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 인터뷰]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 '정세권'을 통해 보는 서울_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학과 김경민 교수
김경민_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학과 교수
2025-11-2512:59
정세권(1888~1965)은 일제시대에 활동한 건축가이자 주택건축업체 ‘건양사’ 대표이다.
1910년 한일 강제 합병 이후 일제는 경성을 식민도시로 개조하려고 했다.
이때 한옥을 지어 투쟁을 한 사람이 바로 정세권이다.
그는 북촌의 땅을 사들여 한국인을 위한 주택 건축 사업을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만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조선물산장려회관 건축,
조선어학회관 건축,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사업을 지원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일본식 집은 짓지 않는다’는 모토를 지켰고,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집을 짓고
대금을 할부로 갚는 혁신적인 주택 제도를 운영했다.
건축으로 대한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 정세권,
디벨로퍼(developer) 정세권을 통해 김경민 교수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본다.
• 영상 차례 •
01:12 경성의 디벨로퍼 정세권
05:47 조선인의 주거권을 지킨 한옥
07:52 조선인의 집
10:12 조선 디벨로퍼 회사 <건양사>
12:27 북촌을 지키기 위한 조선인들의 노력
18:26 출판인이기도 했던 정세권
19:50 앞선 ESG 경영 실천
22:13 미래의 정세권에게
23:36 우리가 사는 집의 가치
25:17 현재 대한민국의 부동산 정책
28:00 실용적 가치 실현과 소통
경성의 디벨로퍼 정세권
더 라이브러리(이하 ‘더’): 어떤 계기로 정세권 선생님을 접하고 연구를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경민 교수(이하 ‘김’): 제가 2011년부터 익선동 관련된 지역 아카이빙을 했어요. 당시 익선동이 재개발 규제로 묶여 있어서, 지금의 익선동이 아니고 굉장히 좀 지저분한 익선동이었다고 보시면 돼요, 쪽방이 있었던. 저는 그 지역 아카이빙을 하면서 익선동이 되게 가치 있게 보였거든요. 익선동을 개발한 사람이 누군지 좀 궁금했어요. 그런데 그때 정세권이라는 이름이 나왔고. 그러고 보니까 이분이 가회동 31번지 길도 개발을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좀 큰 디벨로퍼(developer)라는 추론을 했고. 제자들하고 같이 조금만 더 파보자고 했죠. 근데 이분의 이름이 여러 군데서 걸리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역사학계에서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재정적 후원자, 한글학회 또는 조선어학회 쪽에서는 조선어학회의 재정적 후원자로 나와요. 그리고 신간회 후원했던 것도 나오고 해서 ‘아, 이분이 굉장히 큰 인물이겠다’ 생각했고, 그다음부터 저희가 연구실 차원에서 이분에 대해서 좀 더 리서치를 하게 됐죠.
더: 정세권 선생님을 디벨로퍼라고 포지셔닝 하셨잖아요. 어떤 이유로 그렇게 접근하시게 되었나요. 김: 그분의 직업은 디벨로퍼가 맞아요. 그러니까 사실 놀라운 거는 거의 100년 전에 사업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의 모든 과정을 다 해냈어요.) 디벨롭먼트(development)와 관련된 밸류체인(value chain)이 있거든요. 가치 사슬. 맨 처음에는 도시나 지역에 대해서 누군가는 기획을 해야 되는 거고요. 그다음에는 그 집에 대해서 누군가는 설계를 하고, 시공을 하고, 분양을 하고, 그다음에 운용을 하고, 금융까지 제공을 해요. 그런데 당시 한옥 같은 경우 거대한 한옥 디벨로퍼들이 많았어요. 정말 큰 데는 목재상까지 갖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한옥을 규격화해야 되기 때문에. (정세권 선생님은) 당연히 기획도 본인의 회사에서 했고요. 박길룡이라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건축가 있거든요. 그분이 그 회사에서도 일을 했었어요. 그 밑에 시공업자들도 있었고 나중에 분양도 해요. 임대도 하고 중개도 하고 금융까지 해요. 그런데 사실 이 모든 프로세스를 지금 다 하는 디벨로퍼는 우리나라에는 없어요. 그런데 100년 전에 그렇게 했다는 게 대단한 거고, 사실 실질적으로 얘기하면 종합 부동산 회사를 운영한 건데, 미국에서는 이걸 다 디벨로퍼라고 불러요. 그래서 그분이 민족운동을 한 것과는 별개로 그분의 직업 자체는 디벨로퍼가 맞고, 저는 그래서 명칭을 디벨로퍼라고 한 것이죠.
더: 2017년에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라는 책을 내셨잖아요. 그 이후 그분에 대한 생각이 발전된 부분이나 변화된 부분이 있는지요. 김: 제가 2011년부터 익선동을 리서치한 거는, 그 당시에 도시를 부수는 것에 너무 집중을 해서 익선동을 좀 보존하는 차원에서 제가 2013년에 《리씽킹 서울》이라는 책을 썼어요. 쓰는 과정에서 제가 이 정세권이라는 분을 알게 됐고, 그러면서 제가 《프레시안》에 연재를 했었는데, 이분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어가지고 유족분들 있으면 한번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서 한 줄 썼는데 그때 증손자분이 그거를 보고 정세권 선생님 따님하고 손녀분한테 연락을 취하게 해준 거예요. 사실은 그래서 기적적으로 만났어요.
그러나 단순히 유족분들의 어떤 이야기만으로는 그분에 대한 글을 쓸 수는 없는 것이었고, 당시에 제가 20세기 초반의 도시 사회에 대해서도 전문가는 아니었고요. 그래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저희 연구실에서 했던 작업은 사실은 당시와 관련된 도시사 연구하고, 그다음에 이분이 관련된 부분에 대한 아카이브는 거의 모든 걸 다 했어요. 그래서 저하고 박사급 제자 둘, 석사 제자 한 셋 정도 해서 한 5년간에 걸쳐서 그분에 대해서 연구를 한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할 수 있는 리서치는 거의 다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미싱 포인트(missing point)는 존재합니다. 그분과 관련된 자료들이 지워진 것들이 있기 때문에.
조선인의 주거권을 지킨 한옥
더: 정세권 선생님은 ‘일본식 집은 짓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재산도 몰수당하고 그러셨잖아요. 그런 민족 정신을 건축으로 어떻게 구현하시려고 했는지 궁금합니다. 김: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익선동이나 북촌에서 보는 한옥이 조선시대 한옥이 아니거든요. 그거는 1920년 이후에 나타난, 그러니까 20세기 초반 조선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새로운 유형의 주택인 거예요. 그런데 보통 이렇게 도시가 급격하게 산업화를 맞으면서 많은 인구가 들어오면, 미국이나 유럽 같은 데는 슬럼로드(slumlord)라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막 지어요 대충. 그다음에 방을 쪼개면 쪼갤수록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한 3평 정도 되는 좁은 공간에 열 명이 살고 그랬어요. 그렇게 하면서 본인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거죠. 근데 20세기 초반에, 1920년 이후에 우리나라 디벨로퍼는 사실 그거랑은 좀 다른 어프로치를 했어요. 그게 어떤 이유인지는 솔직히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했던 부분은 뭐냐 하면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주택이거든요, 그 한옥은.
그런데 그 한옥이 보다 더 개량된 한옥이었어요. 그러니까 위생시설 같은 경우 화장실 같은 것들을 내부로 들이고 물길도 같이 뭉치게 하고요. 그다음에 햇빛이 많이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도 하면서. 과거에는 조선시대 한옥 보면 마루가 사실 뚫려 있잖아요. 그런데 거기 문을 달아서 열이라든지 냉기 같은 것들을 막게 한다든지 했고요. 처마 같은 경우도 처마가 길었어요. 그래서 처마 거의 끝까지 방을 넓힌다든지, 그러니까 새로운 차원에서 시도를 한 것이고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 당시에 조선에 살던 중산층 이상의 계층은 사실은 문화주택을 선호했어요. 문화주택은 일본 사람들이 지은 서양식 주택이에요. 근데 이분들은 그런 것보다는, 중류 계층 이하라는 표현을 썼는데, 중산층과 그 이하 계층한테 보다 우리 실정에 맞는 집을 제공하면서 좀 더 개량화시킨 거죠. 그 형태의 한옥이 지금 익선동하고 북촌에 있는 한옥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지금의 아파트와 비슷한 형태로 이해를 해도 괜찮을까요? 김: 그렇죠. 마루를 중심으로 방들이 배치되고요. 그다음에 부엌이나 화장실이 배치되는 구조잖아요. 그렇게 들어가면 아파트와 거의 비슷한 구조가 되는 것이죠. 과거의 조선식 한옥, 그러니까 귀족이 살던 19세기 이전의 한옥은 담이 있고요, 그다음에 행랑채, 안채, 본채, 별채 건물이 따로 있잖아요. 근데 20세기 한옥이라는 거는 사실 그걸 다 압축적으로 모아놓은 형태거든요. 그러니까 그 형태가 더 진화해서 아파트가 될 수도 있고, 그런 설명이 충분히 가능하죠.
더: 정세권 선생님은 “조선인은 조선인의 집에 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조선인 집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김: 조선인의 집이라는 게 제가 봤을 때 일본식 주택과 제일 큰 차이점은 온돌이잖아요. 우선은 한옥이 주로 살던 유형이었을 테니까요. 물론 초가집도 있었습니다만 초가집을 발전시킨 게 아니고 한옥을 발전시킨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귀족들이 살던 유형의 주택을 중산층과 서민이 살 수 있는 유형으로 바꿔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초가집이 발전된 게 아니고 한옥의 유형 자체를 줄인 다음에 당시의 시대상에 맞게 고친 거기 때문에 그 관점에서는 조선인들이 선망하는 주택일 수도 있고, 조선인들이 살았던 주택을 20세기에 맞춰서 개량했다고 볼 수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본인이 일본 집을 짓지 않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단순히 건축적인 유형에서 이런 한옥이 나왔다는 것도 중요할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당시의 도시사적 맥락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청계천 이남이 남촌이었고 주로 일본인들이 거기 살았어요. 청계천 북쪽이 북촌이라고 하는데, 그때의 북촌은 사실은 청계천 이북이 다 북촌이에요. 지금의 서촌, 북촌, 혜화동까지가 다 북촌인 겁니다. 그 관점에서 당시 뉴스 같은 것들을 보면 항상 조선인들이 염려했던 게 일본인들의 북진을 막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북쪽으로 진출하는 거를. 일본인들이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다고 했을 때 가장 중요한 건 사람 수거든요. 그래서 정세권 선생님 따님이랑 제가 인터뷰를 했을 때 제일 가슴에 와 닿았던 건 뭐냐 하면 그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자기한테 항상 이 얘기를 했다,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의 북진을 막아야 한다.” 그러니까 일본인의 북진을 막으면서 조선인들의 수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은 큰 주택을 사서 쪼개는 것이고, 거기다 일본 집을 지을 수는 없잖아요 사실은요, 조선식 집을 지은 거죠. 그러면서 지금의 북촌을 어떻게 보면 지킨 거죠. 그 관점에서 봤을 때 조선인의 주거권을 지킨 유형으로서의 한옥을 우리가 더 평가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더: 정세권 선생이 운영했던 회사 ‘건양사’는 어떤 회사였나요. 김: 건양사가 1920년대 거의 독보적인 디벨로퍼 회사로 성장을 해요. 그 당시 1년에 건축된 물량의 한 3분의 1 정도를 건양사가 개발을 해요. 그러니까 제가 봤을 때는 거의 최고의 디벨로퍼 회사였는데, 그런데 이분이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물산장려회 후원하고 조선어학회를 후원하면서 일제한테 찍혀요. 사실은 이름이 ‘건양’이라는 게 되게 웃긴 이름이에요. 대한제국이 ‘광무’가 연호인데 광무 전에 고종 황제가 썼던 게 ‘건양’이라는 연호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냐면, 박정희 시대 때 디벨로퍼가 자기 회사 이름을 신한민주디벨로퍼 회사로 한 거예요. 이게 사실은 위험한 거거든요. 근데 그런 식으로 회사 이름도 하고, 도와주는 게 다 어떻게 보면 민족운동이고 특히 조선어학회는 완전히 찍힌 운동권 단체나 다름없었어요. 어마어마한 민족운동 단체였기 때문에 그걸 재정적으로 후원한다는 건 대단한 위험을 감수하고 한 겁니다. 어마어마한 국내 기업가가 조선어학회 같은 일제에 찍힌 단체에 재정적으로 후원한다는 거는, 독재시대 때 거의 신한민주당 쩐주(물주) 역할을 하는 거랑 똑같은, 그보다 더한 걸 한 거예요. 그래서 그분의 회사가 나중에는 거의 망하게 되죠.
건양사라는 회사가 굉장히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사실 재정적으로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그분이 이제 부동산 회사들이 많이 하는 관점 중 하나인데 그거를 접고 ‘장산사’라는 이름의 회사를 다시 만들어요. 그러면서 또 비즈니스를 해요. 그러다가 1940년 전후로 일제한테 자기가 모았던 재산을 뺏기면서 장산사는 거의 힘을 못 쓰게 되죠. 다만 그래도 뭐 재벌이 망해도 여분은 있다고, 그분이 1950년 전후로 행당동 쪽에서 조금 개발했던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유족들도 그걸 증언을 하셨고요.
북촌을 지키기 위한 노력
더: 정세권 선생님이 했던 일의 관점으로 북촌을 본다고 할 때,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북촌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김:북촌이나 익선동 한옥은 다 당연히 조선시대 한옥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봤더니 그건 아니잖아요. 북촌 같은 경우에도 과거에 1990년대까지는 그 지역민들이 한옥을 부수고 빌라를 지으려고도 했었거든요. 그건 당연해요, 그분들 입장에서는. 그 말씀은 뭐냐 하면 북촌이 21세기 들어서면서 이렇게 막 그 아름다움이 주목됐지, 그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2000년 이전에 안국역 가면 정말 휑했어요. 근데 그게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완전히 바뀐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가치를 지금 안 거죠.
그런데 우리가 그 가치를 안다는 건 외향적 가치에 취한 거예요. 그럼 외향적 가치가 아니라 이게 어떻게 남겨졌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그렇게 썼기 때문에 그게 아니고, 최소한 20세기 초반에 조선인들이 어떻게 북촌을 지켰는지에 대한 것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디벨로퍼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는 게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 제가 봤을 때 그런 스토리는 외국인들한테 충분히 먹힐 거라는 생각을 해요. 우리도 알아야 하지만 외국인들한테도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좀 알려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식민도시 같은 경우에는 피식민지하고 식민지하고 완전히 구별됐어요. 근데 우선은 외국인들이 동양에 대한 역사가 사실은 많지가 않아요. 그래서 이게 식민과 피식민의 어떤 구분이 있었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이고요. 일제가 예를 들어 북촌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앵커들을 박거든요. 1920년대 이후에 대표적인 게 총독부예요. 경성제국대학하고. 그러면 총독부 같은 것들이 왜 거기에 있었다가 왜 없어졌는지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부분들이고요. 따라서 그 부분들은 우리가 해석을 있는 그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다 해서 이게 어떤 식으로 조선인들의 삶에 영향을 줬고, 어떤 식으로 우리가 극복을 했고, 그리고 우리가 이걸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해야 할지 하는 부분들요.
익선동이 1920년대 후반부터 개발이 됐거든요. 가서 보시면 골목이 세 개잖아요. 그 골목마다 한옥의 사이즈가 약간 달라요. 어떤 데는 20평대고 어떤 데는 40평이에요. 조선인들이 못살게 되면서 맨 처음엔 40평짜리 대지의 수요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다 20평짜리로 줄어들어요. 우리가 그런 것도 알아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식민지 시대는 일부 이상한 친일분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조선인들을 일본이 도와줬다는 그런 망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당시에 뉴스나 이런 거 보면, 특히 《조선일보》《동아일보》를 보면 조선인들이 분개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걸 알아야 하는 겁니다.
더: 정세권 선생님이 하신 일을 중심으로 지금 서울의 모습을 그때와 비교해보신다면요. 김: 우선 첫 번째는 사실 20세기 초반, 그러니까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한옥들이 좀 더 있었어요. 예를 들어 보문동 같은 데는 지금도 약간 남아 있고요. 제일 안타까웠던 거는 사실 공덕동에 어마어마하게 남아 있었는데 거기가 다 부서졌어요. 그런데 공덕동은 지금 사람들이 많이 가거든요. 일부라도 남겼으면 굉장히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익선동도 마찬가지예요. 익선동도 제가 2012, 13년에 갔을 때 쥐가 죽어 있고 쪽방에다가 뭐 난리도 아니었어요. 지금하고 완전히 다른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도시 안에서의 차별적인 공간이거든요. 차별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제일 중요한데, 한옥이 그렇게 집단적으로 몰려 있는 건 차별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킬 필요가 있는 것이고요. 그 관점에서 지금 일부는 부서졌지만 일부 남아 있는 데들이 있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남길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좀 했으면 좋겠어요. 창신동에도 여전히 한옥들이 조금 남아 있어요. 한 열 채, 스무 채 정도가. 그런 거라도 시에서 적극적으로 남기려고 노력을 하든지요. 그러니까 위쪽은 어떻게 재개발하든지 그건 알아서 하시고, 동대문역 인근에 있는 것들을 남기려는 노력을 한다든지요.
이제 우리가 스토리로 풀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예를 들어서 일제가 당시 도시계획적으로 봤을 때 두 가지 전략을 취해요. 첫 번째 전략이 남촌에 있는 일본인들의 주거지를 북촌으로 확장시키는 거고 그 관점에서 앵커 시설을 박아요. 총독부 같은. 그럼 사실 이런 앵커를 박으면 주변에 적산가옥이 생겨요. 그래서 지금 서촌 가보면 적산가옥이 아직도 있어요. 사실은 그게 다 적산가옥이 안 됐다는 게 사실 우리가 감사할 부분들이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 교외 지역에다가 문화주택단지라고 하는 걸 엄청나게 많이 만들려고 해요. 대표적인 게 후암동, 후암동이 원래 문화주택단지였어요. 그러니까 과거에 후암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일본인들이 많았거든요. 그다음에 어디를 개발하려고 했냐면 신당동이에요. 그리고 그거를 이어요. 남산주요 도로라고 해가지고. 그리고 지금 막 뜨고 있는 신당동부터 청구, 약수를 보면, 특히 신당동부터 청구동을 봤을 때 그 계획된 구역들이 되게 깔끔해요. 그거일제시대 때 구획한 거예요. 원래 거기가 적산가옥이나 문화주택이 들어갈 자리예요.특히 청구역 중심으로 해서 신당역까지 가는 서쪽 부분 보면 구획이 잘 정리돼 있어요. 그런데 그때의 계획은 뭐냐면 여기다 문화주택을 넣는 건데, 일제가 중일전쟁 들어가면서 돈이 없으니까 다행히 한옥들이 들어가게 됐어요. 그래서 청구역 주변으로 가시면 한옥들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 상황에 대해서 스토리로 풀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래서 당시의 상황이 우리의 현재에 주는 어떤 시사점, 그런 유의미한 것들, 재미있는 게 좀 남아 있습니다.
출판인이기도 했던 정세권
더: 정세권 선생님 연구하실 때 자료가 불충분했는데 그 빈 부분을 어떤 식으로 상상하면서 작업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김:제가 대단한 학자는 아닙니다만, 학자니까 우선은 추론을 했고요. 추론한 거에 대해서 데이터를 모아서 쓴 거죠. 다행히 이분이 사실은 출판인이었어요. 조선물산장려회의 기관지가 《실생활》 《장산》 이런 잡지였거든요. 잡지 편집인이 정세권 선생이에요. 정세권 선생이 사실은 출판인의 대표이기도 했어요. 저희가 그걸 다 리뷰를 했고요.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했어요.
제일 아쉽다고 하는 부분은 뭐냐면, 이분이 어디를 개발했다는 부분들에 대해서 유족의 증언하고 당시 신문에 분양 광고 했던 데를 통해 대충 추정을 했어요. 그런데 그 추정한 거가 다 그분이 한 건 아니에요. 그럼 데이터가 좀 잘 정리가 되면 제가 하고 싶은 건 뭐냐면, 과거 데이터들로 맨 처음에 누가 소유주였는지 알 수가 있거든요, 그걸 통해서 과거 그 지역에 정세권 선생 이름이 걸치거나 이런 부분들을 좀 더 확인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해서 다 알아봐야 되는 것이니까, 저희 같은 작은 연구실이 하기에는 좀 벅찬 부분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미싱된 부분들을 누군가는 해줬으면 좋겠어요.
앞선 ESG 경영 실천
더: 디벨로퍼, 민족자본가, 실천적인 지식인인 정세권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어떤 것인지요. 김: 그분의 족적을 봤을 때 첫 번째는 우선 그분이 민족자본가이자 사업가잖아요. 사업가로서 가졌던 어떤 인사이트라든지 사업의 경영 방식 같은 것들이 지금보다 훨씬 앞섰다고 생각을 하고요. 이런 해석도 가능할 것 같아요. 그분이 했던 게 ESG 경영 철학하고 거의 연관이 돼요. 예를 들어서, 그분이 금융을 제공했다고 했을 때 중류 이하의 계층은 집을 사기가 힘드니까 본인 회사에서 연부 또는 월부로 자금을 지원했다고 하거든요. 공짜로 준 건 아닙니다. 월부, 연부 상품을 냈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도 사실은 ESG에서 S죠. Social 파트가 될 수도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예를 들어서 그분이 낙향한 다음에 거기서 협동조합 같은 걸 만들려고 노력을 해요. 그런데 거기서 얘기하는 것들이 재미있는 게, 가구가 세 명 또는 네 명이 살 때 어느 정도 사이즈의 주택이고 뭐 이런 얘기를 해요. 그게 결국은 E예요. Environment예요. 그러니까 이분이 생각했던 부분들이 경영적으로도 굉장히 혁신적인 인사이트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ESG 경영과 비슷한 모습들을 보여준다는 게 굉장히 놀라웠죠.
두 번째는 사회를 보는 시선 같아요. 당시에 이분은 디벨로퍼지 물건을 파는 사람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조선물산장려운동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조선물산을 판매하는 거예요. 전혀 다른 인더스트리에 가서 그걸 한 겁니다. 전혀 상관없는 건데. 그럼 이분이 그걸 왜 했냐를 봐야 되는 거죠. 왜 했냐를 보면 조선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역량만큼 민족운동을 한 거예요. 그래서 어떤 재미있는 말씀을 하냐면, 당시에 변호사 선생을 찾아가 당신이 변호사고 법을 아니까 우리 상공업자하고 기업가들이 감옥에 안 갈 것까지만 우리가 이 운동을 할 수 있게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라는 얘기를 해요. 그것도 되게 힘든 겁니다, 사실은요.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던 어떤 사회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더:현상 공모 같은 것도 하셨잖아요. 그건 후학을 기르려고 한 거였을까요, 아니면 시민 참여를 유도하려는 의도였을까요. 김: 아마 시민 참여에 더해 집단 지성 같은 것들도 더할 수가 있었겠죠. 그러니까 조선일보와 건양사가 같이 한 건데, 주택 개량을 위한 건축안에 대해서 현상 공모를 한 것이 사실 굉장히 앞선 거죠. 현상 공모를 한 것 자체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고, 아니면 조선 집 같은 것들을 확장시키기 위해 여러 아이디어를 받아 그중에서 선별적으로 취합해가지고 새로운 거를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으니까요. 그 관점에서는 앞선 아이디어였던 것 같아요.
미래의 정세권에게
더: 누군가 미래에 정세권 같은 선생님이 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교수님은 어떤 점을 강조하시고 싶은지요. 김: 그분이 살 때가 되게 암울한 시점이잖아요. 예를 들어 당시에 기업가들은 일본계 은행에서는 대출도 제대로 안 나오는 상황이었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양극적인 상황이죠.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이 부자고 조선인은 상대적으로 가난한데, 식민 기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선인들은 더 가난해지는 상황. 극단의 양극화된 상황이었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이분이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조선인들을 위해서 어떤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그게 굉장히 실용적이었다는 거예요. 만약에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라고 하면, 미국이나 유럽 또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포퓰리스트들이 득세하면서 메시지 위주로 가요. 솔루션은 한 명도 얘기를 안 하면서.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이 굉장히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들한테 메시지를 전할 뿐만 아니라, 출판인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대안을 제시했다는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고요. 그런 부분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사는 집의 가치
더: 조금 원론적으로 우리가 사는 집이란 무엇인지, 집의 가치에 대해서 표현해주신다면? 김: 집이라는 게 다양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경제적 가치로서의 집도 존재를 하는데, 물론 이것도 되게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그것보다는 제가 봤을 때 집은 관계 형성의 장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주체적인 내가 있고, 혼자 있다가 누군가 와이프나 또는 부모님과 산다고 했을 때는 다른 사람과 사는 것이거든요. 1촌이건 2촌이건 간에. 이제 거기서 관계가 설정이 되는 거죠. 그런데 그 관계 형성이라는 게 사실 가족인데, 거기서 집단적 기억 같은 것들이 나타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럼 그 가치는 사실은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인 거죠. 그러니까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을 통한 기억, 그리고 그게 집단적인 기억이 된다고 했을 때 그 ‘가치’라는 것이 존재할 것 같고요.
두 번째는 건물로서의 집이라는 것도 주변하고 소통을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집이 허물어지고 아무도 케어를 안 한다고 하면 그 지역 자체가 황량해지는 것이거든요. 그 집 자체도 누군가의 활동을 통해서 지역하고 소통을 하고 연계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이 주는 가치라는 건 제가 봤을 때는 소통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시간을 통해서 겹겹이 쌓이는 어떤 집단적인 경험 같은 것들, 그게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여튼 그것이 주는 가치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우리나라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결국은 실용적인 거예요. 실용성. 그러니까 이분이 기업가잖아요. 기업가가 뜬구름 잡는 소리 안 하거든요. 기업가는 실용적인 얘기를 하고, 실용적인 메시지를 내고, 실용적인 대안을 내는 거예요. 이분이 제가 봤을 때 제일 기념적인 거는 뭐였냐 하면, 부동산이라는 게 사이클이 있어요. 그 사이클이 1920년대 극단적으로 나타나요. 1920년에 대폭등했다가 갑자기 대폭락해요. 반값으로. 그러다 다시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졌다가 또 올라가요. 특히 1920년대 초반 대폭락했을 때 이분이 어떤 식으로 비즈니스를 하냐면, 예를 들어 그때 집값이 400원이었다고 쳐요. 근데 그게 갑자기 300원, 200원까지 떨어지면 200원짜리, 170원짜리 집 이렇게 맞춰서 아주 싼 집을 지어요. 그러면서 대출금을 계속 갚아나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격이 오르면 그 170원짜리가 400원이 되니까 그때 돈을 버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이분이 했던 전략 같은 것들을 보면 굉장히 실용적이에요. 400원짜리 집을 지을 땐 잘 지었겠죠. 그런데 170원짜리 집을 지을 때는, 우리가 한옥을 가보면 서까래가 어떤 집은 두꺼운데 어떤 집은 굉장히 얇은 게 촘촘히 박힌 데들이 있어요. 그거는 시공비를 굉장히 낮춘 겁니다. 재료비를. 그런 식으로 짓는 거예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보면 여당이건 야당이건 정부건 간에 사람들이 원하는 레벨의 정책적인 대안에 그 디테일함이 안 나오고 있어요. 제 자랑이 아니고, 제가 2년 전부터 이 얘기를 했거든요. 공급이 부족할 거라고. 그러면 뭔가 나와야 해요. 예를 들어서 토지도 좀 더 사람들이 원하는 토지가 나와야 하고. 근데 이게 안 나온다는 건 결국은 리더십도 양쪽에 없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정책을 설계하는 능력이 있느냐에 대한 생각까지 가게 돼요. 그러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사람들 굉장히 똑똑하거든요, 인터넷을 다 보기 때문에. ‘어, 저기 저기 있는데 왜 안 나오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다음부터 이 사람들의 합리적인 결정은 뭐냐 하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거예요. 그럼 마켓이 더 왜곡돼요. 그래서 정세권 선생 같은 사람들이 주는 시대적 교훈이라는 거는 보다 더 실용적인 관점에서의 정책 같은 것들이 나와야 한다는 거예요.
더: 이번에 나온 개정판 《건축왕 정세권》을 소개해주시다면요? 김: 많은 분들이 정세권이라는 분에 대해서 조금은 아시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2010년 초반부터 2017년까지 리서치했던 걸 바탕으로 다시 내게 됐어요. 내용 자체는 그분이 활동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20세기 초반 도시의 도시사적 측면, 1920년대와 1930년대 경성이 어떤 상황이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고, 그걸 알아야지 이분의 활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분의 활동, 그리고 그분이 민족운동가로서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어학회에 후원했던 부분 같은 것들을 정리했습니다.
더: 교수님의 연구 분야와 활동 영역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 같습니다.
김: 많은 분들이 저를 부동산 주택 관련 리서처로 생각을 하는데 물론 그것도 좀 하고요. 그리고 글로벌 오피스 마켓 분석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주로 많이 하는 활동은 사실은 부동산 쪽은 아니고 사회 혁신과 관련된 쪽이에요. 그러니까 사회적 기업들 그리고 소셜 벤처들의 생태계를 어떻게 우리가 연구하고 그 부분을 좀 더 활성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부분들이죠. 그래서 제가 서울대학교에 2018년, 2019년에 사회혁신전공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다른 두 교수님들이랑 같이 사회혁신전공에서 사회적 기업가 또는 소셜 벤처 그리고 여기에 투자하는 임팩트 투자 회사들을 교육시키고 이거를 네트워크화 하는부분들에 제가 좀 더 많이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실은 저희가 ‘아시아 퍼시픽 임팩트 네트워크’라고 해서 한국을 중심으로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일본, 몽골, 이 정도를 묶는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해요. 사회 혁신 네트워크를요. 그게 사실 지금 필요한 단계이기도 하고요.
실용적 가치 실현과 소통
더: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김: 지금 사회가 흐르는 게 전 세계가 동일한 것 같아요. 경제적으로 양극화고요, 정치 사회적으로 극단화예요. 그러면 이게 언제까지 이렇게 갈 거냐. 누군가는 이거를, 포용은 모르겠습니다만 중간자적 입장에서 이들의 소통을 돕고 대화를 일으켜서 중간자적으로 가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은 좀 들어요. 그래서 시대를 뚫는 어떤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 시대정신)라고 할까요? 그거는 뭐냐 하면 보다 실용적이 되어야 하고, 보다 소통하면서 타협하는 부분들이 좀 나타나야 할 것 같아요. 너무 극단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제가 바라보는 사회적 가치는, 현재 단계는 그렇습니다.
김경민_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지리학 학사, UC 버클리 정보시스템 석사를 거쳐 하버드대학교에서 도시계획, 부동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도시계획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보스턴 소재의 상업용 부동산 리서치회사 PPR에서 오스피 가격 예측 모형을 구축하고 글로벌 부동산을 연구했다. 저서로는 빅데이터로 부동산 시장을 해부한 《부동산 트렌드》 시리즈와 《2020 부동산 메가트렌드》, 도시개발의 방향성을 제시한 《도시개발, 길을 잃다》, 익선동의 가치를 재조명한 《리씽킹 서울》, 북촌을 개발한 기농 정세권을 연구한 《건축왕 정세권_집을 지어 나라를 지킨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 등이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부동산 전문가로 EBS 〈비즈니스 리뷰〉 〈클래스e〉, MBC의 〈백분토론〉, KBS 〈이슈 Pick, 쌤과 함께〉, tvN 〈미래수업〉 등에 출연했다. 또 부동산 정보 공유를 위해 오픈데이터 플랫폼 ‘부동산GPT’를 개발 중이며 유튜브 채널 ‘김경민의 노트’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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