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대학교는 미국의 독립 이전에 세워진 아홉 개의 대학 중 네 번째로 1746년에 세워졌다. 서울대학교의 개교가 1946년이니까 정확하게 200년 차이가 나는 28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통 30년을 한 세대로 치는 기준으로 세어보면 아홉 세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고, 프린스턴대학교가 개교했을 당시 조선에서는 영조 치세 22년째에 들어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긴 역사를 더 실감할 수 있다.
대학의 역사가 길다는 것은 그만큼 대학의 기록물도 많다는 것이며, 대학의 역사 기록물이 보존된 대학 아카이브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잊힌 것을 재발견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린스턴대학교는 한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대학이기는 하지만, 이 대학이 19세기 말부터 한국의 역사에 꽤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프린스턴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학 도서관에 한국 장서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이들도 여전히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프린스턴대학교와 한국의 인연에 대한 인식을 좀 더 넓히고자 19세기 말에 프린스턴을 졸업한 한인 유학생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필자가 프린스턴대학교에 와서 시작했던 일 중의 하나는 고서나 귀중 자료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한국학 사서가 없던 시절에는 그런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한된 조사나마 서양 또는 중국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정조 때 편찬되고 규장각 장서인이 찍힌 《규장전운(奎章全韻)》은 이미 오래전에 보존을 이유로 한지로 된 원래 표지는 제거되고 서양식 하드커버로 대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조사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한 고서의 표지에서 ‘Prince Suhr’가 1899년에 기증한 것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책은 중국 도교에 관련된 여러 책에서 인용한 문구를 필사한 것으로, 책을 장정한 방식과 종이가 한지라는 사실만 한국과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당시 외국의 어느 왕자가 기증한 기금으로 구입했겠거니 기록만 하고 넘어갔다. 조사를 계속하면서 같은 메모가 적힌 책을 몇 권 더 발견할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그 왕자가 누구일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1899년과 ‘Suhr’라는 이름을 단서로 도서관의 기록물을 조사해나가던 중, 1899년 프린스턴대학교 학보에서 그 인물이 한국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 그 기사에는 Kiu Beung Suhr라는 사람이 대학에 한국 장서를 기증했다고 되어 있었다. 도서관에 소장된 책 표지 뒷면에 남겨진 메모·내용과 시기가 일치했고, 이는 그 수수께끼의 인물에 대해 오랜 기간 조사를 하게 되는 시작점이 되었다. 다만 당시 기록된 영문 철자로 한국 이름을 올바르게 복원해내는 과정은 마치 암호를 해독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프린스턴대학교에 한국 장서가 소장되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부터 시작된 여정의 출발이기도 했다.
한국 장서 기증 소식을 전한 프린스턴 학보 〈데일리 프린스토니언〉 1899년 5월 8일자 기사.
대학 아카이브는 대학의 역사를 기록하는 곳이니만큼 과거 재학생들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아직 생존해 있는 졸업생의 기록은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접근이 불가능하지만, 사망한 졸업생의 자료는 1974년에 제정된 ‘가족 교육권 및 프라이버시 보호법(FERPA)’을 근거로 아카이브를 방문하는 모든 연구자들에게 공개된다.
물론 이 법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자료 접근이 훨씬 까다로웠다. 법적 근거가 없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보호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1970년대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학적 기록을 열람하고자 프린스턴대학교 아카이브를 방문했으나, 대학 측이 이미 고인이 된 이 전 대통령의 허가를 대신할 가족의 동의를 요구하는 바람에 조사를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명확한 법적 근거와 체계적인 검색 시스템 덕분에 연구 환경이 비약적으로 개선되었다. 인물의 영문 철자와 정확한 이름을 알고 있다면 조사는 한층 더 수월해진다.
암호 같았던 이름, ‘Kiu Beung Suhr’
대학 아카이브의 기록에 의하면 Kiu Beung Suhr는 1899년에 정치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카이브에 보관된 Kiu Beung Suhr의 폴더 안에는 재학 당시의 기록물은 없었지만, 1971년에 안나 체스넛(Anna S. Chesnutt)이란 사람과 대학 아카이브가 교신한 편지가 있었다. 그 편지에 의하면 안나는 Suhr의 딸이고 아버지의 생애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프린스턴대학교에 있는 자료를 열람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는 자녀들에게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 잘 이야기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대학에서 보낸 편지에서는 남아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당시에 발행된 대학 편람에 그의 이름과 학부에 대해 ‘버지니아에 있는 로노크대학(Roanoke College)을 졸업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었다. 대학 편람의 기록은 큰 실마리가 되었다. 덕분에 로노크대학으로까지 조사 범위를 넓힐 수 있었고, 로노크대학과 Suhr에 관련된 당시 신문기사도 여럿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Kiu Beung Suhr는 한글로 각각 ‘규, 병, 서’라는 것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Suhr의 이름은 ‘서규병’이라고 생각하며 조사를 계속했지만 다시 또 한참 실마리가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다시 연결고리를 찾게 된 것은 서재필의 영문 이름 덕분이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영어 이름을 ‘Philip Jaisohn’으로 썼는데, 이는 한국 이름을 영어로 바꾼 것이다. 다만 요즘처럼 차례를 이름과 성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아예 한글 배열 순서를 거꾸로 ‘필재서’라고 해서 그것과 가까운 발음의 ‘필립 제이손’으로 했던 것이다. Kiu Beung Suhr의 영문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정확한 한국어 이름은 ‘서규병’이 아닌 ‘서병규’였던 것이다.
그제야 그와 관련된 한국어로 된 자료들이 검색 범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기 한인 재미 유학생들을 연구하면서 서병규를 언급한 논문들도 있었고, 서병규가 최초의 조선인 이민에 관여하였다는 언급도 있었다. 확인을 위해 찾아본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에서 그의 이름과 함께 한자 ‘徐丙珪(서병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종실록 1902년의 한 기사에 의하면 서병규는 수민원의 총무국장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었고, 수민원은 바로 대한제국에서 이민을 관장한 기관이었다.
대학 편람에서 Suhr의 학부 출신 대학으로 기재된 로노크대학은 버지니아주 세일럼에 위치한 작은 사립대학이었다. 당시 로노크대학은 서병규를 시작으로 김규식, 의친왕 이강 등 대한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조금씩 늘어나던 곳으로, 초기 한인 유학생들에게는 미국 내 학문의 요람 같은 곳이었다. 로노크대학 도서관에 의하면 19세기에 입학한 한인 유학생이 이미 10명이나 되었다. 서병규는 프린스턴이라는 더 큰 무대로 나아가기 전, 이곳에서 먼저 미국 대학 교육의 기초를 닦았고, 한인 학생들과 공동체를 이루었고, 동시에 미국 사회와도 교류했다. 당시 로노크대학은 총장 율리어스 드레허 박사의 영향으로 그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서병규 역시 그 안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서구 사회에 소개하려 주도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로노크대학에 재학 중이던 1894년과 1898년 사이의 신문기사들을 종합해보면 서병규는 ‘지적이고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예의 바르고 온화한 성품의 청년’이었다. 본인은 영어가 어렵다고 했음에도 학업에서는 뛰어나 상도 많이 받았다. 한국에 대해 알리는 것도 적극적이어서 교내 학보에 한국에 관한 글도 몇 편 게재하였다. 성공적인 학부 생활을 마친 후 졸업식에서 연사 중 한 명으로 뽑혀서 ‘사회 속의 개인’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는 영예까지 얻었다. 그가 학부 시절부터 보여준 이러한 자질들은 훗날 프린스턴에서 고국을 위해 정치학을 전공하고 또 한국 장서 기증으로도 이어지는 그의 행보와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로노크대학에서의 기록은 프린스턴이라는 더 넓은 무대로 나아가기 위해 쌓아 올린 지적 성장이자 고국을 향한 책임감을 구체화해 나간 토대였다.
1899년 Prince Suhr 기증. 서병규가 기증한 장서 표지 안쪽에 적혀 있는 기증 기록과 날짜 도장.
프린스턴에 온 왕자(Prince at Princeton)
조사의 시발점이 된 메모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러면 왜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던 사서는 기증 책 표지에 ‘Prince Suhr’라고 기록했을까? 정확한 사실은 이제 역사의 흐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프린스턴 동문회지에서 찾은 또 다른 기록에서 연관성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다. 1898년의 동문회지에서는 ‘Corean Prince at Princeton’이라는 제목의 글로 입학 예정인 한 특별한 학생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서병규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 훗날 대통령이 되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우드로 윌슨 교수에게서 정치학을 배울 것이라고 소개했다. 덧붙여 서병규는 졸업 후 나라를 위해 일하려 정치학을 전공한다고 전하고 있었다.
이 글을 쓴 기자가 ‘Corean Prince at Princeton’이라는 제목을 붙인 의도는 아마도 서병규가 양반 출신이란 것에 착안하여 ‘프린스턴에 온 왕자(Prince at Princeton)’라는 언어유희를 완성하기 위해 Prince라는 단어를 쓴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언어유희의 성공 여부를 떠나 서병규를 소개한 기자 덕분에 그의 유학 목적도 알게 되었고, 마침내 그 목적을 고국에서 어느 정도 이루었다는 것과 프린스턴대학교가 역사의 톱니바퀴 속에서 19세기에 이미 한국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프린스턴의 첫 한인 유학생, 서병규
이상으로 서병규의 초기 생애에 대해 요약하자면, 그는 대한제국에서 온 한인 유학생으로 로노크대학을 졸업한 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1899년에 한인으로서는 첫 석사학위를 정치학으로 받은 후 고국으로 돌아가 정부 관리로 임용되어 한인 초기 이민에 관여하였다. 이렇게 쓰면 간단해 보이지만 ‘Prince Suhr’라는 메모를 발견한 이후 서병규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그의 행보를 확인하기까지는 5년 이상이 걸린 일이었다. 그래도 첫 한인 유학생을 1910년에 졸업한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 여기고 있던 대학 내 역사 인식을 바로잡아, 그보다 10여 년을 앞당겨 19세기에 서병규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¹⁾ 그 이후로도 미국에서의 그의 행보와 그와 관련되어 알게 되는 일화들이 매년 하나둘씩 늘고 있다. 언젠가 이어지는 이야기도 쓸 기회가 있기를 희망해본다.
프린스턴 대학교 한국학 사서로 재직 중이다. 한국 관련 고문헌 조사 및 디지털 인문학 프로젝트에 오랜 관심을 가져왔다.
주요 활동으로는 동아시아 도서관 협의회 한국학 자료 위원회 회장(2023-2026), 북미 한국학 장서 컨소시엄 회장(2020-2022) 등을 역임하였다.
프린스턴 대학교 소장 한국고서 연구조사, 럿거스 대학 소장 그리피스 컬렉션 연구조사, 일제시기 동아시아 연속간행물 DH 프로젝트 등
국내외 기관의 후원을 받은 다수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으며, 한국어 로마자 자동화 프로그램 K-Romanizer를 개발하였다.
아이의 질문, 사서의 고민“아빠, 사서는 무슨 일을 해?”“그게…… 그러니까…… 어떤 사서는 세상의 수많은 책 중 자기 도서관에 꼭 필요한 것을 골라내고, 어떤 사서는 그 책을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기록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사람들이 공부하다 막힐 때 길을 찾아주기도 하고…….” 주제사서라는 직업상 학생이나 연구자들로부터 까다로운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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