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바닷바람은 진초록 향기를 몰고 온다. 해운대 달맞이언덕, 이름만으로도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곳. 한적한 고갯마루에서 발길 멈춘다. 오래된 공중전화 박스, ‘추리문학관 앞’ 버스정류장 팻말이 오후 햇살 아래 한가롭다. 맞은편에 우리나라 유일의 추리문학관이 있다. 해운대 앞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유리벽 5층 건물, 달맞이언덕의 랜드마크다.
문학관 앞 표지석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단단한 대리석에 반듯하게 새긴 다섯 글자 ‘추리문학관’. 여러 개 총탄 자국이 표지석을 뚫고 지나갔다. 문학관이 추구하는 강렬한 도전 의지일까? 추리소설 서사의 시작점이 되는 살인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조용한 이 사유의 공간에서 작가의 고뇌와 의지, 그리고 추리문학의 역사를 만난다.
단서를 넘어, 인간을 향한 추리
추리문학관은 1992년 3월, 추리문학 작가 김성종 관장이 문을 열었다. 어느덧 30년이 훌쩍 넘었다. 주변에 빽빽이 들어선 주택가 풍경에서 당시 모습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지만 탁 트인 광활한 전망, 시원한 바닷바람이 창작에 몰두하던 작가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을 것이다. 김성종 관장은 인기 소설 《여명의 눈동자》의 작가다. 현대사에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정면으로 다룬 이 작품은, 연재 당시 신문이 배달되기를 기다리던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1977년에 10권으로 출간되었고, 1991년 드라마로 제작되어 시청자들의 퇴근길을 재촉했다. 최고 시청률 58.4퍼센트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김성종 작가 하면 먼저 《여명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 작품은 추리소설은 아니다. 본격적인 추리소설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74년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기념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최후의 증인》이 당선되면서부터다. 작가는 이 작품이 ‘내 운명을 바꿔놓은 작품’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한 작가의 운명을 바꿔놓을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당시로서는 웬만한 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거액의 상금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다. 이 작품이 추리소설 창작의 길로 들어서게 했을 뿐 아니라, 평생을 추리문학과 같이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경찰관〉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1971년에는 현대문학 추천을 받기도 했다. 추리소설로 방향을 확고히 잡게 된 계기가 이 소설에 있었다.
우리나라 근대 추리소설의 역사는 1920, 30년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래성이 일본식 탐정소설을 도입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이다. 이후 침체 과정을 거치다가 1970년대에 와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 시기는 대중매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신문, 잡지가 창간되었다. 이러한 매체 환경의 변화는 추리소설의 발표 지면을 확대했다. 선생이 ‘매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특히 《최후의 증인》 《제5열》 《국제열차 살인사건》 《백색인간》 등이 연재되면서 독자들의 엄청난 반응을 끌어냈다.
“마감에 쫓기던 어느 날, 무작정 지리산 종주를 감행한 적이 있어요. 노고단 산장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지요. 결국 모두 잠든 사이, 헤드랜턴 불빛 아래 원고지 7매를 써 내려갔어요. 새벽 4시, 동전을 탈탈 털어서 사무실 여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원고 내용을 불러주었습니다. 그렇게 신문 한 회를 채울 수 있었지요.”
선생이 들려준 유명한 일화다. 그의 글은 그렇게, 불이 꺼진 산장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문학평론가들은 추리소설을 '문학의 변두리'로 치부하기도 했다. 선생은 동조할 수 없었다. 추리소설을 ‘치열한 작가정신이 부재’한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의 추리는 칼처럼 날카로웠고 그 끝은 언제나 인간을 향해 있었다. 단순히 범인을 찾는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는 누구인지’, ‘인간의 본성과 사회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끝내 묻는다. 장르문학이 문학적 예술성과 사유의 깊이를 동시에 가질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거의 모든 작가들이 도덕적으로 너무 단단히 무장되어왔고, 그렇게 무장된 것처럼 휩쓸려왔던 것이다. 가장 개성적이고 자유로워야 할 작가들이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것을 포기했음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한쪽으로 휩쓸린다는 것은 지극히 우려할 일이고 슬픈 일이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펜을 녹슬게 하고 자기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김성종, 《추리문학》 창간사)
선생은 창작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의 추리 전문 계간지 《추리문학》(1988) 창간, 추리문학상 제정. 추리문학관 설립에 이르기까지 추리문학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한국 추리문학의 대부’라는 수식어가 헛된 말이 아니다.
기억이 숨 쉬는 공간들
문학관 1층에 마련된 북카페 ‘셜록 홈즈의 집’에 들어선다. 붉은색 벽돌로 장식한 벽과 나무 책장, 오래된 테이블과 의자, 어느 소설의 한 장면 같은 고전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잡지와 시집, 소설책들이 독자들의 손길을 기다린다. 햇볕 밝은 테이블에 한 청년이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언젠가 젊은 부부가 아이 손을 잡고 들어왔어요. 반갑게 인사하면서 ‘대학생 때 자주 들러 추리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어 들렀다’고 하며 ‘변함없이 이 자리에 있어줘 고맙다’ 그러더라구요. 문학관을 운영하는 작은 기쁨이지요.”
전시실은 2층에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처음 만나는 곳이 ‘홈즈의 방’이다. 오래된 책들과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탐정소설. 벽에 걸린 흑백 인물사진과 초상화들. 책상 위에는 헌팅 캡, 셜록 홈즈의 얼굴이 새겨진 장식품, 타자기와 램프 등이 놓여 있다. 탐정소설 작가 혹은 명수사관이 오랜 시간 머물렀을 것 같다. 이 공간이 단순한 전시실이 아니라 추리의 역사를 품고 있는 방임을 보여준다.
발길 옮겨 전시장 한 벽면에 선다. 그동안 출간된 김성종 작가의 작품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7, 80년대 신문 연재를 장악할 만큼 독자의 인기를 끌었던 베스트셀러 작가의 왕성한 집필 의지가 뜨겁게 와 닿는다.
앞 유리 케이스 안에는 《후쿠오카 살인》의 초고가 전시되고 있다. 지우고, 다시 쓰고, 또 밑줄이 그어진 문장들이 흐트러진 뇌의 미로처럼 엉켜 있다. 문장 하나하나에 붙들려 있던 시간과 열정의 흔적이 숙연하게 느껴진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고심하며 살아낸 흔적들. 그것은 존재의 내면을 기입한 지문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말한다. “원고는 내 땀이 배어 있는 원시적인 작업”이라고.
전시 벽면 한쪽에 에드거 앨런 포의 초상이 걸려 있다. 어깨 위엔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아 있었고, 그 고요한 눈빛은 이 문학관을 관통하는 분위기 전체를 압축하고 있는 듯했다. ‘추리’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인간 탐구의 여정이, 이 공간 전체에 응축돼 있었다. 기이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이 공간은 그래서 더 문학적이다. ‘추리’라는 장르가 단순한 퍼즐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향한 집요한 탐색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깨닫는다.
“문학은 혼자 하는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자기가 안고 죽어야 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셜록 홈즈나 포와로, 또는 마플 부인은 단순히 사건을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어둠을 꿰뚫는 통찰의 상징입니다.”
전시대에서 눈을 사로잡은 것은 조지 오웰의 《1984》였다. 오래되어 표지가 해진 펭귄북스 초판본. 그 옆엔 낯선 색감의 《국제열차 살인사건》이 나란히 놓여 있다. 하나는 미래를 향한 냉철한 경고였고, 다른 하나는 현실 속 인간의 욕망을 추적하는 이야기였다. 낯익은 것과 낯선 것이 함께 놓인 풍경은, 이곳이 ‘기억의 혼합지대’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 벽면 한 곳에 세계 문학기행의 사진과 글귀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독일 칼프의 거리, 낯선 도시의 겨울 하늘, 유럽 작가들의 흉상과 서명이 조용히 시선을 붙들었다. 선생의 발걸음이 닿았던 그 도시들, 그가 가슴에 품고 돌아왔을 문장들이 이곳 문학관을 숨 쉬게 하고 있었다.
선생은 1941년생이다. 고희를 훨씬 넘겼지만 아직 현역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을 말이죠. 원고를 쓰다 죽는다면 그게 행복이지요.”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눈빛이 그윽하다. 추리문학관은 자료 전시를 넘어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의 창고이자 학습 공간으로 성장해왔다. 애정을 갖고 진행하는 추리문학 강좌는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으며, 독서 토론회 등 시민 참여형 프로그램도 활발히 운영된다. 문학의 문턱을 낮추고, 참여와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시도들이야말로 문학관이 존재해온 힘일 것이다.
문학관을 나서며 생각한다. 이곳은 단순히 책이 쌓인 공간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삶과, 누군가의 문장과, 누군가의 치열한 사유가 살아 숨 쉬는 장소였다. 문학의 변두리로 치부되어온 추리문학이, 이곳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토록 귀한 공간이 오직 개인의 헌신에 의존해 유지되고 있다는 현실은 안타깝다. 프로그램 운영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과 전시 및 교육을 기획할 수 있는 전문 큐레이터의 확보, 그리고 무엇보다 지자체의 실질적인 협력이 절실하다. 추리문학관이 추리소설의 한 장면처럼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우리 곁에 머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문학관 주변 맛집, 형제전통돼지국밥
부산 음식은 바다의 신선함과 피난민의 삶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강하고 따뜻한 맛의 기억이다. 해산물 중심의 식문화, 조리법이 직관적이고 강한 맛, 북한 음식과의 융합, 분식 문화의 발전 등을 특징으로 꼽기도 한다. 부산 지역의 대표적 음식 중 하나가 돼지국밥이다.
부산 해운대시장 골목을 걷다 보면 시장 특유의 활기찬 소음과 사람 냄새 속에서 유난히 정감 가는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형제전통돼지국밥’. 국밥집 50여 년의 역사에 비해 간판은 산뜻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주방과 소박한 테이블들, 그리고 국밥을 앞에 두고 조용히 혹은 왁자지껄하게 밥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선을 끈다. 냄새만으로도 속이 풀리는 듯한 느낌. 무언가 근본 있는 음식을 앞두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돼지국밥은 부산의 대표 음식이지만, 그 뿌리는 전쟁의 상처에서 비롯됐다. 6.25 전쟁 당시 몰려든 피난민들은 값비싼 소고기 대신 구하기 쉬운 돼지고기로 국을 끓이기 시작했고, 이른바 ‘국밥’이라는 형식으로 속을 채웠다. 소박하면서도 실속 있는 한 끼였다. 어느덧 부산이라는 도시의 미각 정체성을 만들어버렸다. 형제전통돼지국밥 역시 이런 역사적 맥락 위에 놓인 집이다. 그러나 이곳은 단지 오래됐다는 사실만으로 특별하지 않다. 이 집은 자기만의 맛을 아주 묵묵하게, 그리고 뚝심 있게 지켜오고 있다.
맑은 국물에 돼지고기 편육이 듬뿍 담겨 나온다. 국물을 한 숟갈 뜨는 순간, 생각보다 훨씬 맑고 깔끔한 맛에 놀란다. 흔히 알고 있는 기름지고 진한 국밥이 아니라, 뼈와 고기를 오래 끓여 우려낸 깊은 맛이지만 무겁지 않다. 잡내는 흔적도 없고, 육수에는 기교보다 정직함이 느껴진다. 편육은 부드러우면서도 씹는 맛이 살아 있고, 따로 나오는 부추무침과 깍두기를 곁들이면 감칠맛이 더해져 금세 밥 한 공기가 사라진다. 소금이나 새우젓은 그저 취향의 영역일 뿐, 굳이 간을 더하지 않아도 충분한 맛이다.
식당 안 풍경도 국밥만큼이나 진국이다. 오랜 단골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반찬을 덜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젊은 커플은 “여기가 진짜 맛집이네” 하며 사진을 찍는다. 유니폼 대신 앞치마만 두른 직원들은 분주하지만 친절하고, 주방에서는 고기 삶는 냄새와 함께 육수 끓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퍼진다. 특별한 인테리어도, 세련된 플레이팅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믿음이 간다. 가게를 채운 것은 세월과 맛, 그리고 사람들이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알겠다. 이 국밥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위로하고 떠나는 이의 기억에 남는 어떤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제전통돼지국밥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정서의 한 조각 같은 곳이다. 시장이라는 공간이 지닌 삶의 온기와 함께, 국밥 한 그릇이 전해주는 따뜻함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이창경_신구도서관재단 이사, 수필가
신구도서관재단 이사, 한국출판학회 고문, 수필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에서 수학했다. 1991년 《추강 남효온 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04년 《문예운동》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고전 편찬 일을 도왔고 1989년부터 신구대학교 미디어콘텐츠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출판 교육, 출판 역사에 관심을 갖고 이 분야 연구에 힘써왔다. (사)출판문화학회 회장, (사)한국출판학회 회장, (사)아시아민족조형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쓴 책으로 《함께 걷는 책의 숲》과 《세계의 식물원 산책 1》(공저)이 있다.
성남에서 남한산성 남문 방향으로 오르는 산길은 낭만적이다. 봄이면 좌우로 길가에 벚꽃이 만발해 터널을 이룬다. 5월, 눈부신 녹음인가 하면 어느새 단풍이 온 산을 곱게 물들인다. 한겨울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찬바람은 오히려 상쾌하다. 산성의 오랜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절은 무심하게 오고 간다. 역사와 문화, 자연과 생태, 건강과 힐링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 · 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신구도서관재단 이창경 이사가 노작홍사용문학관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5월호(첫 회)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동탄, 해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신구도서관재단 이창경 이사가 만해기념관 전보삼 관장을 인터뷰한 내용을 12월 호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연말이 다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