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독서와 연기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독서와 연기 행위의 공통점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고 본다. 두 행위 다 인간의 삶이 담긴 글의 내용을 읽거나 표현하는 부분이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좋은 독서와 좋은 연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떠오르는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담긴 글과 연기는 좋은 지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Q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영화 중 꼭 출연해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가.
A 1952년 작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님의 〈이키루(살다)〉라는 영화에 출연해보고 싶다. 주인공이자 말단 공무원인 와타나베 겐지는 위암 선고 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성찰하며 살아간다. 가령 그는 이전에는 자본주의 안에서 생존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아무 감정 없는 회색빛 삶을 살다가, 자신에게 곧 죽음이 찾아올 것임을 깨닫고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사는, 윤리적인 질문을 가진 모럴리스트의 삶을 시작한다.
극의 끝자락에 다다라서는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선(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의 죽음을 위암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된 것이 아닌 타인을 향한 숭고한 희생을 가진 죽음의 이야기로 승화시키며 영화를 끝맺는다. 고립된 현대사회에서 부정적인 의미로만 불리고 은폐되는 ‘죽음’이라는 관념을 오히려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이자 타인을 위한 은유로서 질문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살다〉의 와타나베 겐지 역을 배우로서 연기하며 표현해보고 싶다.
Q 어렸을 때 읽었던 책 중 특별히 기억나는 책이 있다면?
A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집 작은 방 책장에는 위인전 세트들이 꽂혀 있었다. 그중에서 재밌게 읽었던 책이 하나 어슴푸레 떠오른다. 김정호 지리학자님에 대한 글과 그림이 담긴 《대동여지도》라는 동화책이었는데, 위인전이었다. 오래되어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린 나에게도 꽤 재밌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까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그 많은 위인전들 중에서 왜 김정호라는 지리학자의 이야기가 지금의 나에게 떠올랐을까. 아마 당시 그 이야기가 가진 힘이 신기하게도 어린 내게 전해졌었나 보다. 나는 김정호라는 사람이 조선시대에 나라를 위한 지도를 만들려고 고군분투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내용이 참으로 숭고하게 다가왔다. 지금 같은 세상이야 스마트폰을 사용해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쉽게 자신의 위치를 식별하는 게 가능하지만, 그 시대엔 보편화된 지도 한 장 없이 서로에게 물어 물어 수동적으로 지리를 확인하고 돌아다니지 않았나.
국가에서 지도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없을 때, 김정호라는 위인은 스스로 나서서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중적인 지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전국을 답사하며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도중에 여러 시련에 부딪칠 때마다 김정호 위인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한 선인이 “도대체 이 외진 산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자 김정호 선생님은 “대장부가 하려는 일을 어찌 경솔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하며 추운 산 속에서 꿋꿋하게 대동여지도를 그려나갔다고 한다.
도대체 대장부의 길은 무엇이기에 그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 이기고 자신을 희생하며 세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야 했던 것일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타국에 정보를 판다는 오해까지 받아가며 딸과 옥살이를 하게 된 그는 결국 대동여지도를 완성시켰고, 훗날 그분을 버린 나라를 위해 지도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세인들은 몰라도 자신이 가야 하는 길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자. 나에게 김정호 선생님은 그런 분이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작은 방 안에서 무릎 꿇고 동화책을 읽던 어린 내 모습이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인간의 진실한 행위를 그날의 어린 나는 왜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아까 첫 질문과 맞닿는 것 같다. 인간에 대한 깊은 고찰이 담긴 이야기여서, 좋은 글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Q 누군가를 ‘참 좋은 배우다’라고 느꼈던 순간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A 드라마 〈반의반〉에 함께 출연했던 이정은 선배님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이정은 선배님을 그때 처음 뵀는데, 〈기생충〉으로 막 상을 받고 오셔서 나 또한 그 영화의 팬으로서 존경 어린 눈빛으로 선배님을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촬영했던 선배님의 모습은 ‘참 좋은 배우다’라는 말의 표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배우라 함은 배우의 본질인 연기를 잘 하며, 사람 냄새가 나는 배우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선배님은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무리 작은 상황과 작은 동작이라도 철저하게 준비하고 연습하셨는데 그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식사 자리에 모여서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는 일상적인 장면이 있었는데, 선배님은 “만약 내 역할로 이 숟가락을 들면 어떻게 먹었을까?” 하면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촬영 직전까지 연구를 하시는 거다. 그런 모습이 배우로서 참 존경스럽고 배워야 할 지점이라고 느꼈다. 또 대기실에서는 후배들에게 크게 격이 없으셨다. 정은 선배님은 70년생(53살), 그러니까 나랑 19살 차이가 나는데도 아주 편안하게 내 역할의 이름을 불러주시면서 “창섭이는, 창섭이는” 하며 말을 걸어주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선배님과의 촬영이 끝나고 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배우로서 나 자신이 나태해질 때마다 가끔씩 정은 선배님의 모습을 떠올려보곤 한다. 좋은 배우이자 좋은 선배님으로서 그 순수한 모습들이 나에겐 겸손과 미덕을 배울 수 있는 가르침이 되었다. 아마 이제는 꽤 오래되어서 나를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정은 선배님과 함께 작품을 할 수 있어 정말 영광이었고 따뜻하게 대해주신 점 다시 한 번 감사한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참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정은 선배님.
Q 연기에 있어서 솔직함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연기에 있어서 솔직함이란? 이 질문은 나에게 정말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사실 나도 연기에 있어서 그 솔직함이라는 것이 평생 찾아봐야 할 숙제 같은 부분이어서 딱 한 문장으로 짧게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부족한 내가 모호한 답변으로 대신하자면 ‘사랑하는 것을 향한, 대상에 대한 끝없는 진실한 마음’ 정도가 아닐까 싶다. 너무 거창하게 표현했나? 하지만 뭐랄까, 내게 있어서 연기를 대할 때만큼은 진실하게 또한 진지하게 갖고 싶은 인간의 그윽한 태도가 있다.
어느 때는 연기를 할 때 ‘이 순간의 진실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곧 죽어도 좋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적 상황에 임한다. 배우는 그 태도 안에서 모르면 모르는 대로, 혹은 알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와도 확신에 차지 않고 연기적 행위가 실제와 같이 진실된 행위가 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찾아보는 과정 속에 있어야 하고, 그것이 배우의 솔직함이 아닌가 싶다. 결국 배우로서 타인이 된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한 역설이기도 하니까. 나는 결국 타인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을 향해 끝없이 다가서보는 것, 그 과정 자체가 연기의 전부고 연기를 하는 배우로서의 진지한 태도라고 여겨진다.
내가 좋아하는 한 문장이 떠오른다. 지금은 작고하신 황현산 작가님의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귀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바로 그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결코 멈추어지지 않는다.’ 배우로서 도달할 수 없는 타인을 향한 발걸음, 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그 발걸음을 찾아보려 한다. 인간이라면 한 번쯤 타인을 향한 솔직한 발걸음을 해본 적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은 인간의 소중한 감정이 담긴 발걸음일 것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솔직함을 담아 걷다 보면 언젠가 타인으로 향하는 진실한 길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Q 영화에 빠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A 사실 연극을 참 좋아했다. 희곡도 좋아했고, 특히나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지금도 참 좋아한다. 〈갈매기〉라는 작품을 10년째 다시 보고 있다. 인간의 모순적인 면들이 희극적이고 참 재밌다. 연극이 하고 싶어 대학교에 갔고 아주 우연히 영화과 친구들과 단편영화 작업을 하게 됐는데 그 작업들이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왔다. 연극과는 또 다른 지점을 느낀 거다.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서 사실적으로 연기하면서 인물을 구축해나가는 부분이 짜릿했고, 퍼즐의 조각을 맞춰가는 것처럼 재밌었다. 한 씬, 한 씬 차곡차곡 퍼즐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그림이 완성돼 있는 거다. 신기한 건, 이전에는 분명 독립된 하나의 장면들이었는데 나중에 극장에서 편집된 영화를 보면 선처럼 연결되어 있는 거다. 선도 현미경으로 가까이 들여다보면 하나하나의 점일 뿐이잖나. 근데 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까. 바로 그 촘촘한 연결 덕분이다. 빈틈을 매우고 있는 촘촘한 연결, 난 그게 인간과 인간의 깊은 감정 교류라고 느낀다. 또한 연극은 공연한 직후 사라지는 유한한 것이지만, 영화는 화면으로 보존되어 나중에 극장 스크린이나 모니터로 볼 수 있는 생산적인 부분이 있고 그것이 낯설지만 감사하게 느껴졌다.
나이가 들면서 거장 감독님들의 여러 영화 작품들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한국 감독님들로는 이창동 감독님, 홍상수 감독님을 참 좋아한다. 그분들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내 인생이 일정 부분 구원받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영화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한데 혹시나 나이가 들어서 내가 배우로 참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인생이겠다, 훗날 죽기 직전 후회하지 않고 갈 수 있겠다, 뭐 그런 혼자만의 상념이 든다. 살면서 느낀 현실의 냉정함이나 차가운 환경들이 그분들의 영화 안에서는 따뜻한 시선이자 깊은 위로로 느껴진다. 그 영화들을 보면서 인간으로서 참 많이 위로를 받았다. 덕분에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바라보고 그것을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깨달을 수도 있었다.
결국 좋은 연극과 영화는 형식은 다르지만 교차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한 존재를 따뜻하게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것’, 나는 그런 이야기를 담은 영화나 연극의 아름다운 시선이 참 좋다. 언젠가 내가 그 아름다운 시선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기도 하다. 그러려면 더 많이 배우로서 성장해야 할 테고. 그럼 오늘도 좋은 영화 한 편에 푹 빠져서 인간으로서 보다 성장해보고 싶다.
Q 드니 디드로는 “훌륭한 배우라면 판단력이 좋아야 한다”고 했는데, 배우에게 필요한 판단력에 대해 말해 달라.
A 아, 또 어려운 질문. 드니 디드로의 《배우에 관한 역설》에 나온 이야기 같기도 한데, 만약 그 책이 맞다면 서점에서 읽어봤다. 아쉽지만 소장하고 있지는 않다. 판단력이라, 판단력 자체의 정의는 어떤 일을 행할 때 판정할 수 있는 능력인 것 같은데, 문맥의 앞뒤를 정확하게 읽어보고 이 질문에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가 모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답변을 한다면 ‘배우는 자신의 판단력을 믿어야 한다’라는 정도로 비틀어서 답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야기라는 주어진 상황 안에서 배우가 배역으로서 어떤 행위를 해야 할 때 ‘과연 그 판단력이 믿을 수 있을 만큼 진실한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가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이성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은 행위라면 그 행위를 배역으로서 밀고나간다고 해도 결국에는 진실하지 않으며 관객들에게 가닿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작은 진실이 무너지면 큰 진실은 소용없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배우라면 자신의 연기에 있어서 작은 부분도 그 판단을 섣부르게 혹은 중립적인 태도로 미미하게 기다려서는 좋은 연기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연기는 특히 직관과 이성적인 부분이 교차하는 작업이라고 본다.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는 포기하지 않고 진실함을 추구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배우는 좋은 판단을 위해 그 상황에 끊임없이 머무르려고 시도한다.
그 순간에 머물기 시작하면 큰 그림보다는 작고 디테일한 상황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나의 경우 내 몸을 맡긴 채 믿음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가 찾아온다. 그러면 순간 그 상황이 실제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 믿음에 신경을 쓰기도 전에 이미 인물로서 행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나는 바깥에서는 이성적이고 차갑게 접근하되, 안에서는 직관적이고 충동적으로 밀어붙이는 연기 태도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어느 순간 그 모든 부분들에 대해 배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내린 판단이 믿을 수 있는 좋은 판단이 되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이 판정을 믿고 연기적 행위에 모든 것을 집중할 수 있는가? 아마 좋은 판단력을 가진 배우고 확신을 가진 상태라면 자신 안의 진실한 충동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리라 믿는다.
Q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나.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A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라는 책을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요새는 어딜 가든 하나의 보편화된 가치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한다. 바로 돈이다. 그 돈을 향한 인간의 멈추지 않는 욕망과 쾌락만이 점점 극대화되는 것 같다. 이런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놓치는 지점이 없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인간이 한 가지 단일한 가치에만 집중할수록 인간 존재, 즉 그 실존에 대한 인간적 질문들은 더 멀어질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절대시하는 돈과 더 많은 안락함, 쾌락 등이 인간에게 전부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결국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들을 맹신하며 그것을 얻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듯 믿고 살고 있지만, 결코 메워지지 않는 욕망의 크기는 인간을 더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니까. 이런 혼란의 시대에 나는 한 인간으로서 진정 소중한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느낀다. 이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하더라도, 남은 시간에는 더 이상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오른쪽으로만 가다 보면 왼쪽으로 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결국 잊어버리고 만다. 나는 어느 한쪽 방향만이 아닌,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삶을 꿈꾼다. 때론 멈춰서 그 자리에 머물러 나 자신 안에 집중을 해보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건 끝없이 지나치는 이 순간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인간적 삶의 시간들뿐이라고 느낀다. 인간은 결국 누구도 피할 수 없이, 다 죽으니까.
그런 깊은 고민들이 생기던 시기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백치’라는 제목을 보고 솔깃했다. 어떤 책이기에 제목 자체가 백치일까? 그리고 작가가 《죄와 벌》의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시선이 안 갈 이유가 없었다. 간략한 내용을 찾아보니 백치는 주인공을 부르는 세인들의 시선인데, 이 타락한 시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주인공을 오히려 사람들은 백치라고 부르며 비웃음거리로 만든다. 간단히 이런 이야기를 가진 소설이었다.
요즘같이 인간의 삶 자체가 더욱 고립되고, 진실한 감정보다는 경쟁과 화려함에 짓눌려 결국 허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표면적인 세상에서 인간은 더 빠른 속도로 고독해지고 있는 것 같다. 서로를 향한 깊숙한 교감의 터치는 잃어버리고, 안개 속에서 희미한 존재가 되어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채 발버둥치고 있는 거다. 그 안개 속에서 ‘백치’라 불리는 한 햇살에 관한 이야기가 이 탁한 시야를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사랑은 무엇일까, 희망을 품고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Q 마음이 답답할 때 찾게 되는 장소가 있나.
A 서점과 자연을 찾는다. 마음의 해답을 얻으려고 그런 장소를 찾는 것은 아니다. 살면서 황폐해진 마음에 작은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랄까. 서점에 가면 우선 좋아하는 책을 고르고 작가의 정성스러운 글들을 읽는다. 한 작가가 정성들여 쓴, 노력의 시간들이 담긴 글귀들이 전달되면 나의 상념이나 혼란들 사이에 일정 부분 틈이 생긴다. 그러면 그 균열된 감정들을 느끼며 자리를 뜬다. 그리고 하염없이 걸으며 가까운 자연을 찾는다.
자연은 내게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고 나 또한 자연에게 원하는 것이 없으니 참 좋다. 온전한 상태로만 존재하면 되는 이 평온함이 나에게 안도감을 선사한다. 아무 상념이 없는 무의 상태에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현재를 붙잡고 머물고 싶어지는 것이다. 시간은 어쨌든 계속해서 지나가고 있으니까. 너무나 많은 것을 원하며 상념 속에서 삶을 허비했던 나 자신에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순간을 찾으러 자연을 찾아온 이 순간이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욕망이라는 검은 피로 가득 채워진 나는 그곳에서 진정한 자신을 만난다.
그리고 나를 채웠던 것들을 서서히 내려놓고 얼어붙은 마음을 서서히 녹여보는 시도를 하는 거다. 가만히 그곳에 머물며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러면 갑자기 그 순간의 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바깥의 어떤 것들이 아닌 나 자신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내 발걸음, 바닥의 촉감, 거친 호흡 소리, 땀과 온기, 빛의 대비들, 물결과 햇살이 닿는 지점, 우연히 만난 생존을 위해 먹이를 찾는 오리 떼들의 역동성,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는 연령대가 다양한 사람들의 힘찬 움직임,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등. 그리고 곧 사라지고 다시 피어날 모든 생명과 자연을 바라보며 마침내 안도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이곳, 지금 이 순간에 머물고 있으니까.
눈앞에 보이는 살아 있는 아름다운 것들에 매료되어 무언가를 쓰고 싶고, 보고 싶고, 사랑하고 나누는 일을 하고 싶고, 자유로운 나 자신이 되고 싶은 그런 염원을 품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조금 더 간직하고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이제 이 낯선 삶이라는 사막에서 인간으로서 다시 용기를 내보려 다짐하는 것이다.
Q 사랑하는 사람과 꼭 함께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A 아주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겠는데, 그 사람의 늙음을 죽는 순간까지 함께하고 싶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나의 늙음을 그 사람도 함께해야 한다. 물론 서로가 사랑하고 허락한다는 가정 하에. 가능하다면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요즘 세상에는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외로운 자신을 위한 수단 혹은 욕망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어떤 고통도 함께 나누며 슬픔을 다독여줄 때 서로에게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얼마 전 사랑했던 누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함께 있어주지 못한 지난날이 참으로 가슴에 사무쳤다. 이별 후에 그리움은 아쉬움으로만 가득하다. 언젠가 우리는 삶과 이별을 할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그 숙명을 맞이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 그 사람 옆에서 그 존재를 그윽하게 들여다보고 싶다. 떠나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해 야속하겠지만, 덕분에 소중함이 느껴지는 그 사람의 빛나는 한 해, 한 순간들을 내 가슴에 온전히 담아보고 이 낯설고 외로웠던 세상에서 힘이 되어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모든 추억의 파편들 속에서 아름다운 작별을 고하고 싶다. 그리고 만약 시간이 허락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세상에 하나뿐이었던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싶다. “아주 긴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의 사랑 덕분에 제 삶의 고통은 참 견딜 만했습니다. 또 만나요, 우리. 감사했습니다.” 이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꼭 해보고 싶은 일이며 작은 바람이다.
강봉성이 추천하는 책 다섯 권
《데미안》(헤르만 헤세)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무의식과 성장을 다룬 헤르만 헤세의 장편소설.
《노인과 바다》(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
망망대해에서 이루어지는 노인과 크고 힘센 청새치의 대결,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의 분투를 그린 소설.
《이방인》(알베르 까뮈)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충격적인 첫문장으로 시작하는 실존주의 소설의 대작.
《갈매기》(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현대 단편소설의 아버지이자 뛰어난 희곡 작가 체호프의 대표 희곡.
《불안의 서》(페르난두 페소아)
포르투갈의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페르난두 페소아가 쓴 에세이집.
강봉성_배우
배우. 모여서 글을 쓰고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창작집단 '씨네봉 몽상가들'의 리더다. 배우로 활동하며 브런치 플랫폼에서 '이방인의 낯선 언어'라는 표제로 글을 쓴다. 세상을 살면서 문득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빈 공간이 생길 때는 씨네봉 몽상가들에서 각본을 쓰며 영화를 연출하고 있다.
물건에 치여 사는 삶, 왜 문제인가?지금까지 2천 개의 집을 바꾼 대한민국 최고의 정리 컨설턴트 정희숙의 똑똑한 정리 노하우 대공개!MBC 나 혼자 산다 스페셜 출연, 그리고 화제의 유튜브 채널 ‘정희숙의 똑똑한 정리’를 운영중인 정희숙. 그녀가 들려주는 집 정리의 기본 원칙, 특히 책 정리의 노하우와 집 정리에 담긴 애틋한 사연도 들어본다. 정리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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