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칼럼] 27개의 서재가 하나로 모일 때_1 도서관 1 고전, 함께 읽고 끝까지 다다르는 인문학의 힘
박수정 사서주무관
2026-09-0115:00
첫 페이지의 중력: 왜 우리는 고전 앞에서 번번이 멈추는가
누구나 집 안 책장 한구석이나 도서관 서가에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 한 권쯤은 품고 산다. 오랜 세월을 버텨낸 가치와 깊이를 알면서도, 빽빽한 문장과 방대한 분량에 눌려 끝내 마지막 장을 넘기지 못한 거대한 고전들이다. 독자들은 이 다가서기 어려운 책들을 친숙함과 두려움을 담아 ‘벽돌책’이라 부른다.
2026년, 경상남도교육청 소속 27개 공공도서관은 오랫동안 독자들의 숙제로 남아 있던 벽돌책 앞에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며 뜻을 모았다.
“왜 고전 완독은 늘 개인의 외로운 여정으로 남아야 하는가?”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했다. 난해한 어휘와 시대적 배경, 그리고 방대한 분량을 개인의 의지만으로 정복하기란 처음부터 무리였기 때문이다. 완독의 실패를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 치부하기보다 ‘함께 읽고 버텨내는 구조의 부재’로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공공도서관의 새로운 역할이 비로소 또렷해졌다. 혼자서는 넘기 힘들었던 고전의 높은 담장을 낮추고, 서로가 서로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끝까지 읽어내도록 돕는 환경. 경남 교육현장의 사서들이 지혜를 모아 시작한 공동 인문독서 프로젝트 ‘서재 27’은 그렇게 출발했다.
27개 도서관의 연대: 사서들의 기획으로 피어난 다채로운 완독의 현장
‘서재 27’의 핵심 기획은 획일적인 도서 선정을 피하고, 각 지역의 특성과 이용자의 결에 맞춘 ‘1도서관 1고전’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경남 전역의 27개 공공도서관이 저마다 한 권의 대표 고전을 선정하고, 사서들의 세심한 설계 아래 다채로운 완독 프로그램이 현장에서 활기차게 펼쳐졌다.
∎ 퇴근길의 깊은 사유와 확장(하남도서관): 하남도서관(이해진 사서)은 하루의 피로를 안고 돌아오는 직장인들을 위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펼쳐 들었다. 8주간의 퇴근길 낭독 및 정독으로 거대한 우주와 나를 돌아보는 독서 습관을 만들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완독에 대한 동기 부여를 위해 유명 천문학자 초빙 특강을 마련해 결심을 다독였으며, 후속 프로그램으로 밀양아리랑천문대 견학까지 다녀오는 깊이 있는 인문 여정을 선보였다.
하남도서관의 ‘코스모스 퇴근길 함께 읽기’와 후속 프로그램(천문대 관람) ⓒ박수정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표지
∎ 청소년의 사유를 깨우는 대화(창원도서관): 창원도서관(강정욱 사서)은 학교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 청소년들과 함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다. 작품 속 내면의 갈등과 성장의 모티브를 매개로, 청소년들이 방황을 성찰로 바꾸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정립하며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힘을 키우도록 이끌었다.
∎ 진입 장벽을 허문 가벼운 첫걸음(함양도서관): 함양도서관은 연암 박지원의 단편소설을 ‘매월 딱 6장씩’ 나눠 읽는 기발한 방식을 도입했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고전의 분량을 파격적으로 줄여, 누구든 부담 없이 고전의 뜰에 들어서서 완독의 성취감을 맛보도록 유도한 지혜로운 시도였다.
∎ 시공간을 허문 정직한 도전(고성도서관): 고성도서관(서빛나 사서)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10주간 완독하는 네이버 밴드 기반의 온라인 독서 모임을 정립했다. 주 2회 독서 사진과 감상문 등을 올리며 20명이 신청해 10명이 단단한 벽돌책 깨기에 성공했다. 서빛나 사서는 “10주라는 긴 운영 기간이 후반부 지속성을 다소 저해하는 것을 보며 고전 완독의 단단한 벽을 재확인하기도 했지만, 완독의 계기가 되었다는 호응에 힘입어 한 달 단위의 유연한 온라인 모임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라며 현장의 솔직한 고민과 의지를 전했다.
∎ 필사와 강연으로 입체화된 완독(사천도서관): 사천도서관(이정숙 사서)은 단테의 《신곡》을 함께 읽고 깨는 완독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온라인 독서 모임에 사서가 직접 참가자로 함께 달리며, ‘신곡 필사하기’와 10월 예정된 ‘우리 시대의 구원’ 특강을 연계해 단단한 인문학적 밑바탕을 다져가고 있다.
사천도서관 온라인 독서 모임 ⓒ박수정
∎ 지역 서점과 번역가, 시민이 만들어낸 감동(거제도서관): 거제도서관(윤현주 사서)은 지역의 ‘동네책방 연결’과 협업하여 제인 오스틴 탄생 250주년 기념 에디션인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2권을 5주간 집중 정독하는 북클럽을 운영했다. 김선형 번역가 초청 강연과 서평 쓰기까지 연계된 이 모임에는 30대에서 50대 기혼 여성들을 중심으로 뜨거운 라포(Rapport)가 형성되었다.
제인 오스틴 불클럽(거제도서관) ⓒ박수정
사피엔스 온라인 인증(고성도서관) ⓒ박수정
박지원 함께 읽기 (함양도서관) ⓒ박수정
AI 시대, 굳이 완독이라는 정직한 노동을 선택하는 이유
질문 하나만 던지면 생성형 AI가 몇 초 만에 수백 쪽에 달하는 고전의 핵심 요약과 줄거리를 깔끔하게 정리해 건네는 시대다. 효율과 속도가 미덕이 된 세상에서, 빽빽한 고전의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밟아나가는 완독의 행위는 자칫 고집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서들과 독자들은 알고 있다. AI가 제공하는 요약본은 타인의 시선으로 해체된 ‘정보’일 뿐, 나의 삶을 흔들고 사유를 확장하는 ‘진짜 통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전 완독은 단지 정답을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다. 낯선 어휘에 걸려 멈춰 서고, 작가가 던진 묵직한 질문을 품은 채 문장 사이의 공백을 스스로 채워가는 ‘정직한 사유의 근력’을 키우는 작업이다. 파편화된 디지털 정보 속에서 집중력을 잃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한 권의 벽돌책을 끝까지 읽어내는 경험은 흩어진 사유를 끌어모으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되찾아주는 가장 강력한 인문학적 훈련이 된다.
이용자들이 전해온 목소리: 책을 덮을 때 맞이하는 성취와 울림
‘서재 27’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한 도민들이 전해온 이야기들은 고전 완독이 삶에 가져다주는 깊은 변화를 증명한다.
“퇴근 후 의미 없이 스마트폰만 보던 일상이었는데, 매일 정해진 분량을 읽고 밑줄 친 문장을 공유하면서 일상에 단단한 리듬이 생겼습니다. 혼자였다면 절대 읽지 못했을 벽돌책을 내 손으로 끝까지 덮었을 때의 성취감은 비할 데가 없습니다.”
거제도서관 제인 오스틴 북클럽에 참여한 한 도민은 “결혼 후 거제로 와서 아이를 키우고 바쁘게 사느라 잊어가고 있던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며, “옛 인물들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나와 타인을 결론 내리지 않고 이해해 나가는 진짜 관계의 지혜를 얻었다”는 감동적인 서평을 남기기도 했다.
참여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읽고 있다’는 단단한 유대감, 어려운 책을 마침내 읽어냈다는 자기효능감, 그리고 단조롭던 일상에 인문학적 깊이가 더해졌다는 삶의 위안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고전은 서가에 머물러 있는 오래된 책이 아니라, 시민들의 일상 한가운데서 소통하는 ‘살아있는 텍스트’로 다시 태어났다.
도서관이 만들어가는 인문학의 지형: 소장 공간에서 연결의 플랫폼으로
경남교육청 공공도서관이 함께 추진하는 ‘서재 27’은 단순한 일회성 독서 캠페인에 그치지 않는다. 이 프로젝트는 도서관을 ‘책을 보관하고 대출하는 공간’에서 ‘사람과 고전, 그리고 지역사회의 사유가 깊게 연결되는 인문학 플랫폼’으로 재정의하는 의미 있는 시도다.
도서관 서가에서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던 고전들이 사서들의 세심한 기획과 도민들의 독서 열정을 통해 세상 밖으로 활기차게 걸어 나오고 있다. 한 사람의 독자가 고전을 완독하며 얻은 인문학적 성찰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지역사회 전체로 따뜻하게 퍼져나갈 것이다.
고전의 첫 페이지를 펼치는 일은 여전히 무겁고,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의 과정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그러나 경남의 27개 공공도서관이 마련한 이 다정한 공동 완독의 장 안에서는 더 이상 외롭게 포기할 필요가 없다.
오늘도 경남교육청 사서들은 벽돌책을 마주한 도민들에게 다정하게 함께 읽자며 손을 건넨다. 혼자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고전 완독의 기쁨을 향해, 27개의 서재에서 함께 책장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박수정 사서주무관
경상남도교육청 창의인재과 사서 주무관으로 일하고 있다.
20년간 공공도서관 현장에서 책과 사람을 이어온 사서이다. 도서관이 단순한 읽기 공간을 넘어 도민의 삶에 닿는 인문 플랫폼이 되도록 독서 진흥 정책을 수립하고 현장을 연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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