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23’(2023.10.20.~2024.3.31.) 전시는 최근 예술의 동향과 관련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권병준, 갈라포라스-김, 이강승, 전소정 등 네 예술가의 작품은 인류학적 투시주의와 문명사적 성찰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 존재와 타자 등 여러 다발의 관계론적 사고를 통해 존재론적 탐문의 심화를 모색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횡단의 미학’이다. 장르와 매체를 넘나들며, 대륙의 동서(東西)를 넘나들고, 시간의 고금(古今)을 오르내린다. 그러면서 인간적인 것과 미적인 것의 접속 지점을 헤아리고, 접촉과 변화의 역동성을 탐문한다.
이식되고 이주되는 백년 여행기
갈라포라스-김의 횡단 미학이 상대적으로 더 인류학적이고 고고학적 계보학에 관심을 보인다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5 전시실에서 선보인 정연두의 경우는 횡단성의 표지가 더욱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것이 특징이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2023.9.6.~2024.2.25.)에서 작가는 1905년 멕시코로 건너간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 서사를 주목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외교권 등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1905.11.17.)이 체결되었던 그해 4월, 부강한 멕시코에 가서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이민 브로커의 말에 속은 1000여 조선인들이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다. 그 배에는 황족, 퇴역군인도 있었고 고아도 있었고 무당도 있었다. 그들은 40여 일의 고통스러운 항해(그 배 안에서 태어난 아기도 있었다) 끝에 멕시코 유카탄 주의 주도 메리다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곳은 행복한 꿈의 공간이 아니었다. 멕시칸 드림을 꿈꾸며 기다렸던 장소가 아니었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삶은 차라리 지옥과도 같은 노예선의 나날을 방불케 했다. 배우 장미희가 주연을 맡고 김호선 감독이 연출한 영화 <애니깽>(1997)과 김영하의 장편소설 <검은 꽃>(2003)도 바로 이런 백여 년 전의 한인 디아스포라에서 비롯한 서사였다. 김호선이나 김영하가 백여 년 전의 과거, 멕시코로 횡단하여 그때의 서사에 집중했다면, 이제 전시명 ‘백년 여행기’의 작가 정연두는 백 년 전과 그 이후 백 년의 시간을 오르내린다. 그리고 그 백 년 동안의 공간적 가로지르기를 적분하여 조형한다.
물론 예술의 출발점은 백 년 전 과거 역사이다. 백 년 전 이주기에 대한 정연두의 관심은 멕시코에서는 노팔 선인장으로, 한국에서는 백년초로 불리는 식물의 ‘설화’적 여행기에서 비롯된다. 노팔 선인장이 멕시코에서 태평양을 건너 제주도에 뿌리내렸다는 설화 말이다. 200여 년 전 멕시코에서 선인장 씨앗이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제주도 땅에 뿌리 내리게 되었다는 백년초 설화와 반대 방향의 횡단과 이식이, 100여 년 전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으로 갔던 조선인들의 디아스포라 서사다. 백년초는 제주도에 이식되었고, 한인은 멕시코로 이주했다. 뿌리뽑혀 옮겨 심어졌다는 점에서 한국과 멕시코는 양방향의 횡단성을 지닌다. 그 횡단 서사는 ”제국, 식민, 노동, 역사를 둘러싼 한인 이주 서사 이외의 제3의 이야기를 열어주는 통로“(<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 팜플렛, 6쪽)가 되기도 한다.
다양한 매체와 오브제를 이용한 횡단 미학
작가 정연두는 백 년 전 한인 디아스포라 서사를 바탕으로 한 다원 예술을 제작하기 위해 2022년부터 2023년까지 세 차례 멕시코로 건너가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을 살피고 한인 이민 후손들과 만나 인터뷰했다고 한다. 최대한 백 년 전의 역사 서사에 밀착해 들어가면서도, 이후 그 흐름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그 흐름 속에서 그 후손들은 어떤 관계망을 형성하며 이식된 땅에서 새롭게 뿌리내리거나 내리지 못하거나 했을까, 백 년 전 한인 가족의 디아스포라 서사는 지금 이 땅에 들어와 있는 여러 외국인 디아스포라를 이해하는데 어떤 영향을 주는가, 등 여러 질문을 미학적으로 제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서사 텍스트와 음향, 영상과 퍼포먼스, 설치 미술 등 혼성적 다원예술이 되었다. 각각은 독특한 횡단 미학을 보여주면서, 디아스포라 고통의 알레고리 효과를 빚어낸다.
실제로 백년초 이주 설화를 초현실적 여행기로 다룬 음악과 퍼포먼스 무대, 마주 보는 구조로 설치된 2채널 영상을 통해 한인 2~5세대들의 삶의 생태와 의식을 역동적으로 연출하는 <세대 초상>, 그리고 무륜주와 에네켄, 노팔 선인장 등 멕시코 열대 식물들을 형상화한 오브제 설치와 영상이 어우러진 <백년 여행기> 등 다양한 매체와 오브제, 텍스트와 서사, 음향과 시각 효과들이 다채롭게 횡단 미학을 형성한다.
예컨대 <날의 벽>(2023)은 14미터 높이의 벽면 설치 예술이다. 표제 그대로 ‘칼날’로 구성된 벽인데, ‘마체테(Machete)’라 불리는 세계 도처에서 농사지을 때 사용했던 칼날을 설탕을 녹여 조형해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작가가 어린 시절 즐겼던 설탕 뽑기 놀이를 제작 과정에서 원용했다고 한다. 거대한 벽에 설탕으로 만든 ‘마체테 오브제’로 조형된 이 두 작품은 디아스포라의 사회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환기한다. 먼저 벽은 예루살렘 ‘통곡의 벽’을 소환한다. 자기 땅에서 뿌리뽑혀 디아스포라로 떠돌며 홀로코스트의 비극까지 겪어야 했던 유대인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역사성과 함께 설탕의 정치경제적이고 사회문화적인 의미 또한 각별하다. 백 년 전 조선인들이 멕시코에 간 것은 설탕의 제국주의적 전략과 관련된다. 설탕을 생산하기 위한 에네켄 재배는 단지 맛나는 음식 요리에 필요한 설탕을 구하기 위한 농사짓기라는 자연적 범주는 넘어선 것이었다. 농사일의 결과를 본인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철저하게 혹은 혹독하게 권력과 자본이 개입하는 공간이었다. 마체테가 기본적으로는 농기구이지만 “지주들의 억압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무기”였다는 사실은 ‘날’의 정치성을 예각적으로 환기한다. 그러니까 <날의 벽>은 설탕의 역설을 매우 효과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일과 놀이, 억압과 저항, 전쟁과 평화 등 여러 대조항이 복합적으로 상충한 것이 바로 ‘설탕의 권력’이었다.
<상상곡>(2023)은 120여 년 전 한인 디아스포라 서사에 대한 반향의 예술이다. 한반도에서 나간 디아스포라 이야기에서 착안해 한반도로 들어온 외국인 디아스포라들이 서발턴처럼 제대로 하지 못한 그들의 말, 그러니까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한 시도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열린 공간, 서울 박스에 들어서면 열한 점의 다양한 오브제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한 음악을 연출하는 광경을 접하게 된다. 열대 식물 이파리와 붉은 열매를 형상화한 이 오브제들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데, 그 안에 초지향성 스피커가 들어 있어 가청 음역으로 변환된 초음파 소리가 재생된다. 이 열린 공간을 거닐다가 오브제 바로 아래 이르면 마치 환청처럼 외국인의 목소리들이 들린다. 2023년 현재 한국에 사는 여러 국적의 외국인들이다. 팜플렛의 안내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 오늘 가장 그리운 사람, 희망과 꿈에 대한 작가의 질문”에 “일본어, 스페인어, 아랍어, 헝가리어, 텔루구어, 인도네시아어 등으로 답”(8쪽)하는 디아스포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때로는 무심한 말처럼, 때로는 한 서린 서리처럼, 때로는 몽롱한 ‘상상곡’처럼 들린다. 그들의 목소리는 현실의 소리라기보다는 마치 머릿속을 맴도는 상상의 노래처럼 들린다.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뿌리뽑혀 지금은 이 한반도에서 여러 곳의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그저 이방인의 목소리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디아스포라의 목소리를 통해, 120여 년 전 유카탄반도에서 고통받으면서도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을 한인 디아스포라의 음성을 환청처럼 상상할 수 있는 까닭이다. 확실히 <상상곡>은 횡단의 감각으로 디아스포라 문제에 대한 트랜스내셔널한 인식과 성찰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상상곡>만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날의 벽>도 그렇고, 이번 정연두의 복합문화전시 <백년 여행기>는 디아스포라 횡단의 역설을 역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작가 자신의 기획 의도와 작업, 전시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시 공간에 참여하는 관람자, 수용자의 능동적 참여로 완성되는 형성적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수용자는 <백년 여행기>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양한 맥락을 환기하고 다채로운 의미와 소통하면서 해석의 지평을 확대 심화할 수 있다. 작품 창작과 수용 사이의 거리 및 대화적 소통에서 발생하는 횡단 미학의 한 특징을 실감하게 한다.
우찬제_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대학교수.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카오스모스 수사학》(2023), 《책의 질문》(2023), 《애도의 심연》(2018), 《나무의 수사학》(2018), 《불안의 수사학》(2012), 《프로테우스의 탈주-접속시대의 상상력》(2010), 《고독한 공생》(2003), 《타자의 목소리》(1996), 《상처와 상징》(1994), 《욕망의 시학》(1993) 등을 썼고, 대산문학상, 팔봉비평상, 김환태평론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최근엔 기후 침묵을 넘어 기후 행동을 위한 생태학적 지혜와 상상력을 탐문하는 환경인문학을 모색하면서, 문학과 문화 교류 양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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