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더 라이브러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신기했다. ‘청탁자가 내 강연을 들은 적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나의 성향을 이리 잘 파악한 걸까.’ 그는 내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정원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궁금해하며 그 과정에서 읽었던 책이 있다면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청탁을 흔쾌히 수락한 것은, 나를 정원으로 이끈 어떤 운명적 끌림이 나의 오랜 책 사랑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력 검사에서 좌우 0.15가 나와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게 됐을 때 나의 아빠는 눈물을 보이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밤에 책 보지 말라고 말렸건만…….” 나는 부모님이 이제 책을 그만 보라고 하시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던 꼬마였다.
대학에 다닐 때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1년간 교환학생으로 공부했다. 당시 여름방학 두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중 오전 네 시간씩 대학도서관의 서가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조금이나마 생활비에 보태려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도서관의 장서를 다룬다는 사실에 가슴 벅찼다. 다만 지금도 도서관 측에 죄송한 마음이 있다. 당시 친구들이 국제 소포로 보내준 가수 이승환의 〈천일동안〉 테이프를 워크맨으로 들으며 일했는데, 가슴을 후벼 파는 노랫말에 흘린 눈물이 책들을 적셨다. 너무 슬픈 나머지 완벽하게 책을 제자리에 꽂았는지도 장담할 수 없다. 거듭 죄송합니다!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한 다독의 책읽기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신문사에 입사해 30년 가까이 신문기자 생활을 해오고 있다. 사회부, 경제부, 산업부, 문화부 등을 거치고 논설위원도 지내면서 다양한 분야를 담당했다. 일반 기업도 그렇지만 신문사야말로 부서가 바뀌면 직업이 통째로 바뀌듯 하는 일이 달라진다. 기자 경력이 쌓일수록 새 업무를 신속하게 파악해야만 두루두루 앞날이 편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낮에는 전문가들을 만나 취재하고 밤에는 관련 분야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 책을 읽는 것만 한 지름길은 없었다.
결혼하기 전 부모님은 “무슨 기사 하나 쓸 때마다 책을 그렇게 많이 사 오냐”고 하셨다. 그렇게 책을 사들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우리 집 거실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책이다. 책장에 꽂히지 못한 책들은 군데군데 바닥에 탑처럼 쌓이는 일도 다반사다. 그래서일까. 아기 때 책을 거꾸로 들고 장난감처럼 갖고 놀던 아들은 한글을 읽게 됐을 때 내게 말했다. “엄마, 표지에 곰이 그려있는 《나를 부르는 숲》(동아일보사, 2008) 어디 갔어? 여기 꽂혀 있었는데…….”
기자 생활 초년병 때 3년 동안 매주 신문 한 페이지를 채우는 현장 칼럼을 썼다. 그 글을 다듬어 출간한 게 나의 첫 책 《구경》(커뮤니케이션북스, 2003)이다. 이후 틈틈이 쓴 글들이 모이면 책이 탄생했다. 지난해 펴낸 《정원의 위로》(민음사, 2024)는 나의 다섯 번째 책이다. 나는 책을 읽기도 하고 쓰기도 하는 애서가인 셈이다.
정원을 사랑하게 해준 소설책 《오래오래》
2016년에서 2017년 1년간의 기자 해외연수로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 한 달 전, 어쩌다 읽은 한 권의 책이 지금 정원 작가(garden writer)로서의 나를 있게 한 결정적 책일 수 있겠다. 프랑스 소설가 에릭 오르세나의 《오래오래》(열린책들, 2012)다. 이 소설을 무척 흥미롭게 읽은 나는 책에 등장하는 정원들을 찾아다녔다. 프랑스 파리식물원, 영국 시싱허스트캐슬가든, 스페인 세비야 알카사르 정원……. 그곳에서 《오래오래》의 주인공이 된 양 소설 속 상황을 상상했다. 틈만 나면 이국의 정원에서 보낸 시간이 훗날 우리 정원을 사랑하는 초석이 됐다.
《오래오래》는 파리식물원 정원사 가브리엘과 여성 외교관 엘리자베트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부적절한 사랑을 이토록 지적이고 위트 넘치게 그려낼 수 있나. 무엇보다 동·서양 조경에 대한 전문 지식이 풍부하다. 그때도 그렇게 느꼈지만 지금 조경학 박사과정을 하면서 다시 읽어보니 조경 전반을 두루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 같은 책이다. 이유가 있다. 이 소설을 쓴 에릭 오르세나는 1947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베르사유에서 자랐으며, 미테랑 대통령의 문화 보좌관과 최고 행정재판소 재판관 등 주요 공직을 두루 거쳤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그의 화려한 경력 중 하나가 바로 베르사유에 있는 프랑스 국립고등조경학교 교장이었다.
이토록 책에 푹 빠졌으니 파리에 살 때 파리식물원은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치듯 자주 들르는 장소였다. 아이들이 식물원에 딸린 동물원에서 새들을 보며 좋아할 때 정작 나는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상념에 젖었다. 겹벚꽃 피던 어느 봄날에는 홀로 파리식물원에 들렀다가 신간을 펴낸 식물학자를 취재하던 프랑스 기자 일행과 합류했다. 그때 내가 찍어준 그들의 사진이 프랑스 신문에 실린 것도 소중한 추억이다. 그렇게 파리의 정원들을 다녀서였을까. 나의 네 번째 책 《지금, 여기, 프랑스》(미메시스, 2019)의 첫 장이 ‘파리의 나무들’이다.
《정원의 위로》가 이루어주는, 책이 가진 마법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에는 기세등등하게 살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의 상황에 자주 처했다. 버티는 마음으로 살아왔지만 갈수록 주눅 드는 순간들이 생겨났다.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집 앞 한강 변이나 남산을 걸었다. 그러다가 정원을 만났고, 나보다 더 힘들 때 정원을 만들고 가꾸면서 스스로를 다잡으며 다시 일어난 사람들을 만났다. 정원은 내게 치유이자 구원이었다.
그렇게 찾아다닌 우리나라 정원들을 소개한 《정원의 위로》를 지난해 펴낸 후 국립수목원, 서울식물원, 국립세종수목원, 천리포수목원, 서울국제정원박람회 등에서 북 토크를 했다. 수목원과 식물원에서 책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그 장소들만큼이나 내가 사랑하는 장소인 도서관과 서점에서도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경기 남양주시 호평도서관, 경남 남해도서관, 대전 버찌책방, 수원 지관서가…….
그때마다 나는 《사랑이란 손을 잡고 걷는 것》(촬스 M. 슐츠, 선영사, 1984)이란 책 얘기를 한다. 이제는 하늘나라로 가신 나의 아빠가 1984년 선물해주신 빨간색 표지의 책이다. 그 책이 없어져 애타게 찾아다닌 이야기는 《정원의 위로》의 첫 글, 〈스누피 가든-사랑은 손을 잡고 걷는 것〉에 상세하게 소개돼 있다.
그런데 《정원의 위로》가 발간된 이후에도 《사랑이란 손을 잡고 걷는 것》 이야기는 계속된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가 《정원의 위로》를 읽고 나서 《사랑이란 손을 잡고 걷는 것》의 중고 책을 구해온 것이다. 책은 그런 마법이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게 해주는 마법, 오랜 세월의 다리도 금세 건너게 해주는 마법, 낯선 독자들을 새롭게 만나 마음을 나누게 해주는 마법……. 《정원의 위로》는 정원만큼이나 내게 큰 위로를 선사해주고 있다.
김선미_작가, 신문기자
동아일보 기자. 동아일보에 ‘김선미의 시크릿가든’을 연재하고 있다. 《정원의 위로》(민음사, 2024), 《지금, 여기, 프랑스》(미메시스, 2019) 등 다섯 권의 책을 펴냈다. 서울시민정원사, 산림교육전문가(숲 해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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