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제주에서 보내기로 결정한 후로 나는 줄곧 도서관을 생각하고 있었다. 올해 4월, 돌이 갓 지난 아이와 제주에 방문했을 때, 제주 토박이인 친구가 회심의 미소를 띠고 우릴 데리고 갔던 곳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곳은 고(故) 정기용 건축가가 설계한 기적의 도서관(2004)이었다. 장난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삼각 형태의 외형을 지닌 이 도서관은 발길이 닿는 곳마다 개성 있는 공간이 잘 짜여 있어 둘러보는 재미가 남달랐다. 여름의 제주는 바다가 최고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수욕장보다는 도서관에 끌리는 것을 어쩌랴. 다른 가족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차에 도서관에 관한 글을 쓸 기회가 주어져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여행의 첫날, 나는 한 치의 고민 없이 탐라도서관으로 향했다.
탐라도서관 야외풍경 ⓒ정빛그림
산들산들한 바람과 선명한 햇살이 어우러진 완벽한 날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이와 나는 눈앞에 펼쳐진 숲길로 뛰어들듯이 달려갔다. 긴 세월을 온몸에 간직하고 있는 기품 있는 소나무의 의연한 잎 사이로 초록빛 볕이 가득 차서 넘실거렸다. 햇살이 가닿는 곳마다 푸릇푸릇하게 빛을 내는 곳의 아름다움이란. 나는 그곳에 더욱 특별한 것이 있음을, 고요한 숲에 평화로움을 더하는 뭔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숲의 고요를 벗 삼아 책을 읽는 사람들. 나는 단숨에 그 장면이 좋아졌다. 단 한 번뿐인 고유한 소리와 냄새를 몸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풍경과 하나가 되어야 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가방을 열고 책을 꺼냈다. 커다란 그늘이 드리워진 나무 아래로 달려가 책을 펼치고 책이 열어놓은 문을 열고 잽싸게 빠져들었다. 그렇게 존 밴빌의《바다》를 읽는 내 모습을 아름다운 풍경 속에 남겨 두었다.
그 멋진 장소가 야외에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조성된 탐라도서관의 일부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이곳에서는 풀 바람을 맞으며 책장을 넘길 수 있다. 파란 하늘과 숲의 푸르름을 있는 그대로 소유할 수 있고, 원한다면 잠시 책을 덮고 포슬포슬한 흙의 감촉을 느끼며 산책을 할 수 있다. 탐라도서관의 야외학습장은 책을 읽을 때 자랑이자 무기가 되는 상상력이 온힘을 다해 활보할 수 있는 곳이다.
탐라도서관 문헌정보관에서 ⓒ정빛그림
도서관 내부에는 또 다른 숲이 펼쳐져 있었다. 정신없이 파묻혀 길을 잃어도 불안하지 않은 책의 숲. 1층 문헌정보관의 창은 다른 곳보다 크고 넓어서 바깥의 숲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서가 뒤로 보이는 싱그러운 풍경이 눈의 피로를 풀어주는 느낌이랄까. 문헌정보관의 서가에 놓인 책들이 다른 곳보다 유난히 예쁘게 배치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달마다 새롭게 단장하는 ‘북토리’의 테마 서가였다. ‘북토리’는 독자들에게 다양한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한 달 동안 문헌정보관과 어린이자료실에서 전시 형태로 운영된다. 이 프로그램의 참신한 점은 책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시된 책들 중 한 권을 선정해 저자를 초대하고 강연회를 여는 것이다. 독자가 책의 여운을 이보다 가까이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문헌정보관을 지날 때 유독 발길을 끌어당긴 공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다. 비밀의 방처럼 보여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은 그곳은 향토자료실이었다. 대출이 불가한 귀중한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는 곳에서 색이 바랜 귀중한 자료를 넘겨보자니 마음이 무겁게 숙연해졌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들이 영구히, 온전하게 보존되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느껴진 것이다. 결코 잊혀서는 안 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의 기록을 다음 세대로 잇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향토자료실과 맞닿아 있는 참고자료실에 새로움이 생명인 신문과 잡지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면서도 현실적이었다.
어린이자료실에서(좌) 볕이 드는 문헌정보관(우) ⓒ정빛그림
아이의 발길이 닿는 곳으로 걷다가 멈추고,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공간에 한껏 머물렀다. 특별한 목적 없이 돌아다니니 발걸음이 자유로웠다. 계단 사이에 있는 영아 열람실을 발견하고, 끌리듯이 들어가 이 책저 책 꺼내 읽기도 했다. 다채로운 동화책이 즐비한 그곳에서 아이와 나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것도 모르고 책장을 넘겼다.
탐라도서관 1층 매점 ⓒ정빛그림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땐 2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원래 가려고 계획했던 식당이 쉬는 시간이라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고 도서관 1층에 있는 매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메뉴판을 보자 순식간에 입에 군침이 돌았다. 오늘의 정식, 돈가스, 비빔밥, 멸치국수······. 먼저 주문하는 사람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슬쩍 들어보니 전 메뉴가 인기 메뉴였다. 나는 멸치국수를 한 그릇을 주문했다. 흰 소면 위에 채 썬 당근과 유부와 김이 올라가 있고, 무심하게 흩뿌려진 통깨가 전부인 소박한 국수 한 그릇. 역시나 맛이 좋았다.
주차장으로 가기 전, 잠시 숨을 고르며 도서관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이 아름다운 풍경은 매일 매일이 새로울 것이다. 책에는, 그게 어떤 책이든,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는 교감이 존재한다. 그것은 저자와 독자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적 교류일 수도 있고, 책 자체에 녹아 있는 ‘기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할수록 교감은 더 확실해지는데, 나는 그런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준다고 믿는다.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빠져드는 기이한 경험. 도서관은 이런 놀라운 경험이 태연하게 일어나는 특별한 공간이다. 어느 향수의 이름처럼 도서관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생동하는 초록의 에너지를 지닌 탐라도서관의 속삼임. 탐라도서관은 꼭 책을 읽지 않더라도 오고 싶어지는 그런 곳이었다.
다음 행선지로 휙 떠나기가 아쉬워 근처를 돌아보았다. 도서관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 하나 있었다. 탐라도서관 야회학습장의 푸르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쾌적한 숲길과 동백나무가 매력적인 방일리 공원. 머뭇거림 없이 붉은 동백꽃을 보려면 이른 봄에 다시 와야겠지만 오고 싶은 장소에 다음을 기약하는 숙제를 남겨놓는 것은 기분 좋은 아쉬움이었다.
다음 행선지는 제주도립미술관이었다. 아이는 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잠이 들었고 나는 되도록 천천히 차를 몰았다. 전시장을 휘적휘적 훑고 돌아다니려면 조금이라도 아주 깊고 달콤한 잠을 자야 하리라. 마침 저녁에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탐라도서관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다소니에서 ⓒ정빛그림
‘괜찮은 식당을 찾았어. 저녁은 여기에서 먹자.’
될 수 있으면 채식을 하고 싶다는 나를 위해 친구가 열심히 찾았을 식당이었다. 식당의 이름은 ‘다소니’. 순우리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친구가 보내온 사진을 보니 금세 배가 고파졌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메밀칼국수. 그러나 고소한 들깨수제비와 노릇하게 구운 둥근 호박전도 놓칠 수 없다고 하니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기대되는 저녁이 있다는 것은 남은 하루를 근사하게 보낼 수 있는 동력이었다.
덧1
탐라도서관에서 초록의 숲을 느낄 수 있다면 애월도서관은 바다를 만질 수 있는 곳이다. 물론 눈으로. 열람실 책상에 몸을 파묻고 공부를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넘실대는 바다라면 기분이 어떨까.
덧2
또 하나의 어린이 도서관에 다녀왔다. 이름부터 어여쁜 ‘별이내리는숲’ 어린이 도서관은 제주도서관 건물 옆에 새로 지어진 4층 건물로, 건물 전체가 어린이 도서관이다. 각 층에는 영아부터 중고생까지 이용할 수 있는 다채로운 코너와 유익한 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책은 물론이고, 음수대와 화장실, 의자의 배치까지 세세하게 아이들을 배려한 공간이 많아서 인상적이었다.
정빛그림_소설가, 화가
정빛그림은 웹진 비유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림과 소설을 좋아해 학부에서는 회화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문학을 공부했다. 2021년, 소설집 《빛의 시간》을 출간했다.
[도서관 옆]은 각 지역의 여러 도서관을 도서관 안에서가 아니라 도서관 옆으로부터 시작해 여행하듯 도서관을 탐방하는 코너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는 곳‘도서관 생활자’. 이만큼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섭렵했다거나 하다못해 한 분야의 서가를 통째로 읽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라면 ‘다
[도서관 옆]은 각 지역의 여러 도서관을 도서관 안에서가 아니라 도서관 옆으로부터 시작해 여행하듯 탐방하는 코너이다. 도서관이 도피처가 돼버렸다. 이사를 하면서다. 뉴스로 접하던 층간소음이 내 문제가 될 줄이야······. 처음엔 낯선 환경 탓이려니 하며 적응해보려 애썼지만 한 달도 못 가 위층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위층 여
[도서관 옆]은 각 지역의 여러 도서관을 도서관 안에서가 아니라 도서관 옆으로부터 시작해 여행하듯 탐방하는 코너이다. 오고 또 오고, 마음이 맴돌게 하는 통영의 색그 바다에 점점이 박힌 것은 섬뿐만이 아니다. 크고 작은 배들이 물 위에 긴 꼬리를 그리며 바삐 오가고, 뱃길 아닌 고요한 바다에는 양식장 부표가 떠 있기 마련이다. 통영, 하면 바다를 떠올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