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161센티미터에 48킬로그램의 체중을 가진 남자. 단정하게 빗어 넘긴 은빛 머리카락에 우뚝 솟은 코, 부드럽지만 형형한 눈빛,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 일자로 다문 얇은 입술에 늘 말쑥한 양복 차림. 표정에 품위가 드러나는 이 신사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조국이 전쟁에 휘말리자 입대를 자원하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누구에 대한 이야기냐 하면 바로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Joseph Maurice Ravel, 1875~1937)이다.
2025년은 라벨 탄생 150주년의 해로, 라벨은 올해 내내 클래식 음악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많은 연주자(단체)가 라벨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여러 음반사가 그의 음반을 기획, 출반했다. 그를 다시 집중적으로 만나려면 한동안을 기다려야 할 테니 2025년의 끝자락에서 그를 다시 불러본다.
라벨은 드뷔시와 더불어 20세기 프랑스 음악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곡가다. 그 둘은 인상주의 음악이라는 시대적 분류에서는 한데 묶이지만 서로 결이 다른 음악을 만들었다. 프랑스 음악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유로이 떠다니는 구름처럼 몽환적이며 모호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세련되고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것이다. 선율과 리듬이 명확하게 인식되는 독일 음악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드뷔시가 이런 음악의 대표주자라고 한다면 라벨은 프랑스 작곡가임에도 이런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다.
동시대 작곡가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 러시아)는 라벨을 가리켜 ‘스위스 시계 장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스위스 혈통의 엔지니어라는 점에 빗댄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그의 음악이 기계처럼 정교하고 치밀하며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그의 음악은 인위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그 비난에 대해서 라벨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천성적으로 인위적인 사람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본 걸까?” 이 말은 자신의 음악이 인위적이라는 데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런 그도 드뷔시를 모방했다는 평에 대해서는 신경이 쓰인지라 기회가 되는 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누이 설명하곤 했다. 이를테면 어떤 작품이 드뷔시와 비슷한 작법의 곡이라는 평에 대해서는 자신이 드뷔시보다 먼저 그 작품을 작곡했음을 적극적으로 밝혔던 것이다. 그럼에도 라벨은 드뷔시의 몇몇 작품을 편곡할 정도로 드뷔시를 존중했다. 그에 비하면 드뷔시는 라벨이 평단의 호평을 받을 때 그의 작품을 폄하하는 글을 평론가에게 보냈을 정도로 라벨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비슷하게 주목을 받고 명성을 얻는 라이벌 사이에서 있을 법한 일들이다.
어찌 되었건 라벨은 서른 무렵에는 이미 프랑스에서 명성을 얻은 음악가가 되었다. 비록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작곡상인 로마대상에선 번번이 낙선했지만, 라벨의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고루한 심사위원들의 명성만 떨어뜨린 꼴이 되었을 정도다. 언론까지 나서서 라벨 편을 드는 바람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종내 파리음악원 원장이 바뀌는 일까지 발생한 것이다. 이후 라벨은 로마대상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음악원을 떠났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자신과 뜻이 맞는 예술적 동지들과 더불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라벨은 음악원에서 전통적인 교육을 통해 명확한 선율과 구조를 갖춘 음악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런 그가 새바람이 불던 20세기 프랑스 음악에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전통을 기본으로 한 실력 위에 자유로운 발상에서 나온 독창적인 리듬과 관능미, 황홀할 정도로 색채감 넘치는 오케스트레이션이 수반됐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을 혹사한다는 난이도 최상의 곡인 〈밤의 가스파르〉를 비롯해 〈물의 유희〉 〈거울〉 〈죽은 공주를 위한 파반느〉 등의 피아노곡과 〈다프니스와 클로에〉 〈스페인 랩소디〉 〈라 발스〉 〈볼레로〉 같은 관현악곡, 그 밖에 피아노 협주곡이 라벨의 대표 작품이다. 다작의 작곡가는 아니지만 작품이 오늘날에도 고루 연주되는 편인, 말하자면 스테디셀러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작품 외에 러시아 작곡가 무소륵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 1839~1881)의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작품은 오늘날 오케스트라의 단골 레파투아로 그의 오케스트레이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에 대한 방증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라벨을 〈볼레로〉 없이 얘기할 수는 없다. 음악에서 ‘볼레로(Bolero)’는 춤곡의 일종으로, 스페인 혹은 쿠바를 비롯한 중남미에서 성행하던 음악이다. 특히 독특한 3박자의 스페인 춤곡 ‘볼레로’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유럽에 이국적 스페인 정서가 유행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쇼팽도 ‘볼레로’라는 제목의 피아노곡을 썼을 정도니까. 그러나 볼레로는 누가 뭐래도 20세기에 와서 프랑스 작곡가 라벨에 의해 가장 빛을 발했다.
1928년, 파리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출신의 무용가(배우이기도 함) 이다 루빈스타인(Ida Lvovna Rubinstein, 1883~1960)은 라벨에게 자신의 무용단이 사용할 음악을 의뢰한다. 스페인 작곡가 알베니스(Isaac Albéniz, 1860~1909)의 피아노 모음곡 〈이베리아〉를 오케스트라로 편곡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이 작업을 하던 중 라벨은 이 작품이 이미 다른 지휘자에 의해 편곡된 사실을 알게 됐고, 지휘자가 양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편곡을 포기, 다른 작품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스페인 춤곡인 볼레로를 기반으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쓰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라벨 최고의 대표작 〈볼레로〉가 탄생했다. 라벨은 생 장 드 뤼(Saint-Jean-de-Luy)에서 휴가를 보내던 어느 날 피아노를 치다가 주제 선율을 생각해내고, 이 선율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오케스트라를 최대한으로 늘려가는 방법을 창안한다.
1928년 11월 22일, 드디어 파리 오페라에서 〈볼레로〉가 초연되었다. 이날 한 여성 관객이 연주 내내 “이 사람(라벨)은 미쳤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라벨은 그 부인이야말로 이 곡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정도로 라벨 자신조차 이 음악이 정상적인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평하기를, “이 작품은 음악이 아니다. 형식도 발전도, 조바꿈도 거의 없는 작품이다”라고 했다. 말하자면 〈볼레로〉는 기존의 음악 형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음향적 실험에 가까운 곡이다. 대략 15분의 연주 시간 동안 스네어 드럼과 현악기의 피치카토가 일정한 리듬을 계속 되풀이하는 가운데, 두 개의 선율이 번갈아 반복된다. 선율은 플루트로 시작해 클라리넷, 바순에 이어 마지막 트롬본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악기가 릴레이로 연주하면서 더해진다. 템포와 리듬의 변화는 없고 다만 악기의 변화와 첨가, 점진적 크레센도(음악의 세기가 점점 커지는 것)로 마침내 전 악기가 합주하다가 마지막에 폭발하듯 강렬한 사운드로 끝을 맺는 것이다.
〈볼레로〉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구조로 단조롭기 이를 데 없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놓지 않고 몰입하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지녔다. 이런 점 때문에 초연되자마자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까지 인기를 끌어 공연과 음반 녹음이 성행했다. 이 곡의 연주를 둘러싸고 전해진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당대 최고 지휘자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 이탈리아)는 라벨이 의도한 템포보다 훨씬 빠르게 연주했다고 한다. 지휘자들의 볼레로 연주 템포에 늘 예민했던 라벨은 “너무 빠릅니다. 그건 제 템포가 아니예요”라고 말했고, 토스카니니는 “당신은 자신의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는 게 작품이 사는 길입니다. 당신의 템포에 맞추면 음악 효과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에 라벨은 심기가 상해 “그럼 연주하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라벨이 토스카니니에게 속도위반 딱지를 발부한 셈이다. 작곡가와 연주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이다. 대개는 연주자가 작곡가의 의도와 지시를 따르는 편인데 토스카니니는 양보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후문에 따르면 이 일화는 볼레로의 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볼레로〉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는 다양한 관악기가 돌아가며 하나씩 차례로 선율을 이어가며 음색의 변화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는 저마다 악기의 음색을 잘 파악하고 오케스트라 안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풀어내는지를 잘 아는 라벨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케스트레이션의 천재이기에 발휘할 수 있는 창의성이라고 할까.
라벨은 대부분의 오케스트라가 볼레로 연주를 거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라벨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 되었다. 라벨의 다른 작품은 몰라도, 아니 라벨이라는 작곡가는 몰라도 많은 사람이 이 곡만큼은 들어봤노라고 한다. 또, 볼레로는 애초에 발레 음악으로 작곡되었으나 요즘엔 주로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연주되지 발레 무대에 오르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런 사실을 보며 작품의 운명 역시 사람의 운명처럼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라벨 특유의 정밀하고 창의적인 천재성은 그를 20세기 음악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길 필연적 운명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 〈볼레로〉가 대중적 인기를 얻고 후대 미니멀리즘 음악의 탄생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작곡가의 의도가 아닌 시대적 요청에 의해 정해진 우연적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볼레로〉는 감상자에게 시간 예술인 음악을 시간 그 자체로 체험하게 하는 독특한 음악이다. 이 곡에서 감상자는 음악이 구조적, 화성적으로 어떻게 구축되었고 어떻게 전개되는지 고민하며 들을 필요가 없다. 악기가 연주하는 대로, 리듬이 흐르는 대로 그저 순서와 시간을 따라 듣고 느끼면 되는 것이다.
2025년에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인공지능(AI)이 아니었을까? 이 신기술의 확장으로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한 한 해의 말미에, 라벨이 단순과 반복을 도구로 창안한 97년 전의 혁신적 음악 〈볼레로〉에 귀를 맡기고 잠시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는 건 어떨까? 새로운 기운이 들며 참신한 새해를 맞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음악 감상]
라벨(Maurice Ravel) / 〈볼레로(Bolero)〉
지휘: 리오넬 브랑기에(Lionel Bringuier)
연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L'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얼마 전 큰아이가 디즈니플러스라는 OTT로 어릴 때 보던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보기에 나도 슬그머니 옆에 앉았다. 예전에 재미있게 봤고 음악도 기억에 남는 만큼 지금 봐도 감명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하지만 잠깐 보는 동안 진행이 어찌나 더디던지 지루하고 답답해서 계속 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갖가지 ‘숏폼’ 콘텐츠와 스피디한 스
10년도 더 된 일인 것 같다. TV의 건강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데, 한 외국 여성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암을 최초로 발견하고 경고한 것은 바로 반려견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다. 반려견이 주인의 몸에서 특이한 냄새를 맡고 계속 경고성 행동을 해서 병원에 가게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암세포에서 발생하는
내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만난 것은 음악으로였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에서 접한 조르바의 춤이란 곡은 독특한 음색의 악기와 심장이 뛰는 듯한 리듬으로 나를 매혹시켰다. 자연히 그 영화가 궁금해졌고, 이어서 원작 소설도 읽고 싶어졌다. 이렇게 차례로 음악에서 영화로, 마침내 소설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났다. 영화의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