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어린이도서관에서 ‘책 제목 끝말잇기’, ‘책에서 나온 단어 맞히기’ 같은 놀이가 안내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쉽게도 우리 집 어린이들은 이런 놀이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집에서는 책의 다른 쓸모를 일찌감치 발견했다. 책을 가능한 한 높이 쌓아 올리는 놀이였다. 다행히 책을 펼쳐 그림을 따라 그리는 일도 좋아했으니, 책을 아주 엉뚱하게만 가지고 논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책을 보며 따라 그린 그림. 《존엄을 외쳐요》 《Father and Daughter》 《꼬마 요괴의 점심 식사》 《산책 가자》 ⓒ박연미
엄마가 책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 “책을 소중하게 다뤄야지”, “책에 낙서하면 안 돼” 같은 말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책에 낙서하는 일이야말로 내가 학창 시절 가장 즐겨 했던, 책으로 하는 놀이였다. 페이지 귀퉁이에 그림을 조금씩 다르게 그려 움직이는 플립북을 만들거나, 기존 글자에 몇 글자를 보태 전혀 엉뚱한 말로 바꾸는 식이었다. ‘체육’을 ‘제육볶음’으로 만드는 일명 교과서 이름 바꾸기 놀이는 인공지능 시대인 지금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듯하다. 도구가 아무리 달라져도 책 위에 무언가를 직접 덧붙이고, 지우고, 엉뚱한 것으로 바꾸어보는 재미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낙서는 목적 없이 손을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처럼 보인다.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도, 완성해야 한다는 목표도 없다. 낙서를 예술의 언어로 끌어올린 화가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작업에 대해 롤랑 바르트는 규칙이 정해진 ‘게임(game)’보다 행위로서의 ‘놀이(playing)’에 주목했다. 서툴고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선으로 보이는 톰블리의 흔적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제대로 그렸는가보다 그리는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낙서는 그림이 되기 전의 미숙한 단계라기보다 손과 눈과 생각이 함께 움직이는, 꽤 오래된 창작의 방식에 가깝다.
낙서를 예술의 언어로 끌어올린 화가 사이 톰블리ⓒ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60권의 책배가 커버 디자인의 출발점이 되다
이번 문학잡지 《릿터》 61호의 커버 이미지는 책으로 할 수 있는 이런저런 고전적 놀이를 떠올리다가 ‘낙서하기’로 정했다.
2016년 8월 첫 호를 선보인 《릿터》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61호의 커버스토리는 창간호의 주제였던 ‘뉴노멀’을 10년 만에 다시 불러낸 ‘뉴노멀 2026’이다. 박혜진 편집자는 에디터스 노트에서 ‘그사이 문학과 출판을 둘러싼 조건은 완전히 달라졌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기준들은 죄다 옛것이 되었다’고 썼다. 10년 전 새로운 기준을 묻기 위해 꺼냈던 ‘뉴노멀’이라는 말을 다시 앞에 두고, 이번 호는 지금 문학과 출판에서 무엇이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는지, 특히 2026년의 인공지능과 문학을 이야기한다.
문학과 인공지능을 이야기하는 잡지의 얼굴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디지털 감각이 강한 이미지를 만드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고, 생성형 AI로 전에 없던 장면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표지까지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야 할까.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는 아주 오래되고 단순한 행위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종이에 연필을 대고 선을 긋는 일, 책에 이름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 그러니까 낙서 말이다.
《릿터》는 매 호 여러 분야의 아티스트와 협업해 커버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작품을 고를 때는 무엇보다 커버스토리와 주제적으로 잘 맞으면서도, 독자가 한 번 더 생각해볼 만한 여지를 주는가를 살핀다. 동시에 앞선 호들과 매체나 표현 기법, 색감이 겹치지 않도록 전체 흐름을 함께 고려한다. 10주년이라고 해서 특별히 거창할 것은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한 가지가 달랐다. 다른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대신 창간호부터 《릿터》를 디자인해온 내가 직접 커버 이미지를 만들기로 했다.
컴퓨터 옆 책장에는 1호부터 60호까지 《릿터》가 나란히 꽂혀 있다. 작업할 때마다 늘 바라보는 것은 책등이다. 반대로 책배를 마주할 일은 거의 없다. 어느 날 그 책들을 하나씩 꺼내 두었다. 책등만 바라볼 때는 보이지 않던 무수한 종이의 층이 나타났다. 60권의 책배를 차례로 보고 있자니 그 사이로 지난 10년의 시간도 함께 드러나는 것 같았다. 초기의 《릿터》는 소설 지면에 들어간 그레이톤의 농도 차이 정도만 책배에 흔적을 남겼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 경장편 소설과 리뷰 코너 등에 매 호의 키컬러(key color)가 더해졌고, 책배에도 조금씩 색이 쌓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거의 보지 않던 부분인데 60권을 늘어놓으니 하나의 긴 이야기처럼 보였다. 늘 표지에 가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책배가 이번에는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책장에 쭉 꽂혀 있던 60권의 책등과 꺼낸 후 바라본 책배 이미지 ⓒ박연미
AI 시대, 선택과 판단을 내리는 사람의 손과 놀이의 가치
인공지능은 디자인과 이미지 창작의 과정에도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다. 나 역시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실제 이미지로 구현하기 애매할 때 생성형 AI를 일종의 가까운 외주자처럼 가볍게 활용해보고 있다. 창간호가 레터링을 중심으로 커버 이미지를 만들었던 만큼 61호 역시 큰 결에서는 그 시작점과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10년 동안 쌓인 《릿터》의 책배를 하나의 종이처럼 놓고, 그 위에 낙서를 해보기로 했다. 처음과 지금을 연결하는 방법이 최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오래된 손의 움직임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바탕으로.
책배에 자기 이름을 써놓던 것처럼 ‘뉴노멀/NEW NORMAL’을 쓰고, 어린 시절 가장 많이 그렸던 웃는 얼굴도 하나 그렸다. 인공지능을 둘러싸고 기대만큼이나 비관적인 전망도 쏟아지는 때지만, 그 안에서 낙관의 힘까지 잃고 싶지는 않은 마음을 웃는 얼굴에 담았다. 뒤표지에서는 1호의 책배가 시작되고, 60권의 시간이 앞표지까지 이어진다. 책등 자리에는 10년 동안 쌓인 《릿터》 책배의 한가운데가 오도록 했다. 그렇게 61호 한 권의 표지 안에 지난 60권을 다시 넣었다.
《릿터》 61호 뒤표지, 책등, 앞표지로 이어지는 이미지 ⓒ박연미
그런데 실제 60권의 책배 위에 바로 펜을 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번 그은 선을 되돌릴 수도 없고, 한 번에 마음에 드는 글씨와 그림을 만들어낼 자신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생성형 AI의 손을 빌렸다. 책배에 직접 펜을 대고 낙서한 듯한 흔적을 만들고, 흐릿하게 끊기거나 삐뚤어진 선을 여러 차례 만들어보았다. 원하는 결과에 가까워질 때까지 수없이 이미지를 만들고 수정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필요한 부분을 다시 고르고 합성하고 지우며 직접 손을 보았다.
결과적으로 ‘손으로 그린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사람의 손과 인공지능의 손이 여러 차례 뒤섞인 셈이다. 어느 쪽이 진짜 손인지 따지는 일은 이번 작업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어느 정도 삐뚤어져야 자연스러운지, 선이 어디에서 끊겨야 하는지, 웃는 얼굴의 작은 표정 차이가 표지 전체에 어떤 인상을 만드는지까지 하나하나 판단해야 했다.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믿기 어려울 만큼 그럴듯한 이미지를 순식간에, 수없이 만들어내는 시대에 오히려 더 자주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다. 이번 작업에서 끝내 인공지능에게 맡길 수 없었던 것도 이미지를 ‘만드는 일’ 자체보다 그 순간순간의 선택이었다. 무엇을 보고 싶은지 정하고, 나온 것을 의심하고, 다시 고르고, 때로는 일부러 망가뜨리는 일. 생각해보면 그것은 낙서할 때 손이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낙서에는 정답이 없다. 잘 그려야 할 이유도 없고 효율적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선 하나를 긋고 그것을 바라보다 다시 하나를 보탠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덧칠하고, 우연히 생긴 흔적이 재미있으면 그대로 둔다. 도구가 연필이든 인공지능이든, 놀이는 결국 무엇을 해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10년 전 《릿터》 창간호를 디자인할 때와 비교하면 책을 만드는 환경도, 이미지를 만드는 방법도 달라졌다. 그럼에도 책 한 권을 앞에 두고 이리저리 만져보고, 펼쳐보고, 뒤집어보고, 거기에 무언가를 더해보는 일은 여전히 유효하다. 책에 낙서하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말을 바꿔야겠다. 가끔은 책에 낙서해도 괜찮다고. 잘 놀다 보면 생각은 뜻밖의 곳으로 뻗어나가기도 하니까.
박연미_북디자이너
민음사에서 북디자이너로 근무했고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문학잡지 《릿터》와 《레닌 전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감옥의 몽상》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갈등하는 눈동자》 등 소설, 에세이, 인문,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 2022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수여하는 제52회 한국출판공로상 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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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따뜻한 11월이 있을까 싶을 정도더니 12월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계절은 순식간에 바뀌어 문득, 겨울이다.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마산에 갔다. 80여 년 전 시인 백석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걸을 요량이었다. 그렇게 부둣가 어시장까지 이르렀다. 겨울 해는 이내 저물고 어둑신한 골목으로 짠물이 흘러갔다.오래 전 백석이 쓴 시를 떠올리니 어떤 마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23’(2023.10.20.~2024.3.31.) 전시는 최근 예술의 동향과 관련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권병준, 갈라포라스-김, 이강승, 전소정 등 네 예술가의 작품은 인류학적 투시주의와 문명사적 성찰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 존재와 타자 등 여러 다발의 관계론적 사고를 통해 존재론적 탐문의 심화
키 161센티미터에 48킬로그램의 체중을 가진 남자. 단정하게 빗어 넘긴 은빛 머리카락에 우뚝 솟은 코, 부드럽지만 형형한 눈빛,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 일자로 다문 얇은 입술에 늘 말쑥한 양복 차림. 표정에 품위가 드러나는 이 신사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조국이 전쟁에 휘말리자 입대를 자원하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누구에 대한 이야기냐 하면 바로 프랑스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