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렘병원 맞은편에 낡은 벽돌 건물이 한 채 있었다. 뉴욕 공립도서관 135번가 분관. 인종차별이 공기처럼 당연하던 1930년대 뉴욕에서, 이 작은 도서관만큼은 흑인 사서가 카운터에 섰고, 흑인 아이가 아무 눈치 없이 책상에 앉을 수 있었다. 훗날 20세기 미국 문학의 가장 날카로운 목소리가 될 한 소년이, 매주 서너 번씩 이곳을 드나들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이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뭐든 읽어라.”
볼드윈은 1924년 8월 2일, 할렘병원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병원 건물은 훗날 숌버그 흑인문화연구센터(Schomburg Center for Research in Black Culture)가 들어서는 터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삶의 출발부터 도서관과 그렇게 붙어 있었다.
집안 형편은 빠듯했다. 아버지는 독실하고 엄격한 침례교 목사였고, 어머니는 여러 아이를 먹여 살렸다. 어린 볼드윈이 혼자 밖에 나갈 수 있도록 어머니가 허락한 곳은 사실상 135번가 도서관 한 곳뿐이었다. 집도 아니고 교회도 아닌, 도서관이 소년의 바깥 세계였다.
그 공간에서 볼드윈은 글의 맛을 익혔다. 중학교 시절, 볼드윈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 명의 교사가 나타났다. 할렘 르네상스의 대표 시인 카운티 컬런(Countee Cullen)은 프랑스어 수업을 가르치며 훗날 볼드윈이 파리로 떠나는 꿈의 씨앗을 심었고, 하버드 출신 수학 교사 헤르만 포터(Herman W. Porter)는 볼드윈을 42번가 공립도서관으로 데려가 조사 보고서 쓰는 법을 가르쳤다. 이 첫 번째 글쓰기 과제가 훗날 볼드윈 최초의 발표 에세이 〈할렘—그때와 지금(Harlem—Then and Now)〉이 된다. 소년 작가가 활자로 세상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1930년대 뉴욕공립도서관 분관 사진 (이미지출처: https://www.nyclgbtsites.org)
두 개의 도서관, 두 가지 감정
볼드윈에게 도서관은 하나가 아니었다. 두 곳, 두 가지의 전혀 다른 감정이 있었다.
135번가 분관은 ‘집’이었다. 당시 이 분관은 뉴욕공립도서관 지점 가운데 유일하게 흑백 통합 직원 체제를 갖춘 곳이었다. 흑인 사서가 카운터를 지켰고, 볼드윈은 처음으로 책상 너머로 자신을 닮은 어른을 보았다. 얼마나 큰 차이였을까. 인종에 따라 출입구조차 갈렸던 시대에, 이 공간은 소년에게 ‘나도 여기 있어도 된다’는 사실을 매일 증명해주었다.
볼드윈은 훗날 1964년 인터뷰에서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서너 번 135번가 도서관에 갔고, 거기 있는 책을 전부 읽었다. 말 그대로 한 권도 빠짐없이. 어떤 맹목적이고 본능적인 방식으로, 나는 그 책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 주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책과 내가 보는 삶, 내가 사는 삶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했다.”
반면 42번가의 웅장한 본관 슈워츠먼 빌딩은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볼드윈은 이 거대한 건물이 경이롭고도 두려운 공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볼드윈이 학교 신문 편집장이었던 8학년 때 지도교사였던 허먼 포터가 42번가 도서관으로 볼드윈을 데려가 연구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나서야 비로소 그 건물이 자신에게도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후 42번가 도서관은 그에게 제2의 집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되살아난 그 문 앞
이 두 가지 감정—135번가의 따뜻한 소속감과 42번가 앞의 경외와 두려움—은 그대로 소설 속으로 들어갔다.
1953년 출판된 첫 소설 《산에 올라가 외쳐라(Go Tell It on the Mountain)》는 1930년대 할렘의 열네 살 소년 존 그라임스(John Grimes)의 이야기다. 주인공의 삶은 볼드윈 자신의 어린 시절과 거의 겹친다. 소설 속 존이 42번가를 걷다가 공립도서관 본관 앞에 서는 장면이 나온다. 제임스 볼드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James Baldwin: Mountain to Fire’에서 소설 원고를 큐레이터가 직접 소개하며 읽어준 대목은 이렇다: “그는 그 거리를 사랑했다. 사람들이나 가게들이 아니라, 거대한 공립도서관 본관을 지키는 석조 사자상들 때문에. 책으로 가득 찬,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한 그 건물에, 그는 아직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볼드윈이 그 문 앞에서 느꼈던 감정—책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아직 자신이 들어가도 되는지 확신하지 못하던 그 순간—을 소설은 가장 솔직하게 담아냈다. 볼드윈은 스스로 이 첫 소설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산》은 내가 다른 무언가를 쓰려면 반드시 써야 했던 책이다.”
도서관이 남긴 것
도서관이 볼드윈에게 준 것은 지식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거울이었다. 135번가 도서관이 품고 있던 흑인 학자 아르투로 숌버그(Arturo Alfonso Schomburg)의 아프리카·아프리카 디아스포라 컬렉션은 볼드윈을 흑인의 역사와 문학으로 이끌었다. 할렘 르네상스의 열기가 남긴 자취들—마르쿠스 가비(Marcus Garvey)의 연설이 울렸던 135번가 코너, 조라 닐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이 드나들던 열람실—그 모든 것이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볼드윈은 이후 파리로 건너가 작가로 성장했다. 《산에 올라가 외쳐라》를 시작으로, 인종과 계급과 섹슈얼리티를 정면으로 다룬 에세이 《다음에 오는 불(The Fire Next Time)》을 썼고, 시민권 운동의 지성적 양심이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유언은 하나였다. 자신의 원고와 편지와 사진을 숌버그 센터에 돌려달라는 것. 어린 시절의 그 도서관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현재 숌버그 센터에는 볼드윈의 육필 원고와 편지, 미발표 초고들이 보존되어 있다. 《산에 올라가 외쳐라》의 초기 원고인 〈콩고 광장(Congo Square)〉 단편도 그 속에 있다. 135번가 도서관의 소년이 쓰고, 135번가 도서관으로 돌아온 이야기들이다.
제임스 볼드윈의 자전적 소설 《산에 올라가서 외쳐라》(Go Tell It on the Mountain)는 1953년에 출간되었다.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할렘의 오순절 교회 분위기와 흑인 인권 문제, 그리고 종교적 갈등을 아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미국 문학의 고전이다.
도서관이 사라지면
볼드윈의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그가 천재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할렘 빈민가의 흑인 소년이 책에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인종을 묻지 않고, 돈을 받지 않고, 그저 문을 열어 두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공공도서관 예산은 삭감의 단골 항목이 된다. 지방 소도시에서는 분관들이 하나씩 문을 닫는다. 하지만 도서관은 단순한 책 창고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집에서 태어나든, 어떤 피부색을 가졌든, 세계와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민주적인 공간이다.
볼드윈이 없었다면 20세기 미국 문학은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135번가 도서관이 없었다면, 볼드윈도 없었을 것이다.
* 제임스 볼드윈은 누구?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 1924~1987)은 미국 흑인 문학의 가장 강렬한 목소리 중 한 명으로,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사회비평가다.
뉴욕 할렘의 가난한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 인종차별과 빈곤 속에서 자랐지만, 타고난 글쓰기 재능과 도서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독학에 가까운 방식으로 작가의 길을 걸었다. 흑인이자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겪는 이중의 차별에 환멸을 느끼고 20대에 미국을 떠나 파리로 건너간 그는, 오히려 대서양 너머에서 미국의 인종 문제를 더 냉정하고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의 첫 소설 《산에 올라가 외쳐라(Go Tell It on the Mountain)》(1953)는 할렘의 흑인 소년이 교회와 가족, 자아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야기로, 볼드윈 자신의 어린 시절을 거의 그대로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이후 발표한 에세이 모음 《다음에 오는 불(The Fire Next Time)》(1963)은 미국의 인종차별 구조를 정면으로 고발하며 시민권 운동의 지성적 기반이 된 텍스트로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다.
한국에서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영미권에서 볼드윈은 조지 오웰이나 토니 모리슨과 나란히 언급되는 작가다. 특히 2010년대 이후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Black Lives Matter)이 다시 거세지면서 그의 글이 재조명되고 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즐겨 읽는 작가로 꼽았고, 그의 삶과 말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나는 당신의 흑인이 아니다(I Am Not Your Negro)〉(2016)는 아카데미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인권, 퀴어, 비서구 시각에 관심 있는 독자와 연구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큰 ‘필독 고전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저서로는 《조반니의 방》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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