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커] 스스로를 의심하는 이들에게,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이 전하는 고백
안은혁_작가, 영화 감독
2026-07-3010:00
클래식 작곡가의 팝송 〈All by Myself〉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팝송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의 곡을 들어보지는 못했어도 에릭 카먼의 팝송 〈All by Myself〉는 아마 익숙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카먼은 클래식을 사랑한 음악가였다. 그는 깊이 심취해 있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의 선율을 팝송 벌스에 사용했고, 해당 곡은 발매 이후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하지만 카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라흐마니노프 유족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소멸되었다고 판단한 라흐마니노프의 저작권이 아직 유효했던 것. 그 결과 카먼은 곡 수익의 12퍼센트를 라흐마니노프 유족 측에 지급하기로 하고, 라흐마니노프는 〈All by Myself〉에 공동 작곡가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에릭 카먼의 〈All by Myself〉 악보.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이 작곡가로 들어가 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명곡이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러시아는 그의 음악원 동기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을 종교적으로 찬양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고, 라흐마니노프는 일생 동안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우울증으로 고통받았으며 말년에는 조국 러시아와 자녀들을 향한 그리움을 안고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트라우마의 시작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훌륭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 바실리는 그에게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물려주었고, 세르게이를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게 했지만 그뿐이었다. 바실리는 극심한 도박 중독자였고 집안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게 된다. 세르게이의 부모는 6남매나 되는 아이들로 집안이 너무 북적거리자, 조금이나마 복잡함을 덜기 위해 세르게이를 이모에게 보낸다. 이때부터 세르게이에게 여러 트라우마가 시작되는데, 자신에게 음악에 대해 소중한 기억을 심어준 누나 엘레나가 빈혈로 사망하고 부모는 별거에 들어갔다. 사실상 방치된 세르게이는 학교를 대부분 빼먹고 스케이트를 타면서 보냈으며 성적표를 위조하기도 했다.
열 살의 라흐마니노프 (출처: 위키피디아)
세르게이는 모든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음악원장은 라흐마니노프를 도무지 가망이 없는 큰 골칫덩어리로 보았다. 세르게이가 학교에서 퇴학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류보피는 별거 중인 남편의 친척 알렉산드르 실로티(Alexander Siloti, 1863-1945)를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실로티는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애제자로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린 저명한 음악 교육자였다. 해외에 있던 실로티가 잠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그를 찾아가 아들의 연주를 듣고 조언을 구하는 기회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를 들은 실로티는 이 꼬마에게 필요한 것은 음악 교육뿐만이 아니라 엄격한 규율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니콜라이 즈베레프(Nikolai Zverev, 1883-1893)를 만나보라고 말한다.
니콜라이 즈베레프와 야수들
즈베레프 이름에는 ‘야수’라는 뜻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에 맞춰 제자들을 ‘새끼들(cubs)’이라 불렀다. 즈베레프는 새끼들에게 아버지와 엄격한 스승의 역할을 했고, 라흐마니노프에게 투철한 근면성과 함께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과 테크닉을 훈련시켰다. 라흐마니노프의 철저한 자기 관리와 연습 스케줄은 즈베레프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제자들은 새벽에 기상해 순번대로 연주를 하는 것이 의무였고, 즈베레프 자택에 있는 다양한 책들을 섭렵했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가 즈베레프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음악을 향한 마르지 않는 사랑이었다.
즈베레프는 그의 제자들에게 주기적으로 연주회를 관람하게 했으며, 제자들은 식사 자리를 통해 즈베레프가 교류하던 다양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안톤 루빈스타인과 세르게이 타네예프였다. 라흐마니노프는 그들의 생활 습관, 그리고 화투까지 따라 했다.
즈베레프와 그의 제자들 (출처: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라흐마니노프)
즈베레프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라흐마니노프였지만 열여섯 살 청년과 즈베레프 사이에는 여러 갈등이 있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방해받지 않고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지만, 즈베레프의 자택은 좁은 공간이라 그것이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고 한다. 개인 작업실을 마련해 달라는 라흐마니노프의 부탁을 즈베레프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둘의 관계는 단절로 이어진다. 즈베레프의 집에서 쫓겨난 라흐마니노프가 1931년 남긴 회고담에는 즈베레프의 자택에서 머문 시기가 공백기로 남아 있다. 그리고 고모 바르바라 사티나가 사는 모스크바의 사틴 일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사틴 일가가 살았던 시골 저택 이바놉카 (출처: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라흐마니노프)
사틴 일가와 이바놉카
1889년, 사틴 일가는 구식 이층집이 있는 골목길에 살았다. 고모인 바르바라 사티나는 네 딸 나타샤, 소피, 베라, 류드밀라와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즈베레프에게서 쫓겨난 라흐마니노프를 보고는 딸들에게 그를 가족처럼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즈베레프 문하를 떠나면서 스승과 교류하던 모스크바 문화계 엘리트들과의 만남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대신 평화로운 사티나 가정의 따뜻한 배려와 그가 어려서부터 바라왔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라흐마니노프는 시골 저택 이바놉카에 마음을 빼앗겼다. 1890년 여름,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며 수많은 음악을 만들었고 사랑이 싹트는 목가적인 경험을 했다.
이바놉카에는 자신을 즈베레프에게 소개시켜준 실로티와 그의 가족, 그리고 일가의 하인들도 함께 지냈다. 사틴 일가의 자매들, 그리고 그들과 가깝게 지내던 이웃 친척 스칼론 가의 자매들은커다란 벤치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바놉카에는 라일락 덤불이 있었고, 정원의 낙엽수들과 오솔길이 있었다. 이때의 기억은 이후 라흐마니노프의 유명 곡 〈라일락〉으로 남게 된다. 이바놉카에는 피아노 두 대가 있었는데 라흐마니노프와 스칼론 가 자매들은 피아노를 공유해야 했다. 베라 스칼론은 일기장에 이바놉카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음악가들이 번갈아 가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불쌍한 피아노는 단 1분도 쉬지 못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스칼론 자매들이 놀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장발을 짧게 깎아 그의 시그니처인 짧은 헤어스타일을 완성했다. (출처: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라흐마니노프)
이바놉카에는 실로티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고,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이 1892년 3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본인의 연주로 선보인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실로티에게 헌정한다.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음악원 졸업 과제로 〈알레코〉라는 오페라 곡을 초연했는데, 당시 졸업 심사위원회 멤버였던 차이콥스키와 옛 스승 즈베레프의 극찬을 받으며 특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즈베레프는 자신의 제자에게 화해의 의미를 담아 회중시계를 선물했는데, 라흐마니노프는 그 시계를 평생 동안 아끼는 보물로 삼으며 망명길에까지 챙겨 갔다고 한다.
이바놉카에서 곡을 작업 중인 라흐마니노프 (출처: 위키피디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탄생
음악원을 졸업하고 스승과도 화해한 라흐마니노프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는 베토벤이나 브람스, 차이콥스키처럼 완벽한 교향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즈베레프에게 배웠던 음악적 문법,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 함께 들었던 성당 종소리, 그리고 여러 고대 성가 모티브를 접목시킨 교향곡 1번이 자신의 음악 인생에 정점을 찍어줄 것이라 확신했다. 1897년 3월 28일, 교향곡이 초연되었고 러시아 음악평론가 세자르 큐이는 “지옥에도 음악원이 있다면 그곳에서나 환영받을 작품”이라는 혹평을 퍼부었다. 눈부신 커리어를 기대했던 스물네 살 청년은 작곡을 포기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1897년부터 1900년은 라흐마니노프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가 되었다.
교향곡 1번 실패 이후 이바놉카에 모여 회의를 하는 라흐마니노프와 스칼론 자매들 (출처: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증에 걸린 건 전적으로 교향곡 실패 때문만은 아니다. 음악가라고 믿었던 자기 자신의 재능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지인들은 라흐마니노프가 극심하게 나약해져 몇 시간씩 침대에만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들이 많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상실로 인해 술을 많이 마셨다고 회상했다. 그는 교향곡 1번 악보를 책상 서랍 속에 넣고 자물쇠로 잠갔고, 교향곡 1번은 48년 동안 연주되지 않았다. 이를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고모 사티나와 나타샤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최면요법으로 명성을 떨치던 신경정신과 전문의 니콜라이 달(Nikolai Dahl, 1860-1939) 박사에게 라흐마니노프를 데려간다. 거의 반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한 라흐마니노프는 달 박사를 만난 기억을 이렇게 언급했다. “지난 20년간 나를 돌봐준 의사는 최면요법 전문가 달 박사와 내 두 사촌들뿐이었다. 이들은 내게 한 가지를 확실히 가르쳐주었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믿으라는 것이다.”
니콜라이 달 박사는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고 자기암시를 하게 했다. 협주곡 2번 초연에는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를, 실로티가 처음으로 지휘를 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평단의 적극적인 지지와 호평을 받았고 나타샤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때부터 라흐마니노프는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그의 사촌들에 의하면 나타샤가 세르게이의 삶을 정리정돈해준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그간의 우울증을 가볍게 극복했고, 결혼 후에 다른 삶을 살게 되며 세계 무대로 도약을 시작한다.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별장 빌라 세나르(Villa Senar) ⓒ안은혁
빌라 세나르에서 라흐마니노프 (출처: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라흐마니노프)
얼마 전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별장에 다녀왔다. 호숫가에서 필라투스 산맥이 보이는 한적한 곳이었다. 그에게 행복한 기억을 심어주었던 이바놉카는 볼셰비키 혁명 때 불타 없어졌고, 라흐마니노프는 스웨덴 연주 초청을 구실로 쫓기듯 조국을 탈출한다. 이후 그는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고, 이바놉카를 떠올리며 자신의 이름 세르게이(Sergei)와 아내 나탈리야(Natalya, 나타샤는 나탈리야의 애칭), 그리고 성 라흐마니노프(Rachmaninov)의 앞 글자를 결합하여 ‘빌라 세나르(Villa Senar)’라는 별장을 짓는다.
빌라 세나르를 둘러보며 협주곡 2번과 3번을 다시 들어봤다. 그곳을 거닐며 듣는 선율은 유독 서정적으로 다가왔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뒷마당에 라일락처럼 피어난 그의 음악은 스스로를 의심하는 이들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린다. 라흐마니노프는 끝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평생을 불안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가 수많은 명곡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결핍과 우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상처를 피하지 않고 온전히 통과했으며, 가장 어두운 순간 기꺼이 타인의 온기에 의지했다. 자신의 취약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음악으로 풀어낸 거장의 진실한 고백은, 내가 빌라 세나르의 고요한 호숫가에서 다시 발견한 아름다운 위로다.
안은혁_작가, 영화 감독
리스토마니아, 방구석 클래식 애호가. 클래식과 영화를 둘러싼 인간의 태도를 관찰하고 기록한다. 가려진 정서가 오래 기억될 수 있는 방식을 살피며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최초의 아이돌 팬클럽은 한 피아니스트에게서 탄생했다. 그 이름은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 클래식계의 아이돌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와 ‘마니아’를 합쳐서 나온 이름이다. 그리고 리스트가 간택한 내향인이 있었으니, 바로 프레드릭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이다. 쇼팽은 공식 연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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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들에게 본인이 알고 있는 유명 캐나다인을 물어보면 대부분 저스틴 비버와 레이첼 맥아담스, 한 발 더 나아가 짐 캐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면 한 명의 캐나다인을 더 알게 될 것이다. 바로 토론토 출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다. 피아노와 의자굴드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다. 학교에서 구토를 자주 했으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