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에는 대련 시내에서 택시로 약 50분 거리의 여순구(旅顺口区)에 위치한 여순감옥과 관동법원을 방문했습니다. 대중교통으로도 이동할 수 있지만 세 시간 가까이 소요되기 때문에 택시로 이동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대련의 경우 택시비가 저렴합니다. 저는 50분 이동하는데 89위안(한화 17,000원)을 지불했습니다. 여순구는 대련시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과거 러일전쟁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한 지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는 역사 교육과 관광을 위한 유적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당시의 건축물과 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방문하는 곳입니다.
#여순감옥: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감옥
여순감옥 외관
여순감옥(旅順監獄)은 원래 러시아가 1902년에 랴오둥 반도 진출에 저항하는 중국인들을 수감하기 위해 건설한 시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1907년부터 감옥을 확장하고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여순감옥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신채호, 이회영 선생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수감되었으며,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후 여순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또한 여순감옥은 수감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처형을 집행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안중근 의사는 그곳에서 사형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입니다. 여순감옥은 현재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방문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여순감옥 투어리스트 센터, 여권을 확인하고 방문일지를 작성한다.
여순감옥에 도착하면 투어리스트 센터에서 방문자의 여권 정보와 머물고 있는 호텔의 주소를 작성해야 합니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30분 단위로 약 20명씩 입장할 수 있습니다. 여순감옥은 개별 관람이 불가능하며, 반드시 해설가와 함께하는 단체 관람만 가능합니다. 관람 중에는 해설가가 맨 앞에서 설명을 진행하고, 마지막에는 관리자가 동행하여 관람객의 동선을 관리합니다. 이는 정해진 시간 내에 입장한 인원이 모든 관람을 마치고 퇴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조치라고 합니다. 해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어로 진행됩니다.
여순감옥 관람 안내 표지판
여순감옥은 일제의 억압적 통치를 상징하며,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공간입니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재판과 수감 생활이 이루어진 장소로,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순감옥은 당시의 고문실, 수감실 그리고 벽에 남겨진 흔적들까지 잘 보존되어 있어, 방문객들은 그 시대의 아픔과 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짐 검사 후 입장하면 보이는 여순감옥 입구
입장 절차를 마친 후, 해설가 선생님이 저를 유심히 보시더니 한국어로 “한국인입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으나, 한국인 방문객에게는 안중근 의사의 작품들이 전시된 공간을 개별 관람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검신실
해설가를 따라 여순감옥에 입장하면 가장 먼저 검신실(검사실)이 보입니다. 여순감옥의 검신실은 일본의 억압적 통치와 밀접하게 관련된 중요한 공간으로, 당시 죄수들이 수감되기 전에 신체검사와 신분 확인을 받던 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 일본군은 신체검사를 통해 수감자들이 숨겨놓은 물건이나 중요한 정보를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또한 이 공간은 단순한 수감 전 검사만이 아니라, 수감 후 부역할 때에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수감자들은 옷을 모두 벗고, 두 손을 위로 뻗은 채 자신의 수감 번호를 외치며 높은 나무 막대기를 뛰어넘었다고 합니다. 이는 특정 부위에 숨겨놓은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합니다.
수감복이 점점 빨갛게 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을 보면 옷의 색깔이 두 가지로 나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푸른 옷은 잡범을, 붉은 옷은 사상범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문으로 생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인해 푸른 옷과 붉은 옷의 구별이 무의미했던 날이 많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해당 공간은 당시 수감자들이 겪은 잔혹한 고통과 억압을 상징하며, 여순감옥의 역사적 의미를 깊이 새길 수 있는 장소입니다. 특히 여순감옥의 검신실은 일본의 통치 방식과 인권 유린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감방의 모습(위) / 3개 국어로 적힌 감옥 규칙(아래)
여순감옥의 감방은 방사형 구조로 설계되어 있으며, 3층으로 구성된 동측 건물에 총 87개의 감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각 감방의 면적은 약 11~15m²로, 평균 7~8명이 함께 수감되었습니다. 이처럼 좁은 공간에 여러 명이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부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고 전해집니다. 각 감방의 벽면에는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로 작성된 감옥 규칙이 부착되어 있었으며, 문 옆에는 죄수를 식별하기 위한 번호표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는 수감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당시의 감옥 운영 방식을 보여줍니다. 구조적인 특성으로 인해 여름철에는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 답답하고 무더웠으며, 겨울철에는 난방 시설이 없어 극심한 추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직접 감방 내부를 보니, 그 공간에서 수감자들이 겪었을 고통과 어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이 무거워졌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감방(좌) /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감방 바로 옆에 위치한 교도관실(우)
밖으로 나오면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감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교도관실 바로 옆방에 수감되었는데, 이는 그의 독립운동 활동이 얼마나 상징적이고 중요한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합니다. 당시 일본은 안중근 의사가 지닌 높은 정치적 상징성과 독립운동에서의 영향력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의 활동을 철저히 통제하고, 다른 수감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매우 엄격한 감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도관의 옆방에 배치해 지속적인 감시와 관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감방은 안중근 의사가 수감 중에도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와 신념을 잃지 않았던 장소로, 역사적 중요성을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감방의 내부
안중근 의사의 감방에는 다른 수감자들과는 달리 침대와 책상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안중근 의사가 단순한 수감자가 아닌, 일본이 특별히 관리하고 주목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를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정치적 인물로 간주하며, 그의 활동을 철저히 차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일정한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그를 단기적으로 완전히 무력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려는 안중근 의사를 존중했다기보다는, 그를 엄격히 감시하는 과정 속에서 최소한의 생활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지속할 가능성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침대와 책상은 단순한 물건 이상으로, 일본의 통제 전략과 안중근 의사가 지닌 정치적 중요성을 반영한 상징적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안 의사가 감옥에서 쓴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원고
안중근 의사는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뒤,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이 방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며 자신의 신념과 비전을 글로 남기려 했습니다. ‘안응칠’은 안중근의 어릴 때의 이름으로, 《안응칠 역사》는 그의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입니다. 《동양평화론》은 동양의 협력을 통한 평화 구축을 제안한 논설로, 그는 조선, 중국, 일본이 평화회의와 군사 통합을 통해 외세에 맞서야 하며, 통일 화폐를 도입해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비전은 당시 동양의 갈등을 해소하고 안정적인 평화를 꿈꾼 안중근의 이상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동양평화론》 집필을 위해 사형 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암방이 있는 곳에 들어가는 입구(좌) / 암방의 모습(우)
안중근 의사의 감방을 지나면 암방이라고 불리는 공간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수감자들을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서 고립시킬 때 사용되던 공간으로, 밖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암방은 매우 어두워 수감자들은 외부와 일체의 접촉이 차단된 상태로 고립되었습니다. 이 방에 수감된 사람들은 심리적·신체적 고문을 겪으며, 극도의 압박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고문실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유독 음침한 기운이 많이 느껴진다.(좌) / 고문 기구들(우)
암실 옆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수감자들을 고문했던 고문실이 나옵니다. 이 공간은 당시 여순감옥의 가장 잔혹한 일면을 보여주는 곳으로, 조강(弔杠)*, 호랑이 의자** 등 다양한 고문 도구를 사용해 수감자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했습니다. 고문실에서는 아직 판결을 받지 않은 수감자들과 ‘감옥 규칙을 위반한 자’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형벌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하거나 복종을 유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여순감옥의 대표적인 고문 방식 중 하나는 '태형(笞刑)'으로, 납으로 감싼 대나무를 사용해 수감자의 피부와 살을 찢고 터트리는 형벌이었습니다. 특히 잔혹했던 점은 고문 후에도 수감자를 방치하지 않고 상처를 치료해 몸 상태가 회복되도록 한 뒤, 다시 고문을 가하는 방식이 반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강(弔杠): 죄수를 고문하기 위해 사용된 기구로, 죄수를 매달거나 강제로 자세를 유지하게 하여 극심한 고통을 주는 도구. **호랑이 의자: 수감자의 팔과 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물고문 등 극심한 고통을 주는 도구.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공간(좌) / 복도를 따라 이어진 감방들. 아래층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구멍을 뚫어놓았다.(우)
가장 위층에 있는 감방에는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GUARD STAND'가 중앙에 있으며, 감방들 사이 복도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아래층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이 구멍은 위층에서 아래층에 있는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용도로 설계된 것인데요, 이처럼 여순감옥은 수감자들에게 압박감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타고지로의 자백이 적힌 종이(좌) / 수감자들의 번호판과 소각된 문서의 재(우)
간수들이 지니고 다녔던 물건들(좌) / 간수의 복장과 모자(우)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간수들과 형무소장의 물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순감옥의 마지막 형무소장인 타고지로는 1944년 5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여순감옥의 형무소장을 역임한 인물로, 일본이 항복하기 전날 밤 감옥의 자료와 중요한 서류 소각을 지시해 범죄의 증거를 훼손한 인물입니다. 이 외에도 간수들이 지니고 다녔던 수동경보기, 가죽 채찍, 밧줄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여순감옥의 중앙뜰
동측 건물을 모두 보고 나오니 중앙뜰이 보였습니다. 이 공간은 일정 시간 수감자들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장소라고 합니다.
의학관의 약품 조제실
중앙뜰을 지나 여순감옥 내에 있는 의학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의학관은 수감자들의 병을 치료하고 신체실험을 했던 장소입니다.
의학관을 둘러볼 때 함께 관람했던 모든 사람들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이름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학관’이었지만 일본이 수감자들에게 한 행동은 너무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화가 났던 것은 친력자들의 증언이 적혀 있는 공간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친력자 행위를 한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협력자’ 또는 ‘부역자’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감옥 안에서 감시나 고문에 협조하거나, 수감자들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돕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권력자의 명령에 따르며 감옥 안에서 특정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로, 주로 수감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고문을 실행하는 데 가담했습니다. 그들이 증언한 내용의 일부를 아래에 소개합니다. 증언 내용은 중국어, 한국어, 영어로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친력자들의 증언이 적힌 벽
‘이곳은 명목상으로는 병원이라 불렸지만, 실제로는 괴롭힘을 당해 죽는 사람이 더 많았다.’ (방종기의 증언)
‘시체를 다시 통내에서 쏟아낸 후 일본인이 시체를 감은 헝겊에 물을 더 부어 둔 후 약물통 속에 담갔다가 약 물을 빼내 가을에 꺼내어 해부 실험도 했으며, 피부와 육질을 제거한 후 철사로 골격을 꽂아서 표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서수림의 증언)
‘병이 위중한 수감자들은 당시 일본 의과전문학교에 실험을 위해서 보내진다는 것을 들었다.’(서명련의 증언)
‘어떤 환자들은 죽은 사람처럼 하나같이 죽은 듯이 바닥에 누워 있고, 몸 위와 아래는 온통 대소변으로 뒤덮여 있었다. 몸 아래에는 수많은 구더기가 있었고, 어떤 구더기들은 긴 꼬리가 자라나 있었다.’(우영만의 증언)
친력자들의 증언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 관람객들도 있었습니다. 저 또한 증언 글을 읽고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특히 서수림의 증언이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수림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시체를 조직적으로 처리하고 실험에 활용했습니다. 우선, 시체를 통 속에 보관해 두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꺼내었는데요. 이때 시체를 감싸고 있던 헝겊에는 물을 부어 충분히 적셨으며, 이후 약물이 담긴 통에 담았습니다. 일정 시간 약물에 담근 뒤에는 약물을 제거하고, 가을이 되면 다시 그 시체를 꺼내 해부 실험에 사용했습니다. 실험이 끝난 시체는 피부와 살을 벗겨냈고, 남은 뼈에는 철사를 꽂아 골격 표본으로 제작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시신 처리 수준을 넘어서, 사람의 육체를 생물학적 도구로 이용한 행위였으며,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한 만행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해설가 선생님께서 “친력자 중에는 일본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도 있었지만, 가족을 빌미로 협박을 당하거나 정말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사람도 있었다”라고 하시니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인간이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 저는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고, 그래서 더욱 슬펐습니다.
의학관 병실(좌) / 환자들이 머물렀던 공간(우)
감염될 우려가 있는 수감자들이 머물렀던 병실(좌) / 문 옆에 있는 작은 창(우)
환자들이 머물렀던 병실도 감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환자의 상태를 더 쉽게 확인하기 위해 감시창은 조금 더 컸습니다. 감염될 수 있는 병에 걸린 수감자의 경우 밀폐된 감방에서 지내야 했으며, 이 감방은 창문이 따로 없고 문 옆에 작은 감시창만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교도관들은 환자의 상태를 확인했다고 해요.
사형장으로 가는 길(좌) / 사형장의 외관(우)
의학관을 나와 가장 가고 싶지 않았던 사형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사형장까지 가는 길은 너무 맑아서 오히려 슬펐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여순감옥은 1934년에 비밀 사형장을 설립했다고 해요. 사형 선고를 받은 수감자는 이곳에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사형장이 설립된 이후 감옥이 해체될 때까지 수많은 항일투사들이 이곳에서 사형당했다고 합니다.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약 700명이 사형을 당했으며, 일본이 항복을 선포한 이튿날에도 공산당원 등 3명의 항일지사가 사형당했습니다. 그만큼 일본은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 마지막까지 잔인했습니다.
사형장의 모습, 안쪽에 작은 대기실이 있다.(좌) / 수감자의 시체가 아래 통으로 들어가는 형태(우)
전 여순감옥의 일본 의사였던 고가 쇼이치가 기술한 교수형 집행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여순감옥에서 일본이 수감자들에게 저질렀던 잔인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교수형은 매우 체계적이고 잔혹하게 실행되었으며, 수감자들이 느끼는 고통과 공포를 극대화하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여순감옥의 중형범들은 다수가 만주와 몽골에서 잡혀왔다. 사형을 집행할 때 어떤 때는 3명, 많을 때는 5~6명이었다. 사형에 임할 때 형무소장, 의사 및 각 계장들 전체가 나란히 2층 계단에 서서 준비가 되면 사형수를 계단 밑에 끌고 내려가고 먼저 중간에 선 형무소장이 판결을 선포한다. “관동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사형에 처하며 즉시 집행한다.” 간수는 사형수를 1㎡ 크기의 나무판에 끌고 와 수갑을 채우고 눈을 가린 후 형구를 씌워 연결고리로 목덜미를 단단히 묶는다. 경첩이 열리면 사형수가 이동식 나무판에서 떨어진다. 나는 계단 밑에서 대기하였다가 사형수의 심장 박동을 검사하고 즉시 형무소장에게 보고한다. 제1구 시체가 통에 담겨 이동하면 다음 것을 기다린다. 비참하다. 정말로 비참하다. 제1구, 제2구... 제5구까지 반드시 연속 검사해야 한다. 이런 사형수와 시체를 마주보면서 내가 이런 직무를 담당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지 통절하게 느꼈다. 참말로 견디기 어려웠다. 교수형에 쓰이는 삼 노끈은 아주 낡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빨았는지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여순형무소 회고》에서
안중근 전시실로 이동하는 길
사형장을 나와 출구로 가니, 마지막에 관람객들을 통솔하던 관리자가 해설가를 향해 "여기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해설가가 뛰어오며 한국인들만 따로 모아 감옥 입구에 있는 건물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곳은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흔적들을 볼 수 있는 전시실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조각상
문이 열리자, 안중근 의사의 수감 당시 기록과 유품들이 전시된 벽면이 펼쳐졌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안중근 의사의 조각상이었습니다. 조각상에서 안중근 의사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결단력과 독립을 향한 굳건한 의지가 조각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며, 그가 겪었던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내면의 힘이 엿보였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목들
이어서 그의 수감 생활과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들이 벽면을 따라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유목은 그가 겪은 심리적 압박과 동시에 독립을 향한 결연한 다짐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서로, 당시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나라를 위한 희생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신념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좌) /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언, 어머니에게 보낸 글, 어머님 전상서(우)
안중근 의사 전시실에는 그를 기리고 평가한 역사적 인물들의 말들도 있습니다. 양계초, 손중산, 김구, 이시영 등은 안중근 의사의 희생과 독립운동에 대한 깊은 존경을 표하며, 그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들이 남긴 말들은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리며, 그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행동이 단지 한국 역사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 공간을 통해 그의 희생과 독립을 위한 신념을 다시 한 번 되새겼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을 당했던 당시의 형장을 재현(좌) /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임을 알리는 안내판(우)
안중근 의사 전시실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처형당한 당시의 사형장을 재현한 전시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공간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며, 그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깊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옆 벽에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장소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어, 순국 당시 독립에 대한 그의 열망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모든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곳
여순감옥을 관람하며, 이곳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겪었던 고통과 희생의 이야기를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감옥의 건축 구조와 각종 고문 도구들은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었고, 그 속에서도 그분들이 간직했던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와 희생정신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안중근 의사와 같은 영웅들의 흔적을 접하면서, 그분들이 남긴 의미와 가치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공간을 떠나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자유와 독립의 가치를 되새기며 앞으로도 그 정신을 이어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느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동묘지, 여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舊址墓地)
아파트 단지를 지나야 묘지에 도착할 수 있다.
여순감옥 관람을 마친 후,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한 ‘여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舊址墓地)’를 방문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일본에 의해 순국하셨고, 그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정확한 위치나 상태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여순감옥 근처에 묻혀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며, 재소자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던 이곳이 가장 유력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비석에 ‘뤼순감옥 묘지터’라고 적혀 있다.
묘지를 방문하려면 아파트 단지를 지나야 하는데, 이 묘지터는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장소로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입니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 나온 뒷산에 ‘뤼순감옥 묘지터’라고 쓰인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다른 특별한 표식 없이 비석만 있는 이곳은 일제가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정치적 희생자들을 매장한 장소로, 여기에 잠든 이들의 수와 묻힌 장소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여 현재는 비석을 세워두었다고 합니다. 저는 주변을 걸으며 이곳에 잠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비석 앞에서 묵념을 한 후 절을 올렸습니다. 마을 주민분들이 꽃이나 술을 두고 가며 이곳에 잠든 이들을 위로한다고 하여 감사했습니다.
뤼순감옥 묘지터의 풍경
이곳이 안중근 의사가 잠든 장소로 유력하지만 유해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먼저, 일본이 그의 유해를 은밀히 처리하여 정확한 매장 위치를 기록하지 않았고, 여순공동묘지에는 수많은 시신이 무작위로 묻혀 있어 특정 유해를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여순감옥과 공동묘지가 중국에 있어 발굴을 위해서는 중국 정부와의 협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묘지가 아파트 단지에 있기 때문에 현지 주민 생활 및 환경 문제가 겹쳐 유해 발굴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숭고한 희생과 독립을 향한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은 단순한 역사적 복원이 아니라, 그가 남긴 가치를 되새기고 후대에 전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언젠가 그의 유해를 찾아 고향으로 모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그 정신이 더욱 널리 기억되기를 기대합니다.
#여순관동지방법원: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열린 역사적 장소
관동법원 외관
관동지방법원은 1907년에 일본이 설립한 법원으로, 관동고등법원과 지방법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자들이 재판을 받았으며, 안중근 의사 또한 이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와 민족적 정의를 당당히 주장하며 재판에 임했습니다. 이 재판은 일본 식민지 통치 아래 강압적이고 불공정했던 법원 시스템을 상징하며,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해진 부당한 처벌의 사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관동지방법원 입구(좌) / 티켓과 엽서(우)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편에 티켓을 구매하는 안내소가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자 익숙하게 한국말이 들려와 조금 놀랐는데요, 여쭤보니 해당 장소를 찾는 한국인이 많아 중국 내에 거주하는 조선족 분들이 한국어를 공부해 해설가 및 안내 직원 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티켓 값은 인당 30유로로 한화 6천 원입니다. 티켓을 구매하면 엽서에 도장을 찍어주는데, 안중근 의사의 손과 광동법원의 모습이 찍혀 있습니다.
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보는 영상
관동지방법원은 여순감옥과 달리 해설가의 설명 없이 개인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해설가 분들이 한국어에 능숙하셔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다면 단체관람 시간에 참여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직원과 함께하는 단체관람은 30~40분 간격으로 진행되며, 관동법원에 대한 영상을 시청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영상은 여순감옥이 일제강점기 동안 어떤 역할을 했는지와 안중근 의사의 재판 과정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지방법원 법정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7일부터 2월 14일까지 이곳에서 총 6차례의 공판을 받았습니다. 당시 재판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와 사법 체계의 부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되는데요, 일본 제국은 안중근 의사의 사형을 목표로 한 '보여주기식' 재판을 진행했으며,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행위가 동양 평화를 위한 정의로운 의거였음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일본 정부는 안중근에게 일본 관선 변호사만을 선임할 수 있도록 했고, 이 때문에 그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재판은 일본의 억압적인 사법 체계와 부당한 처벌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2층에 위치한 고등법원 법정
2층에 위치한 고등법원 법정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던 법정입니다. 이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당시 재판은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고, 많은 사람들이 재판 과정을 지켜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참관인 수에 제한을 두었고, 일부 사람들만이 재판에 참관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법원 법정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왼쪽, 오른쪽 계단 중 하나를 선택해서 고르면 되는데, 왼쪽은 ‘죄수’가 오른쪽은 ‘방청객’이 이용했습니다. 저는 안중근 의사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성토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한 죄
3. 을사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등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
12.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한국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싱가포르 스트레이츠 타임즈에 실린 1905년 12월 6일자 5면 안중근 의사 재판 기사 내용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행동이 동양 평화를 위한 정당한 의거임을 주장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한 이유를 15가지로 정리하여 설명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은 장소
안중근 의사 재판을 참관한 영국 더 그래픽(The Graphic)의 기자 찰스 모리머는 ‘이 세계적인 재판에서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법정을 떠났다. 그의 진술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하였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글은 안중근 의사 재판이 얼마나 불공정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방문 기록을 작성하는 노트(좌) / 벽에 걸린 유목들(우)
고등법원 법정 옆으로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를 기리고 있었습니다. 기부금을 낼 수 있고 방문 기록을 남길 수도 있었는데요, 저도 짧지만 감사한 마음을 담아 방문 기록을 남겼습니다. 벽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목들이 걸려 있습니다.
영웅 열사실에 있는 신채호 선생과 안중근 의사에 대한 정보
그 다음으로는 ‘영웅열사실’로 이동했습니다. 영웅 열사실은 일본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전시 공간입니다. 이 공간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와 그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들의 다양한 활동을 소개하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우표와 여러 기념품들
특히 신채호 선생, 안중근 의사의 재판과 관련된 자료가 주요 전시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항일방화단* 등 중국을 위해 싸운 인물들의 사진, 유품,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민족적 의지와 그들의 희생을 되새기며 그 정신을 이어받아야 할 중요성을 강조하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항일방화단: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 중 하나로, 주요 활동은 일제의 상징적인 건물과 시설을 방화하거나 파괴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통치와 경제적 착취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각종 고문 기구들
마지막으로, 일본이 수감자들을 고문할 때 사용했던 고문기구들이 전시된 공간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당시 일본 제국이 자행한 잔혹한 고문과 인체 실험의 실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고문뿐만 아니라, 일본이 생체 실험을 진행했던 사진들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당시의 참혹한 역사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가장 충격적이었던 고문은, 일본 제국이 감옥 내에서 사냥개를 길러 일부러 굶주리게 한 후 고문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굶주린 개들을 풀어놓고 수감자들을 물어뜯게 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방법은 인간성을 상실한 끔찍한 고문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사람을 산 채로 화로에 넣는 고문 기구 ‘포화로’(좌) /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기구(우)
또한 전시된 사진 속에는 생체 세균 실험을 진행하는 장면과, 전기 의자에 사람을 묶어 전기로 고문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으며,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사람을 산 채로 화로에 넣어 죽이는 '포화로'와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도구 등,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잔혹한 방식의 고문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각종 고문 기구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러한 전시물들을 보며, 당시 일본 제국이 자행한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설명이나 글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고문과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인만 이용할 수 있었던 중앙 계단
현재 여순관동지방법원은 한중일 삼국의 역사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며,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위한 교훈을 되새기는 장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당시의 기억들은 점차 희미해졌지만, 백 년 전의 국난과 항쟁의 역사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 당시의 침략과 만행에 대해 여전히 진정성 있는 사과나 반성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이는 각국의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며 이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잊지 않고 미래를 위한 교훈으로 삼으며, 침략 전쟁을 반대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함께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방문한 여순감옥,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순공동묘지, 그리고 여순관동지방법원은 한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들입니다. 이 장소들은 단순히 과거의 유적지에 머무는 곳이 아니라, 독립을 위한 치열한 투쟁과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뜻깊은 공간들입니다.
이곳에 남겨진 흔적들은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전해줍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독립운동의 숭고한 의미와 그를 위해 희생된 분들의 헌신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역사적 장소들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중요한 지침을 줍니다. 시간이 흘러도 역사를 기억하며 올바름의 가치를 배우고 실천해나가는 노력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여행을 마치면서_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도시, 대련: 역사의 흔적과 미래를 향한 울림
노을이 지는 대련의 바닷가
대련(大连)은 황해와 발해를 품은 요녕성의 항구 도시로, 동북아시아의 관문 역할을 해온 중요한 지역입니다. 이곳은 단순히 아름다운 해안 도시를 넘어, 복잡한 근대사의 흔적과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역사 수업에서 처음으로 대련의 이름을 접했지만, 그 이름의 무게와 도시에 얽힌 이야기를 온전히 느낀 것은 직접 그 땅을 밟고 나서였습니다.
현대적인 건물들과 푸른 해변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평화로운 안식처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격변했던 근대사의 아픈 흔적이 숨겨져 있습니다. 여순감옥과 관동법원은 대련이 지나온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는 공간으로, 그곳에서 마주한 흔적들은 단순한 과거사로 머무는 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했습니다.
이번 여행은 대련을 넘어 단둥, 여순 등 주변 지역까지 이어졌습니다.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맞닿아 있는 단둥은 국경 도시만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고, 그곳에서 느낀 긴장감과 삶의 대비는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특히 여순감옥과 관동법원에서 느낀 당시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은 저에게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책임감을 강하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이번 여정은 단순히 새로운 장소를 여행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 속에서 제가 서 있는 현재의 위치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향한 방향성을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대련의 바다와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저에게 큰 울림을 줄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대련의 특별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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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이, 기억 속 한 장면처럼 이번 스페셜 투어 <중국 대련(大连)>에서 마주한 순간들을 천천히 넘겨보며, 다시 그 길 위에 서볼까요? 페이지마다 담긴 이야기와 풍경을 보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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