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러니까…… 어떤 사서는 세상의 수많은 책 중 자기 도서관에 꼭 필요한 것을 골라내고, 어떤 사서는 그 책을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기록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사람들이 공부하다 막힐 때 길을 찾아주기도 하고…….”
주제사서라는 직업상 학생이나 연구자들로부터 까다로운 질문을 받는 것은 일상이다. 교내 학생들이나 연구자들에게서 질문이 오는 것은 물론, 때로는 한국이나 외국에서 날아온 낯선 이의 이메일이 편지함을 채우기도 한다. 질문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오게 마련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나의 업무이긴 하지만,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아이가 던진 이 소박한 질문 앞에서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하거나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사서라는 직업은 한마디로 정의하기엔 스펙트럼이 너무나 넓다. 문헌정보학과 신입생이었더라면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조목조목 설명했겠지만,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려니 적절한 단어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혹여 낡은 고정관념을 심어줄까 조심스러웠고, 그렇다고 연구대학 도서관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설명하자니 중간에 하품을 할 게 뻔했다. 직업병이랄까, 어린이용 직업 백과사전을 조사해봐야 하나 생각할 만큼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고 했지만, 아이의 표정은 답을 찾은 듯한 얼굴이 아니다. 아마도 아이가 알고 싶었던 건 ‘정의’가 아니라 아빠의 ‘하루’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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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과의 시작은 이메일로
“아빠는 아침에 학교 가서 뭐 해?”
“아침에? 제일 먼저 컴퓨터를 켜서 밤새 온 이메일을 확인하고 답장을 쓰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한국학 사서로 재직한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은 아침 루틴이다. 한국학 사서를 비롯하여 중국학과 일본학 사서들의 시계는 반 바퀴쯤 다르게 돌아간다. 내가 잠든 사이, 시차가 있는 한국의 자료 공급 업체나 도서관 관계자 또는 여러 기관 등으로부터 온 메일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즉각 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처리하고 좀 더 조사가 필요한 이메일은 분류해서 데드라인을 설정한다. 꼼꼼히 기록해두지 않으면 쏟아지는 이메일 속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배웠다. 하루 업무 일과가 어떻게 마무리되는지는 늘 다르지만, 하루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는 늘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 발견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프린스턴 학생들의 이메일 습관이다. 외국에 나가 있는 학생들을 제외하면 나와는 시차가 전혀 없을 테지만, 수업과 리포트 마감에 쫓기는 학생들은 대개 평일 밤늦게나 금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질문을 보낸다. 나 역시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그 절박함을 모르지 않았고, 초기에는 곧바로 답을 주곤 했다. 하지만 주말이나 퇴근 후 시간까지 반납하며 실시간 답장을 보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절한 거리두기를 통해 업무 시간의 기준을 보여주는 것이 학생들에게도 전문적인 소통 방식을 배우는 계기가 된다고 믿는다. 가끔은 주말 면담을 요청하는 당돌한 학생도 있지만, 긴급한 사안이 아니라면 월요일 아침 정중한 답변으로 일과를 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사서의 협업: 혼자 일하지만 혼자가 아닌 공간
“하루 종일 컴퓨터만 해?”
“아니, 컴퓨터를 보다가도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해.”
주제사서 제도가 아직 정착하지 않는 한국에서도 생소하겠지만, 어릴 때부터 공공도서관을 다니며 자라온 보통의 미국 사람들에게도 대학교의 한국학 사서라고 하면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게 당연하다. 사서의 일은 본질적으로 ‘연결’이라고 생각한다. 책과 사람을 잇는 것뿐만 아니라 특정 학문 분야의 전문 지식과 도서관의 방대한 자원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팬데믹 이후 온라인 미팅이나 이메일 상담이 비약적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도서관 운영의 핵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이 있는 소통에 있다. 그래서 필자는 가능하면 이메일보다는 직접 상담을, 직접 상담 중에서도 화상 통신을 이용한 비대면 상담보다는 대면 상담을 선호한다.
리포트를 위해 면담을 신청하고 찾아온 학생들과의 대화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떤 수업에서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는지, 현재 어떤 자료를 찾지 못해 어려워하는지를 파악하여 주제와 관련된 책이나 데이터베이스를 제시한다. 때로는 서가 사이를 함께 걸으며, 혹은 온라인 서가를 함께 탐색하며 서지 목록에는 다 담기지 않은 자료의 맥락을 설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외부 도서관에 흩어진 자료를 추적해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학술 생태계에 맞춰 어떤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할지, 우리 대학의 연구 방향에 맞게 한국학 중 어떤 분야의 장서를 집중적으로 확충할지 하는 결정도 늘 해야 한다. 대학원생들이 박사 논문을 완성하기까지 그 이면에는 주제사서와의 질의응답과 자료 탐색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연결은 비단 이용자와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제사서와는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목록사서라고 하면 서고 깊숙한 곳에서 정적으로 책과 씨름하는 모습만 상상하지만, 실제 업무 현장에서는 새로운 서지 기술 표준을 어떻게 현장에 적용할지, 인공지능과 디지털 환경에 맞춰 방대한 데이터를 어떻게 구조화하고 관리할지 결정하기 위해 도서관 내부에서는 온종일 도처에서 각종 회의가 이어진다. 흔히 비유되듯, 이용자의 접점에서 연구를 돕는 주제사서가 ‘외교관’과 같다면, 목록사서는 도서관이라는 데이터 세계를 설계하고 유지하는 ‘엔지니어’이자 ‘건축가’에 가깝다. 도서관이라는 하나의 유기체가 멈추지 않고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서로의 의견을 묻고 조율하며 보이지 않는 그런 ‘연결’을 끊임없이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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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사서의 노동
“도서관에서 사서를 만난 적이 없는데…… 어디서 일해?”
“도서관에 가면 책 빌리는 곳 뒤에 방이 있는 거 봤지? 밖에선 안 보이지만 그 안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분들이 있어. 너희가 편하게 도서관 쓸 수 있게 열심히 일하고 있단다.”
미국 아이들이 공공도서관 이용에 익숙하긴 하지만 실제로 사서들이 하는 일을 접할 일은 거의 없다. 사서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사서들뿐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도서관의 업무가 고도화될수록 이용자에게 사서의 존재는 점점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사서가 자신의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한 순간은, 이용자 자신이 사서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원하는 정보를 손에 쥐고 도서관을 나서는 때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성공은 사서에게 자부심인 동시에 딜레마이기도 하다. 정교하게 설계된 데이터베이스와 편리한 검색 시스템, 그리고 잘 선별되고 조직된 장서 뒤에는 수많은 사서들의 보이지 않는 지적 노동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러나 서비스가 매끄러울수록 사용자에게 사서의 존재감은 마치 공기처럼 필수적이면서도 투명해진다. 실제로 문헌정보학계의 연구를 살펴보면, 많은 대학에서 사서라는 전문 인력이 제공하는 ‘서비스’ 자체보다는 이용 통계나 자료의 활용과 같은 ‘결과’의 정량화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¹⁾그 결과 사용자들에게 사서는 학문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핵심 전문직이라기보다, 단순히 자료를 전달하는 보조적 존재로 오해받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의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학술 논문의 주제가 될 정도로 오늘날 도서관계가 여전히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이긴 하다.
공공도서관을 즐겨 이용하는 아이가 사서를 본적이 없다고 한다. 어쩌면 그것이 그곳 사서들이 일을 잘 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보여주지 못한 아빠의 현장
미국에는 매년 4월 넷째 목요일, 자녀를 직장에 데려가는 날(위키피디아, ‘Take Our Daughters and Sons to Work Day’)이 있다.²⁾ 1992년 처음으로 여학생들의 직업적 성장과 비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작된 이 행사는 이제 성별에 관계없이 아이들이 부모의 전문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교육의 장이 되었다. 일선 학교에서도 이날은 공식적인 체험 학습으로 인정해준다.
자녀를 직장에 데려가는 날은 미국에서 아이와 부모의 직장 경험이 잠시 겹쳐지는 시간이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CC BY-SA 4.0)
한국적인 정서가 몸에 밴 필자로서는 아이를 직장에 데려가 동료들에게 소개하고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왠지 쑥스럽고 결심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니 한 번쯤은 아이의 손을 잡고 내 사무실 책상을, 동료들과 업무 협업을 하는 모습을, 그리고 서가 사이를 같이 걸으며 도서관에 잘 모아둔 보물을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이에게 해준 장황했던 내 설명은 결국 사서라는 일의 겉면만 훑었을 뿐이다.
사서가 무슨 일을 하냐고 묻던 아이는 이제 훌쩍 자라서 더 이상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다시 그때의 꼬맹이가 지금의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차라리 아빠의 평범한 하루 일과를 같이 보내는 것이 어쩌면 사서라는 직업을 어린아이가 제 나름으로 이해하는 통로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각주
1) Clarke, R., Stanton, K., Grimm, A., & Zhang, B. (2022). 보이지 않는 노동, 보이지 않는 가치: 대학 도서관 가치에 대한 전통적 평가 방식의 분석(Invisible Labor, Invisible Value: Unpacking Traditional Assessment of Academic Library Value). College & Research Libraries, 83(6), 926.
2) Wikipedia contributors. (n.d.). Take Our Daughters and Sons to Work Day. In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접속일: 2026년 5월 4일, https://en.wikipedia.org/wiki/Take_Our_Daughters_and_Sons_to_Work_Day
이형배_프린스턴대학교 한국학 사서
프린스턴 대학교 한국학 사서로 재직 중이다. 한국 관련 고문헌 조사 및 디지털 인문학 프로젝트에 오랜 관심을 가져왔다.
주요 활동으로는 동아시아 도서관 협의회 한국학 자료 위원회 회장(2023-2026), 북미 한국학 장서 컨소시엄 회장(2020-2022) 등을 역임하였다.
프린스턴 대학교 소장 한국고서 연구조사, 럿거스 대학 소장 그리피스 컬렉션 연구조사, 일제시기 동아시아 연속간행물 DH 프로젝트 등
국내외 기관의 후원을 받은 다수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으며, 한국어 로마자 자동화 프로그램 K-Romanizer를 개발하였다.
시각장애인들의 독서 도우미, 말하는 책 기계지난 몇 년간 도서관에서 벌금을 없애자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활발히 이어져왔다. 그 결과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의 많은 도서관들이 늦게 책을 반납한 이용자에게 부과하는 벌금을 완전히 폐지했다. 벌금 없는 도서관은 사람들이 도서관에 접근하는 데 경제적인 장벽을 없앨 뿐 아니라, 벌금이 누적되는 것에 대한 두려
새로운 시대의 거점이 왜 도서관이어야 하는가?The Liverary는 2025년 6월 4일 새정부 출범을 기해 새정부에 바라는 도서관 정책, 도서관 인들이 향후 논의해야 할 이슈와 아젠더를 제안하는 전문가 칼럼 코너를 마련하였다. 문헌정보학자, 현직 도서관 사서, 협회장 등 총 네 분의 필자가 참여하는 이 칼럼을 통해 도서관이 AI 시대 지식정보의 허브
어린이도서관이라도 지키자우리 집 둘째는 태어날 때 숨을 못 쉬었다. 청색증이라는 단어는 그때 처음 들었다. 조선시대였으면 아마 아이도 죽고 아내도 죽었을 것 같다. 2016년 총선 때 어찌하다 보니까 나는 민주당의 정책을 총괄하고 있었다. 아이가 세 살 때 폐렴으로 병원에 두 번째 입원을 했는데, 순천에 가는 비행기에서 ‘선거가 끝나고 나면 아픈 아이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