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아이돌 팬클럽은 한 피아니스트에게서 탄생했다. 그 이름은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 클래식계의 아이돌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와 ‘마니아’를 합쳐서 나온 이름이다. 그리고 리스트가 간택한 내향인이 있었으니, 바로 프레드릭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이다. 쇼팽은 공식 연주를 30번밖에 하지 않았던 극내향인이었다. 프레드릭 쇼팽과 프란츠 리스트, 이 둘을 글렌굴드의 반려 금붕어로 생각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두 인물은 라흐마니노프, 드뷔시 등 다양한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둘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이번 호에서는 이 둘의 우정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리스트의 탄생
프란츠 리스트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1811년 10월 22일, 헝가리에서 프란츠 리스트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부모는 리스트의 특별함을 단번에 알아챘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피아노 개인 교습을 시켜주었고 리스트는 짧은 기간에 모든 것을 흡수했다. 리스트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자 아버지는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를 무작정 찾아간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시작할 때 누구나 연습하게 되는 그 체르니다. 아버지는 체르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여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리스트의 스승들
체르니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리스트는 아홉 살의 나이에 빈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리스트의 심상치 않은 재능을 알아본 체르니는 자신의 스승 베토벤(Ludwig Beethoven, 1770~1827)에게 리스트를 데려간다. 귀가 들리지 않아 성격이 괴팍했던 베토벤은 신동이라 불리는 아이들의 연주에 신물이 나 있었다. 하지만 체르니의 반복된 설득 끝에 베토벤은 리스트의 연주를 듣게 되고, 연주가 끝나자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소년의 앞날을 축복했다고 전해진다.
파리로 향하다
당시 파리는 세계에서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이 모이는 중심지였다. 리스트는 파리음악원에 지원하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한다. 하지만 리스트의 뛰어난 피아노 실력은 입소문을 탔고 공연 데뷔로 이어진다. 1824년 3월 7일, 그는 첫 데뷔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고작 열두 살의 나이였다. 파리를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린 리스트는 연주 여행을 다니며 영광의 나날을 보냈으나, 그는 구경거리가 된 듯한 자신의 처지에 회의감을 느꼈다. 정서적 안정을 위해 종교에서 위안을 찾은 리스트는 아버지에게 신학교에 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는 예술을 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지병이 악화되어 쓰러진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열다섯 살 소년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파리로 돌아간다. 리스트는 우울증을 겪으며 공백기를 가졌고, 파리에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리스트는 유년기 동안 정식으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이 기간 동안 성경, 철학, 문학 공부에 매진하며 지적 갈증을 채운다. 이러한 지적 성장은 순전히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쇼팽의 탄생
19살 쇼팽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리스트가 태어날 무렵, 폴란드에서는 걸음마를 떼고 피아노 건반을 하나하나 누르던 소년이 있었다. 작은 키, 마른 체구, 금발에 오똑한 코. 이 우아한 외모의 아이는 엄마가 자장가를 불러주면 경기를 일으키듯 울어댔다고 한다. 부모가 아이의 청각이 유난히 예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쇼팽은 틈 나는 대로 다양한 소리를 탐구했고, 정규적인 음악 지도 없이 모든 기초를 혼자서 익힌다.
재능을 인정받다
아들의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뒤늦게 알아챈 쇼팽의 부모는 급하게 선생을 찾으러 다녔다. 마땅한 선생을 찾지 못하자 결국 지브니라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찾아가기에 이른다. 지브니는 모범적인 스승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쇼팽은 틀에 박힌 연습곡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었고, 독립성을 가진 채로 뛰어난 즉흥 연주 실력과 독창성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꼬마 쇼팽이 처음으로 공식 연주회를 가졌을 때, 어머니는 병약한 딸을 돌보느라 연주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대신 그에게 폭이 넓은 레이스 깃을 상의에 달아주었다. 저녁 연주는 성공으로 끝났고, 바르샤바 신문은 제2의 모차르트가 폴란드에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사람들이 무엇을 제일 좋아하더냐고 묻자 쇼팽은 수줍게 “어머니의 새 레이스 깃을 가장 좋아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스물다섯 살의 쇼팽(출처: 위키피디아)
쇼팽의 첫사랑
쇼팽은 열아홉 살이 되어 바르샤바음악원에 입학하고, 성악 전공생으로 재학 중이던 콘스탄차 그와드코프스카를 만난다. 쇼팽은 여섯 달 동안 그녀를 매일 보았고, 그녀와의 사랑을 매일 밤 꿈꿨다. 쇼팽이 그의 음악원 동기 티투스와 나눈 편지에는 한 여자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기록들로 넘쳐난다. 쇼팽은 자신이 죽은 후에 시신을 화장한 재를 그녀의 발치에 뿌렸으면 좋겠다고도 적었다. 쇼팽은 콘스탄차를 위해 피아노 협주곡 F단조의 아다지오 악장을 썼고, 그녀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연주회를 기획했다. 쇼팽 본인이 직접 피아노를 치며 자신의 마음이 콘스탄차에게 가닿기를 바랐다. 협주곡에는 누군가를 멀리서 바라보는 소년의 수줍음, 그리고 전하지 못한 마음으로 인한 불안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끄럼 많은 내향인 소년은 그 간절한 마음을 직접 전달하지 못했다. 결국 쇼팽은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바르샤바음악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해외 연주 여행을 위해 바르샤바를 떠나 빈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쇼팽은 자신의 조국이 러시아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쇼팽은 폴란드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를 자책했고, 혁명 세력에 합류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접고 파리로 향하게 된다.
쇼팽 에튀드
쇼팽을 대표하는 여러 음악들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그가 작곡한 에튀드를 꼽을 수 있겠다. 에튀드는 ‘연습곡’이란 뜻으로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치는 ‘하농‘, ‘체르니’를 떠올릴 수 있겠다. 하지만 쇼팽은 그런 단순한 음계 누르기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고, 그 안에서는 다양한 감정이 느껴진다. 쇼팽은 조국의 함락 소식을 듣고 난 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마음과 콘스탄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자신의 연습곡 모음집에 포함된 곡으로 〈이별의 곡〉을 작곡했다. 쇼팽은 이 곡을 두고 본인이 작곡한 곡 중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말했다.
예술가들의 중심지 살롱
쇼팽과 리스트가 활동하던 1800년대는 콩쿠르가 없었다. 아무나 공개 연주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살롱은 예술가들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또한 살롱은 여성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의견을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살롱니에르(Salonniere)라고 불렀고, 그들의 연애사는 고전문학이 되어 교양과 지성을 가진 토론으로도 이어졌다. 살롱은 시 낭송과 마술쇼, 그리고 해부 실습까지 진행되며 다양한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소통할 수 있는 만남의 장이 되었다. 나이 차가 많은 남성들과 맺은 계약 결혼으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대부분의 살롱니에르들에게 리스트의 수려한 외모와 피아노 실력은 자극적인 도파민이 되어주었다.
리스트는 스물한 살이 되어 아델르 라프뤼나레드 백작부인을 만나게 된다. 순진한 백작은 리스트를 알프스에 있는 자신의 성으로 초대했고, 덕분에 리스트와 아델르는 추운 겨울 알프스의 성 안에서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아델르가 열네 살 연하를 만난다는 스캔들은 파리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모두가 그 잘생긴 젊은 남자를 보기 위해 살롱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리스트는 위풍당당하게 입장해 그의 마성적인 매력을 뽐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잘생기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무시무시한 피아노 실력은 모두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리스토마니아의 탄생
쇼팽에게 에튀드가 있다면, 리스트에게는 초절기교 연습곡이 있다. 듣기에 아름다운 선율을 드러내는 쇼팽의 에튀드와는 다르게, 기교적인 과시를 즉각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시적인 상상력을 일으키는 12개의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스트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단숨에 그에게 매료되었다. 리스트의 연주회 때마다 그를 따라다니는 팬클럽이 만들어졌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는 그들을 ‘리스토마니아’, 즉 리스트에 광적으로 미친 사람들이라 불렀다. 리스트가 연주를 끝낸 뒤 땀을 닦고 난 손수건을 관객석에 던지면 사람들은 그 손수건을 가지기 위해 난투극을 벌였고, 우연히 그 손수건을 손에 쥐게 된 사람들은 곧바로 기절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리스토마니아들은 리스트의 연주 스케줄을 알아내 그가 가는 공연장을 찾아다녔고, 그가 묵는 호텔 방에 침입해 목욕물을 훔치기도 했다. 리스트는 사람들의 이런 광적인 반응을 즐겼고, 대중들에게 쇼맨십으로 응답했다.
당시에 음악 공연은 여러 연주자들이 순차적으로 연주하는 공연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리스트는 다른 연주자들 틈에 끼어서 연주하기보다 개인 기량을 맘껏 뽐낼 수 있는 단독 공연을 열게 된다. 그 형식은 지금의 ‘리사이틀’, 즉 독주회의 시초가 된다. 또한 당시에 피아니스트들은 청중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연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뛰어난 외모와 피아노 연주 실력을 같이 보여주고 싶었던 리스트는 과감히 피아노를 90도 회전시켰다. 연주자의 등과 손만 보던 관객들은 손과 옆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이 배치는 지금 피아노 리사이틀의 표준적인 배치가 되었다.
플레옐 살롱에서 열린 쇼팽의 데뷔 연주회 프로그램 노트 출처: 쇼팽, 그 삶과 음악
파리에서 만나다
1831년 12월 7일, 슈만이 창간한 음악 전문지 《음악신보》는 천재가 탄생했다는 기사와 함께 쇼팽의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파리에서의 데뷔 기회를 얻게 된 쇼팽은 1832년 2월 26일, 플레옐 살롱에서 자신의 변주곡과 협주곡을 연주했다. 객석에는 프란츠 리스트가 있었다. 연주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리스트는 쇼팽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봤다. 둘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전통 음악을 좋아했고,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리스트는 쇼팽을 “무엇이든 내줄 것 같지만 자기 자신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는 사람”이라 말하며 고양이 같은 쇼팽에게 빠져들었고 그의 음악을 경외했다. 리스트는 저돌적으로 쇼팽에게 다가갔고, 쇼팽은 천천히 그의 마음을 열며 그들의 우정은 시작된다.
테오도어 호제만의 〈콘서트 홀에서〉. 자신의 연주를 과시하는 리스트. 관객석에는 혼수상태에 빠진 여성이 보인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우정이 있다. 그중에는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보고 끌리는 관계도 있지만 서로 다른 결을 통해 매력을 느끼는 관계도 존재한다. 프란츠 리스트와 쇼팽의 우정은 클래식 예술사에서도 보기 드문 온도차를 가진 관계였다. 한 사람은 대중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고, 다른 한 사람은 소수의 청중 앞에서 가장 내밀한 감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같은 악기를 두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던 이들의 차이는 시간이 흐르며 또 다른 긴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다음 글에서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의 우정을 키워나갔는지, 또한 어떻게 관계가 틀어졌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안은혁_작가, 영화 감독
리스토마니아, 방구석 클래식 애호가. 클래식과 영화를 둘러싼 인간의 태도를 관찰하고 기록한다. 가려진 정서가 오래 기억될 수 있는 방식을 살피며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주변인들에게 본인이 알고 있는 유명 캐나다인을 물어보면 대부분 저스틴 비버와 레이첼 맥아담스, 한 발 더 나아가 짐 캐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면 한 명의 캐나다인을 더 알게 될 것이다. 바로 토론토 출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다. 피아노와 의자굴드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다. 학교에서 구토를 자주 했으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
1995년 늦가을, 나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었다. 계절의 영향도 있겠지만 당시 바르샤바의 색채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오랜 동안 소련의 영향 하에서 서구와 교류가 없던 공산권 국가의 수도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스산함, 경직된 분위기를 강하게 느꼈다. 아니, 처음 디뎌보는 (구)공산권 땅이었기에 내가 경직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머릿수건을 쓴 할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글귀는 출처를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마치 늘 듣던 유행가 가사처럼 익숙하다. 《데미안》의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아는 이라면 그는 아마도 십대에 치러야 할 통과의례를 거쳤을 것이다. 그 통과의례는 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