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ADHD 진단을 받았을 땐 내 인생이 드디어 영원한 불행의 터널로 들어선 것 같았다. 성인 ADHD에는 완쾌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끝없이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평생 약을 먹어도 낫질 않는다니, 노력의 노력을 거듭해도 결국은 ADHD일 뿐이라니. 내 이야기가 아닐 땐 대수롭지 않던 네 개의 알파벳이 순식간에 멍에가 되어 나를 옭아매는 순간이었다.
그때는 이미 망한 듯한 삶을 리셋하고만 싶었다. 게임 캐릭터처럼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절대로 ADHD라는 옵션은 고르지 않을 거라며 울기도 했다. 하지만 삶은 눈물로써 닦이는 게 아니었다. 눈물로써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슬픔은 ADHD를 극복하는 데도, ADHD와 융화되는 데도 쓸모가 없었다. 울면 울수록 눈이 붓고 힘이 빠질 뿐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다음 스텝을 밟듯 자기 비하와 자기 연민에 빠져들었다. 모지리 같은 내가 싫기도 했고, 하필이면 이런 병(?)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불쌍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불쌍한 건 영문도 모른 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늘 실내화나 준비물을 잊어 빈손으로 어리둥절해하던 모습, 돈이나 물건을 하도 잃어버려 의도를 의심받던 모습, 잘 걷다가도 몸 개그를 하는 사람마냥 꽈당 넘어지곤 하던 모습들이 시도 때도 없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심지어 공부도 못 했기 때문에 바보 소릴 자주 들었고, 그런 크고 작은 실패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어른이 된 상태였다. 내게 필요한 건 조언이나 꾸중이 아니라 약이었건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몰라줬다는 게 끝없는 회한으로 남았다.
불행을 행운으로 바꾼 글쓰기
그런데 엉망진창인 상태에는 에너지가 많이 들었다. 집요하게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 위해서는 일정량 이상의 집중력이 필요했는데, 내게는 딱 그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땅굴을 파던 나의 슬픔은 곧 시시하게 동력을 잃었다. 하다 하다 울고불고 비관하는 일에도 싫증이 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다시 기쁨이었다. ‘어차피 평생 ADHD’인 거라면, 그것과 함께 살아가면서 기뻐지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처음에는 마음속 케케묵은 감정들을 전부 화면에 쏟아버리겠다는 생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ADHD에 대한 고급 정보든 내 개인 의견이든 유려한 문체로 깔끔하게 전달하고 싶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다듬어도 내 문장들은 좀 산만했다. 괴상한 수식어와 사족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컴퓨터로 쓴 글인데도 한눈에 정신 사나워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쓰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어차피 끝내주게 잘할 수 없는 거라면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잖아? 라는 마음이었다. 덕분에 속도는 아주 잘 난다는 점이 행운이었다. 나는 단기간에 얼기설기 엮은 글들을 ‘브런치스토리’라는 플랫폼에 올렸고, 그 해 열린 출판 프로젝트 공모전에 당선됐다. 당선의 결과로 첫 책 《젊은 ADHD의 슬픔》을 세상에 낼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ADHD라는 불행이 행운으로 전복된 셈이었다.
출간을 계기로 나와 ADHD의 관계는 변해갔다. 인생 최대의 약점으로 인생 최대의 성과를 내본 경험이 나와 ADHD의 대립 구도를 변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었다. 갑자기 ADHD를 마구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양심 상 예전처럼 배척할 수도 없었다. 마냥 미워하기엔 ADHD를 통해 새로이 배우고 깨달은 바가 많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유 없는 고통은 없다더니, 나의 ADHD에도 어떤 의미가 깃들긴 한 모양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 사회에 가시화된 ADHD
게다가 세상에는 ADHD가 참 많았다. 진단 초기 나 홀로 세상이 무너진 듯 청승을 떨었던 게 민망할 만큼 흔한 질환이 바로 ADHD였다. 학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지만, 높게는 인류의 10퍼센트 가량을 ADHD 스펙트럼 군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길거리에 사람 열 명이 지나가면 그중 한 명은 ADHD 기질을 보인단 소리였다. 나만의 불행이라 생각했을 땐 그리도 커보였던 ADHD가 모두의 애로사항이라 생각하니 작게만 보였다. 실제로 사회생활을 해봐도 그랬다. 나는 확실히 ADHD였지만, 나만 나처럼 구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때론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자기 자신이 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우리 사회가 ADHD에게 점점 친절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ADHD 관련 도서가 점점 늘어가는 현상을 보게 될 때였다. 일상 속에서 ADHD 친구를 만날 때도 반가웠지만 출판이라는 공식적인 루트로 ADHD라는 질환이 가시화되는 걸 볼 때에도 크게 안심이 되곤 했다. 나 역시 많은 책들의 위로와 도움을 받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신지수 작가의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 민바람 작가의 《우아한 또라이로 살겠습니다》였다. 이 두 권의 책은 각각 ‘서른에야 진단받은 임상심리학자의 여성 ADHD 탐구기’, ‘마흔 살, 성인 ADHD 노동자가 일상을 사는 법’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나보다 언니이자 인생 선배인 성인 ADHD의 고군분투기를 엿보며 때론 공감하고 때론 응원을 보내게 되는 좋은 책들이었다.
이외에도 추천할 만한 책으로는 《성인 ADHD의 대처 기술 안내서》 《어쩌면 ADHD 때문일지도 몰라》가 있다. 전자는 성인 ADHD 계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고전이고, 후자는 상담실에서 다정한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듯 편안한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여러 ADHD 당사자와 치료자들이 쓴 책을 읽으며 질환에도 객관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는 만큼 통제력이 생기고, ADHD의 경우 특히 자신의 생활 패턴 전반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힘이 곧 자존감으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처음 ADHD 진단을 받은 후로 9년이 흘렀다. 25세의 어리버리하던 나는 별다른 반전 없이 34세가 되었고, 여전히 ADHD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실수투성이 하루를 버텨내는 중이다. 어떤 날엔 약조차 소용없지만 이젠 어쩔 수 없는 내 모습에 충격받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오랜 세월 함께하는 동안 ADHD가 내 삶의 일부로 완전히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9년 전의 내게로 돌아가 말해주고 싶다. 지금은 벼랑 끝에 선 것 같겠지만, 너의 산만한 세상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산만하면 산만한 대로, 정신 사나우면 사나운 대로 계속 흘러갈 뿐이라고. 그러니까 삶을 너무 버거워할 필요 없다고 말이다.
정지음_작가
제8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젊은 ADHD의 슬픔》으로 대상을 받은 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오색 찬란 실패담》 그리고 소설 《언러키 스타트업》 등이 있다.
2114년에 출간될 책을 위해 100년 동안 천 그루의 나무 심기노르웨이 예술가 케이티 패터슨(Katie Paterson)은 2014년부터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Future Library Project)’를 진행하고 있다.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에서는 2114년에 출판될 책의 재료를 자급자족하기 위해 100년 동안 천 그루의 나무를 심고 수확한다. 케이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해를 맞았다. 예전과 같았다면 다소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한 해의 잘한 일과 못 한 일을 생각해보고 멋쩍게나마 소소한 바람을 마음에 새겨보았을 그런 평범한 일상이 사라진 새해였다. 대신 너 나 할 것 없이 불안하고 두려운 공포의 균형 상태를 경험했다. 더불어 같은 단어와 같은 사실이 극단에서 대치하는 지독한 불균형의 모순도 경험했다
우에노는 도쿄의 변천사를 직접 보고 느끼고 싶다는 분들께 추천하는 곳이다. 도쿄에 오는 많은 여행자들이 우에노에 오면 우에노공원, 동물원, 아메요코 시장만 살짝 보고 지나간다. 그러나 도쿄가 초행이 아니고 일본문화 기행을 원한다면 일단 우에노공원을 보고 구글지도 앱에서 ‘국제어린이도서관’을 검색해보자. 핀이 표시된 방향으로 10분만 더 우에노 안쪽 깊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