무 분주하고, 너무 바쁘고, 너무 빡세게 굴리니까 심심할 틈이 없는 거예요. 또 너무 많은 걸 먹이고 갖다 주고 제공하고 하니까 빈곤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애들이 자기 뜻으로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다 해주니까요.
우리는 지금 넉넉하게 번쩍거리면서 잘사는 세상이 됐어요. 그런데 속으로는 텅텅 비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좀 적당히 합시다, 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과외도 적당히 하고 책도 적당히 사주고 아이들한테 좀 여유를 줬으면 좋겠어요. 인생은 길어요. 그렇게 그냥 빨리 가서 뭐 할 거예요? 빨리 가서 도착하는 곳은 공동묘지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빨리 가는 거예요. 나부터도 빨리 가는 거예요. 속도 조절이 필요해요.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기 소망, 자신이 바라는 것, 그 기대 수준을 좀 낮출 필요가 있어요. 인생을 하향 지원하십시오. 이것으로 됐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이것으로 안 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가치관이 일원화가 됐고, 남하고 비교하니까 그러는 게 아닐까요? 옆집 남편하고 옆집 아이하고 옆집 아빠하고 옆집 살림살이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지없이 루저가 되고 여지없이 불행하고 우울하고 따분한 사람이 안 될까요? 저는 비교 안 합니다. 제가 왜 비교해요? 나는 누구일까요? 납니다. 나는 납니다. 내가 너가 될 수는 없죠. 그러나 너를 나는 무시하지 않아요. 너는 너지요. 그래서 ‘나는 나고 너는 너다. 그러나 우리가, 나와 너가 잘 어울려서 잘 산다’ 이렇게 하면 교육 문제, 아이들의 성장 문제도 해결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시를 쓰는 AI 모델이 시집을 출간하고, AI 문학상이 열리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AI가 쓴 시와 인간이 쓴 시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A 한병철 철학자가 낸 《불안사회》. 다 읽지는 못했어요. 근데 중간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AI는, 인공지능은 타자에 대한 욕망이 없다.’ 나는 그 두 문장을 보면서 ‘우와, 이거는 구원 같은 말이다. 핵심이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자, 보세요. AI는 타자에 대한 욕망도 없고 에로스가 없다. 그러면 AI는 시하고는 안 되는 거예요. AI가 쓴 시를 내가 몇 번 받아본 적 있어요. 시 비슷한 것이지 시는 아니에요. 자기가 갖고 있는 정보만 가지고서 조합하고 문장을 만들어서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것이지 절대로 그건 시가 아닙니다.
시는 사실이나 이성이나 지식이나 이런 게 아니고 오로지 감정, 감성입니다. 근데 AI는 에로스가 없잖아요. AI가 타자에 대한 욕망이 없잖아요. 주는 걸 받아서 해달라는 대로 생산해주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인간은 변화무쌍한 면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시하고 AI하고는 얘기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 걸 모르고 AI가 쓴 시에 상을 주고, 이제 시의 시대가 끝났다고 그러는 건 정말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AI가 보면 웃을 거예요. “너희들 그것도 모르고 시인이냐, 사람이냐?” 하고요.
Q 클릭과 터치로 많은 것이 해결되는 세상 속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또 책장을 넘깁니다. 선생님은 도서관과 책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A 책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사람이 만든 책이 사람을 또 만든다고, 책 없이 사람일 수 없지요. SNS나 컴퓨터나 인터넷이 많이 발달해서 책 없이 살 것 같아도, 책으로 접하는 정보와 인터넷 매체로 접하는 정보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뭐가 어떻다고 말해도 책은 인간의 근본이죠. 우리가 교육 이야기를 할 때 보면 기본이 ‘독서산(讀書算)’이라고 그랬거든요? 독서산. 읽고, 쓰고, 셈하고. 그게 교육의 절대적인 목표라고 해요. 읽고, 쓰고, 셈하는 것. 이 세 가지는 책하고 관계가 있어요. 책이 별로 필요 없고 헐거워졌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나는 우습다고 생각합니다.
나민애라고 제 딸아이가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라는 책을 썼는데, 그 친구 얘기를 들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책 읽는 거, 국어 잘하는 거. 이게 뻔한 일이지만 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뻔한 것이 아주 특별한 것이고 중요한 것이고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때 책 읽는 것을 취미라고 쓴 적이 있어요. 이제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음악 감상은 취미가 될지 몰라도 책 읽는 건 취미가 아니에요. 기본적인 인간의 능력이고, 인간이 할 일이에요. 살아가는 삶의 방식, 필수적인 능력. 그것이 저는 책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책을 다루는 분들이 용기를 내고, 가장 중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시고 그 일을 열심히 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 구절이면
한 아름 바다를 안은 듯한 기쁨이겠습니다
- <선물>, (《꽃을 보듯 너를 본다》, 나태주 지음, 지혜출판사, 2020)
Q 시집과 산문집을 비롯해 40여 권의 저서를 냈고, 그림도 그리시지요. 선생님의 하루 일과가 궁금해집니다. ‘하루’라는 시간이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요.
A 하루요. 아침에 일어나면 배가 아픕니다. 많이 아파요. 허리도 아파요. 아주 힘들어요. 가슴이 아파서 숨 쉬기가 어려워요. 그래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커피포트에다 물을 데워서 한 컵 마시고, 오늘 하루도 잘 살자, 이렇게 생각합니다. 얼치기입니다만 기도도 해요. 오늘 하루 주신 것 매우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잘 살게 해주세요. 그냥 아주 단순한 기도입니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필요한 일을 해요. 저를 불러준 분이 있으면 그쪽으로 갑니다. 강연할 필요가 있으면 강연하고, 사람들과 약속하거나 행사할 필요가 있으면 그쪽으로 갑니다.
그런 일이 없으면 저를 위해서 씁니다. 잠도 더 잡니다. 그러니까 일단 밥 먹고, 자는 거예요. 매우 행복하고 편안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안 나가고 잠을 잔다는 것이요. 자다가 깨면 이도 닦고 세수도 다시 하고, 컴퓨터 앞에 가서 제 묵은 시집이나 산문집 원고를 뒤적거립니다. 책도 읽고요. 그림과 글씨는 지속적으로 생활처럼은 못 합니다. 몰아서 합니다.
늘 놀라운 건, 제가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제 얘기를 듣고 싶어 해요. 왜 그럴지 생각해보니, 그 마음이 너무 어둡고 답답하고 목마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많이 안타깝습니다.
저는 저를 위해서도 하루를 살지만 남을 위해서도 하루를 살고 싶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충분히, 오로지 욕심껏 나를 위해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 제 생에서 남은 날이 많지 않습니다. 제가 책을 많이 못 읽었다면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읽을 게 산더미같이 쌓였더라도 어떡하겠어요? 읽은 들 어떡하고 안 읽은 들 어떡하겠습니까. 우선 지금 읽은 만큼만, 좋은 분들이 저한테 얘기해달라고 하면 얘기해주고, 말해달라면 말해주고, 같이 가자면 같이 가고,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게 제 삶이에요.
나태주_시인, 교육인
1945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해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43년 동안 일하며 살았다. 2007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하며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으며, 1973년에 출간한 첫 시집 《대숲 아래서》를 시작으로 다수의 시집, 산문집, 동화집, 시화집 등을 발간했다. 흙의문학상, 충남문화상, 현대불교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한국시인협회상, 고운문화상, 공초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소월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다. 현재는 나태주풀꽃문학관을 설립·운영 중이며 풀꽃문학상, 해외풀꽃시인상을 제정·시상하고 신석초문학상 운영위원장, 공주문학상 운영위원장도 맡고 있다.
신구문화상(新丘文化賞)은 신구문화사의 창립자 故우촌 이종익 선생(1923-1990)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독서문화 발전에 기여한 우촌 정신을 미래 세대로 잇기 위해 올해 처음 제정한 상이다. 상은 ‘올해의사서상’, ‘올해의책’ 총 두 부문으로 나누어 수상하며 이번 제1회 시상식은 2023년 10월 19일 제주컨벤션센터 전시실에서 열린다. ‘올해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최근 가장 마음에 들었던 브랜딩 문구는 무엇인가.A 파타고니아의 ‘파타고니아는 유행을 팔지 않습니다’와 올림플래닛의 ‘메타버스는 기술이
Book 메신저는 책과 언어 그리고 독서를 매개로 다양한 실험과 변화를 모색하는 분들을 만나는 인터뷰 코너이다.5월호에서는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 작가인 김미라 작가를 만났다. 책을 둘러싼 다양한 시선과 해석을 통해 책과 독서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Q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합니다.A 안녕하세요? KBS 클래식 FM 세상의 모든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