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는 독서] 쓰고 싶은 이야기와 쓰이지 않은 이야기 사이에서_기록과 기록관리의 치유적 힘에 대하여
안정희_작가, 기록정보학 박사
2025-08-1200:01
우리 삶은 쓰고 싶은 이야기와 쓰이지 않은 이야기 사이에 존재한다
도서관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들과 ‘자서전 쓰기’를 한 적이 있다. 참여자들은 처음엔 모두 한결같이 자서전이 완성되면 책으로 출간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는 열망이 글쓰기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글쓰기를 마치고 나서는 하나같이 출간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글을 읽은 자녀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자녀들은 그 글 속에서 자신들의 배우자가 알지 못했던 부모의 과거를 발견했고, 그 내용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꺼려했다. 또한 오해 속에 엇갈렸던 기억들도 있었다. 자녀들은 말했다.
“이건 엄마의 착각이에요.”
“그건 아버지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글 속의 ‘기억들’이 ‘사실처럼’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했다. 누군가의 회상이 글이 되고 그 글이 책이라는 매체로 확정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유동적인 기억이 아닌, ‘기록된 진실’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기억’이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고정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회상은 언제든 수정 가능하지만 출간된 기록은 누군가에게 ‘진실’처럼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출간은 없던 일이 되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와 쓰이지 않은 이야기 사이에, 우리의 삶이 있다.
자서전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직접 서술하는 글이지만,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기록은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상상, 후회와 감정, 그리고 바람이 뒤섞인 ‘자서전적 소설’에 가깝다. 글을 쓴 당사자조차도 어느 부분이 허구이고 어느 부분이 사실인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개인의 기억은 다양한 출처에서 수집된다. 자신이 경험한 일, 뉴스, 교과서, 타인의 이야기,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감정의 잔상까지. 직접 경험한 일조차도 그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회상하는 시점에 따라,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 따라 같은 사건도 다른 의미를 갖는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었던 기억이 삭제되기도 하고, 반대로 없었던 일이 어떤 맥락 속에서는 중심 기억으로 부상하기도 한다. 인간은 맥락 속에서 기억하고 그 맥락은 언제나 현재에서 출발한다.
자서전은 겉으로는 자기 인생을 기록한 글이지만, 실제로는 ‘기억된 삶’이다. 처음부터 허구가 섞여 있고, 간절히 기억하고 싶은 장면은 선명하게 남고, 외면하고 싶은 순간은 자연스레 탈락된다. 우리는 ‘지금의 나’가 바라보는 과거를 적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록은 유동적인 기억을 붙잡으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호출하는 일이다. 그러나 기록은 기억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나를 해석하게 하고, 삶을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바로 그 지점에서 기록은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던 상처,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 말로 꺼내기엔 무거운 기억들을 글로 적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내 안에서 방치되지 않는다. 기록은 나의 기억을 밖으로 데려오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고 수용하게 된다.
기록관리는 삶을 정리하고 방향을 세우는 일이다
글쓰기는 기록하는 행위이고 쓰인 글은 기록이 된다. 우리는 어딘가에 이 기록들을 저장한다. 기록관리란 쌓여 있는 수많은 기록들 중에서 무엇을 보존하고 폐기할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기록이 감정에 머문다면 기록관리는 선택과 구조의 영역이다. 어떤 기록은 간직하고, 어떤 기록은 지우고, 어떤 기록은 누군가와 공유하고. 이렇게 기록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결정하고 관리하는 과정이 기록하는 행위보다 더 필요한 일이다. 기록관리는 단순히 기록물의 정리가 아니기 때문이며, 나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쓰인 기록들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일을 통해, 쓰인 기록들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해석하며 무엇이 보존해야 할 중요한 기록인지 선별하게 된다.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어떤 기억을 꺼내고 어떤 것은 고이 접어둘 것인지를 고민하는 일. 그 작업은 결국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나의 서사를 무엇으로 구성할지를 결정하는 행위로, 이후 어떻게 살아가야겠다는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기록은 감정을 다독이고, 기록관리는 존재를 정리한다 할 수 있다. 기록이 위로의 단계라면 기록관리는 치유의 단계이다. 이 둘은 각각 다른 층위에서 우리의 삶을 돌본다.
기억은 언제나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구성된다. 과거의 사건은 처음부터 허구가 개입된 상태로 저장되며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한 맥락 속에서 새로운 서사로 재편된다. 그래서 한 사람의 자서전에는 무수한 진실의 버전이 공존한다. 그러므로 기록은 늘 불완전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이 인간 기억의 방식이고, 우리가 삶을 서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가면 알 수 있다. 0번 ‘총류’부터 9번 ‘역사’까지 체계적으로 분류된 서가 중, 늘 소설은 역사 앞에 놓여 있다.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이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보다 먼저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의 양이 역사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다. 왜일까? 소설은 작은 거짓이고 역사는 거대한 거짓이기 때문일까? 역사는 언제나 선택과 탈락의 산물이다. 수많은 사실 중 어떤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어떤 것을 배제할 것인지, 그 결정은 늘 시대의 가치관과 권력의 작용 속에 있다. 기록이 역사가 되는 과정에서 진실은 종종 맥락의 이름으로 재구성된다. 사실로 알려진 어떤 기록도 의심해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억은 언제나 ‘현재의 시점’에서 구성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그 시점에서 다시 쓰이며, 처음부터 허구가 스며들어 있다. 선택된 기억이 다른 기억들을 밀어내고, 특정한 맥락에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한 사람의 자서전에는 무수한 ‘진실의 버전’이 공존한다. 그렇기에 소설은 늘 역사 앞에 있다. 역사로 채택된 사실만으로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상처, 삶의 맥락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개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을 서술하고 그 기억이 서로 다른 진실로 자리 잡을 수 있을 때, 보다 다층적인 이해와 공감을 얻게 된다.
기록은 유동적인 기억을 붙잡고, 말해지지 않은 삶의 조각들을 마주하게 만든다. 글을 쓰는 행위는 감정을 치유하고, 기록관리는 삶의 방향을 되짚게 한다. 쓰고 싶은 이야기와 쓰이지 않은 이야기 사이에서 우리는 자신과 삶을 이해하게 되고 앞으로 나아간다.
안정희_작가, 기록정보학 박사
기록관리 전문가로서 기록 문화, 아카이브 관련 강의와 프로그램,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마을 기록관으로서의 도서관》 《기억 공간을 찾아서》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가 있고, 연구 논문으로 〈보존기록의 서사적 기술에 관한 연구〉 〈주민참여를 통한 장소 기록화 방안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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