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그는 머리를 산뜻하게 잘라 한결 시원한 인상이었다. 이시바시 씨는 섬세한 사람이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섬세함은 글에만 있지 않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다. 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오래 기억하고, 다시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는 일에 그는 늘 진심으로 정성을 들인다. 이번에도 그랬다. 바쁠 텐데도 책을 부치지 않고 굳이 직접 들고 왔다.
“그냥 책만 전해드리고 갈게요.”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왕 만났으니 자리를 잡고 앉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동안 어디를 다녔는지, 어떤 서점에 들렀는지, 무엇을 보고 왔는지. 그리고 어머니의 병환은 좀 어떠신지, 아내는 건강한지. 그런 이야기를 천천히 나누고 싶었다. 그와는 늘 일 년에 두어 차례, 이렇게 뭉텅이 시간을 내어 서로의 근황을 나누어왔다.
이시바시 씨와 처음 만난 것은 2015년, 내가 진보초에 책거리를 열었을 때였다. 그러니 올해로 벌써 10여 년째 이어지는 인연이다. 그사이 우리는 함께 한국으로 문학기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책거리에서 진보초의 여러 책방 주인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벤트를 꾸려오기도 했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는 굳이 책을 들고 직접 나를 찾아온 것일 테다.
그가 가져온 책의 제목은 ‘책은 죽지 않는다’였다. 이 책은 내게 조금 특별하다. 이 책이 태어나던 아주 초기의 한 장면에 나도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절, 한국의 도서관 전문 웹사이트 ‘더 라이브러리’에서 일본의 책과 독서, 서점과 도서관에 관한 글을 연재하기로 했을 때 나는 이시바시 씨를 필자로 추천했다. 그의 글을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도 관여했다. 그렇게 일곱 차례의 연재가 이어졌다.
그때는 이것이 한 권의 책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 편의 글을 부탁하고, 그것을 번역하고,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일이 전부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책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한 편의 글이 다음 글을 부르고, 한 사람과의 만남이 또 다른 사람을 불러온다. 그렇게 작은 인연이 어느 순간, 우리가 처음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곳까지 흘러간다.
더 라이브러리 연재가 끝나갈 무렵 혜화1117의 이현화 대표에게 이 연재 이야기를 전했고, 그렇게 책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이시바시 씨 자신도 이번 책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 글에서 더 라이브러리 연재를 이 책의 출발점으로 꼽고 있다.
이시바시 다케후미, 혜화 1117 제공
언어와 언어를 이어주는 AI의 다리를 건너, 선명하게 남는 것은 ‘사람’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이다. 나는 처음에는 당연히 내가 중간에서 통역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시바시 씨는 한국어를 못 하고, 이현화 대표와 세부적인 편집 논의를 하려면 누군가는 그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나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두 분이 직접 해보세요. 요즘 AI는 빠르고 정확해요. 제가 끼면 오히려 늦어질 거예요.”
정말로 두 사람은 그렇게 했다. 일본어와 한국어. 상대의 언어를 충분히 하지 못하는 저자와 편집자가 번역 애플리케이션과 AI를 사이에 두고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메일은 어느새 일본어와 한국어가 나란히 적힌 이중언어 문서가 되었고, 두 사람은 계약서를 주고받고, 원고의 방향을 의논하고, 고치고 또 고쳐나갔다.
그 과정은 결코 매끈하지 않았다. 원고 마감을 두고 서로 애를 태웠고, 메일이 오가지 않아 몇 달 가까이 연락이 끊긴 적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오해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다가, 뒤늦게야 어떤 오류로 이메일이 아예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현화 대표가 “나는 당신의 성실함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좋은 책을 만듭시다”라고 전하면서 두 사람의 작업은 다시 궤도에 올랐다.
나는 이 대목이 참 좋았다.
우리는 흔히 AI가 책을 죽일 것인지, 번역가를 대신할 것인지, 출판을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AI와 번역 앱은 사람을 대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어를 못 하는 일본인 저자와, 일본어가 모국어가 아닌 한국인 편집자가 서로에게 가닿기 위한 작은 다리가 되어줄 뿐이다. 그리고 그 다리를 건너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다.
편집자가 원고를 읽고 “여기는 더 쓸 수 있지 않을까요?” 하고 묻는다. 저자는 이미 써놓은 글을 처음부터 다시 고친다. 한 부분을 고치면 수십 줄 뒤의 문장과 울림이 달라져 또다시 손을 본다. 그렇게 이시바시 씨는 기존 원고의 대부분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다시 썼고, 그중 절반가량은 아예 새로 썼다.
AI 시대의 책 만들기라고 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AI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얼마나 집요하게 읽고, 고치고, 기다리고, 상대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는가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20년의 시공간을 넘어 되살아난 기억과 경험의 공간, 책
그날 책거리에서 우리는 나이 드는 일과 쓰는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쓰는 일이야말로 나이가 들어도 혼자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일조선인 소설가 김석범 선생 이야기를 꺼냈다. 백 살이 되어서도 단편소설을 써 문예지에 발표했던 분이다. 그러자 이시바시 씨가 뜻밖의 말을 했다.
“저도 김석범 선생 출판기념회에 간 적이 있어요. 20년쯤 전에.”
“혹시 우에노에서 열렸던 헤이본샤 《김석범 작품집》 출판기념회요?”
그렇다고 했다. 놀랐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따져보니 2005년의 일이었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채 같은 공간에 있었다. 김석범이라는 한 작가의 책을 축하하기 위해 같은 자리에 있었던 두 사람이, 그로부터 20년 뒤 도쿄 진보초의 작은 한국책방에 마주 앉아 다시 김석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시바시 씨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당시 자신이 쓴 기사의 PDF를 찾아 보내주었다. 그 순간 나는 ‘책은 죽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조금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책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종이책이 전자책에 밀리지 않는다거나, 서점이 사라지지 않는다거나, 사람들이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을 것이라는 선언만은 아닐 것이다. 책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는다.
스무 해 전 어느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있다. 그날 쓴 기사는 컴퓨터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20년 뒤, 누군가의 한마디로 그 기억이 다시 호출되었다. 한 권의 책 때문에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서로를 몰랐던 두 사람이, 훗날 다른 한 권의 책을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책이 살아가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시바시 씨는 이 책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다녔던 이동도서관,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방, 자신을 책의 세계로 이끈 장소와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그에게 책은 책장에 꽂힌 물건 하나가 아니라 사람과 장소와 시간이 겹겹이 포개진 기억의 공간이다. 실제로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는 단순히 ‘읽은 책’이 아니라, 자신을 책과 만나게 해준 ‘공간’을 써보라는 편집자의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책은 죽지 않는다》를 읽다 보면, 책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한 사람이 책과 함께 어떻게 나이를 먹어왔는지를 곁에서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서평을 쓰는 사람으로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본 대목이 있다. 이 책의 맨 끝에 실린 편집자의 코너다. 이 책이 어떻게 기획되었고, 저자와 편집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원고를 주고받았으며,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기까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편집자가 시간축을 따라 담담히 기록해두었다. 본문만 읽어서는 보이지 않던 제작의 뒷면이, 이 코너를 통해 비로소 드러난다. 앞서 이야기한 이메일 불통 사건이나, 원고를 절반 가까이 다시 쓰게 된 사정도 실은 이 편집자 후기를 통해 내가 알게 된 것들이다. 책을 만든 사람의 목소리로 책이 태어난 경위를 함께 실어두는 것은 혜화1117 특유의 편집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 혼자의 기록이 아니라, 저자와 편집자가 함께 써 내려간 두 겹의 기록으로 읽힌다.
책은 죽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며 다시 살아난다
나는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팔아왔다. 그러면서 점점 확신하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책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 뒤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다. 쓰는 사람, 만드는 사람, 옮기는 사람, 파는 사람, 읽는 사람. 그리고 때로는 한 권의 책을 누군가에게 직접 건네주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이시바시 씨가 책거리까지 직접 찾아온 것도 어쩌면 이 책의 내용과 꼭 닮아 있다. 책은 택배로 부치면 하루 만에도 도착한다. 파일은 몇 초면 바다를 건넌다. AI 번역은 일본어를 순식간에 한국어로 바꾸어놓는다. 《책은 죽지 않는다》 자체가 바로 그런 새로운 기술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책이다. 저자와 편집자는 서로의 언어를 충분히 말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지만, 번역 앱을 매개로 국경을 넘어 한 권의 책을 완성해냈다.
그런 시대인데도 이시바시 씨는 책 한 권을 들고 굳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것이 좋다.
효율만 따진다면 필요 없는 시간이다. 하지만 책의 세계에는 바로 그런 ‘필요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책을 건네고, 커피를 마시고,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아내의 소식을 듣고, 오래전에 읽은 작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하며 놀라는 시간. 그런 시간이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이시바시 씨는 책 속에서 “책을 쓰는 것은 어둠 속에 공을 던지는 것과 같다”는 문장을 남겼다. 나는 그 말에 한마디를 보태고 싶다. 어둠 속으로 던진 공은 때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돌아온다. 20년 전 우에노에서 던져진 공이 진보초의 책거리로 되돌아왔듯이. 코로나 시절 한국의 웹사이트에 연재했던 일곱 편의 글이 몇 년 뒤 376쪽짜리 한 권의 책이 되어 다시 내 앞에 놓였듯이.
그러니 책은 죽지 않는다. 누군가 읽고 기억하는 동안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이 사람을 만나게 하고, 그 만남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가 다시 책이 되는 일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책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며,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난다.
김승복_쿠온출판사 대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후 일본 니혼대학 예술학부에서 문예평론을 전공했다. 일본 도쿄 진보초 고서점 거리에서 한국문학 전문 '쿠온출판사'와 서점 '책거리'를 운영하고 있으며 K-BOOK 진흥회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결국 다 좋아서 하는 거잖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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