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에서 전해진 한 소식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서울 서촌에서 운영해온 작은 독립서점 ‘책방오늘’이 문을 닫았다는 뉴스였다. 건물 매각 이후 달라진 임대 여건을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고 한다. 7년 전 프린스턴대학교의 초청으로 방문해서 낭독회를 했던 작가의 모습을 기억한다. 당시 동아시아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던 그녀의 소설책에 정성스럽게 남겨준 사인이 여전히 도서관 서가에 소중히 보존되어 있기에, 멀리서 들려온 이 소식은 유독 남다르게 다가왔다. 세계적인 문학적 명성을 지닌 작가의 서점조차 임대료와 부동산의 논리 앞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이 씁쓸한 잔상을 남겼다.
생각해보면 한국 대학가의 독립서점들도 오래전부터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내가 학생이던 시절,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일상화되기 전 서울대학교 정문에서 한참 걸어 나오면 마주치던 인문사회과학 서점 ‘그날이 오면’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공간만이 아니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서점 한쪽 게시판에 ‘먼저 어디로 간다’는 쪽지를 남겨두곤 했다. 뒤늦게 온 사람은 게시판에 붙은 쪽지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때로는 약속이 없어도 ‘오늘 혹시 학과나 동아리 사람들이 나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무심히 게시판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자연스럽게 서가 사이를 거닐며 책장을 넘겼다. 기다림은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라 우연히 책과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되었다. 오늘날의 빠르고 효율적인 디지털 환경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완만하고 다정한 아날로그 시대의 풍경이었다. 많은 대학가 서점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날이 오면’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치열한 상업적 압박 속에서 하나의 공간이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낸다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 알기에, 그 존재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한국의 소식을 접하며 자연스럽게 내가 있는 프린스턴 타운의 나소 스트리트(Nassau Street)를 돌아보게 되었다. 프린스턴대학교 정문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독립서점 ‘라비린스 북스(Labyrinth Books)’가 매일 당연한 듯 문을 여는 풍경은 사실 전혀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미국 전체를 통틀어도 드문 예외에 가깝다.
대학 서점이 ‘기념품점’이 된 시대
미국 역시 오프라인 서점의 몰락을 고스란히 겪었다. 프린스턴 타운에서도 약 25년 동안 학자와 학생,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독립서점 ‘미코버 북스(Micawber Books)’가 2000년대 중반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2007년까지 25년간 프린스턴대학교 정문 앞 나소 스트리트 110번지에 있었던 독립서점 미코버 북스. (출처: Pinterest)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다른 큰 변화는 공식 대학 서점들의 ‘체인화’였다.
예일대, 하버드대, 펜실베이니아대학교, MIT를 비롯한 여러 주요 대학은 2000년대 이후 공식 대학 서점의 운영을 ‘반즈앤노블 컬리지(Barnes & Noble College)’나 ‘폴렛(Follett)’ 같은 대형 상업 체인에 맡겼다. 대학마다 구체적인 사정은 달랐지만, 체인화 이후 서점이 향한 방향은 대체로 비슷했다.
수익성이 낮은 인문·학술 서적의 비중은 줄어들고, 그 자리는 대학 로고가 크게 박힌 후드티와 모자, 텀블러, 각종 기념품과 대중적인 베스트셀러가 채웠다. 대학 서점이 관광객과 신입생을 위한 ‘대학 기념품점’으로 변해간 것이다.
교재 구매마저 대형 체인의 온라인 시스템으로 일원화되면서, 대학 정문 앞에서 교수가 추천한 학술서와 비평서를 직접 펼쳐보고 뜻밖의 책과 마주치는 경험도 점차 사라졌다.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책을 온라인으로 주문해 수령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학술 출판사들도 중요한 오프라인 거점을 잃었다. 서점의 진열대에서 독자를 만날 기회가 줄어들자 인문학과 사회과학, 예술 분야의 전문서는 더욱 좁은 시장으로 밀려났다. 학술서가 팔리지 않으니 서점은 학술서를 줄이고, 서점에서 학술서가 보이지 않으니 독자는 그런 책의 존재를 알기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프린스턴대학교와 라비린스가 선택한 방식은 현실적이면서도 독특했다. 독립서점의 가치를 칭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서점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는 점이 달랐다.
라비린스를 지탱한 상생적 구조
2007년 라비린스가 프린스턴의 나소 스트리트에 문을 열었을 때, 대학은 교내 협동조합 매장인 유스토어(U-Store)가 갖고 있던 공식 교재 판매권을 이 독립 학술서점에 이관했다. 매 학기 수천 명의 학생이 구매하는 필수 교재 시장을 제공함으로써 서점이 자립할 수 있는 매출 기반을 만들어준 이 결단은, 당시 미국 출판업계(Publishers Weekly 등)에서도 대형 체인화에 맞선 ‘대학-독립서점 공존 모델’로 주목을 받았다. 나아가 대학은 2012년 이후 라비린스와 협력해 모든 수강 교재에 30퍼센트 할인을 적용했고, 대학이 이 서비스의 재원을 지원함으로써 학생들의 부담을 낮추는 동시에 서점이 학술도서 장서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여기에 대형 프랜차이즈의 무분별한 난입을 통제하고 거리의 역사성과 미관을 유지하려는 프린스턴 타운의 상업 정책이 힘을 보탰다. 실제로 타운 한복판에 자리 잡은 스타벅스조차 화려한 상업적 간판 대신 역사적 건물의 외관과 조화를 이루어야 할 만큼, 이 거리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기준은 까다롭다.
프린스턴 타운의 스타벅스 매장. 1930년대에 조성된 파머 스퀘어 역사상업지구의 건물에 입점해 있는 이 매장은, 프린스턴의 엄격한 역사 경관 보존 정책을 보여주는 사례다. 화려한 브랜드 표지보다 건물의 역사적 외관이 먼저 눈에 들어오며, 체인점조차 지역의 건축적 맥락 속에 스며들도록 한 프린스턴의 도시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형배
대학은 교재 판매와 재정 지원을 통해 기반을 마련했고, 타운은 역사적 경관을 지키는 규칙을 유지했다. 여기에 지역 주민들과 대학 구성원들이 꾸준히 서점을 찾으면서 라비린스의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선의나 일시적인 후원만으로는 공간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라비린스의 생존 역시 어느 한쪽의 호의에 기대어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대학과 타운, 서점과 주민이 각자의 역할을 나눈 구조적 결합의 결과였다.
그 결과 라비린스는 단순히 책을 판매하는 점포를 넘어 대학과 지역사회, 이른바 ‘타운 앤 가운(Town & Gown)’¹⁾이 만나는 문화적 접점으로 자리 잡았다.
매장에 들어서면 눈에 잘 띄는 곳에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의 신간과 대학 교수진의 저작이 놓여 있다. 지하에서 1층과 2층으로 이어지는 서가에는 일반 대형 서점이나 마트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역사, 철학, 문학비평, 예술, 소수 언어 분야의 책들이 깊이 있게 채워져 있다. 이 공간의 온기는 매장 바깥 길거리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서점 앞 나소 스트리트 인도에는 늘 할인 판매하는 다양한 책들이 야외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다. 지나가던 관광객과 주민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걸음을 멈추고 책장을 넘기며 자신만의 보물을 찾는 풍경은, 이제 프린스턴 타운을 대표하는 정겨운 아날로그적 일상이 되었다.
온라인 알고리즘은 ‘이 책을 산 사람이 함께 구매한 책’을 추천하며 독자를 이미 형성된 취향 안에 머물게 한다. 반면 오프라인 서가는 목적 없이 걷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책과 마주치게 한다. 라비린스는 그렇게 우연한 발견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저녁이 되면 서점은 지역사회의 문화적 사랑방으로 변한다. 프린스턴대학교 교수가 신간을 출간했을 때나 저명한 학자·작가가 타운을 찾았을 때, 북토크와 패널 토론이 열리는 장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이 행사들은 프린스턴 공공도서관(Princeton Public Library)과의 긴밀한 파트너십을 통해 공동으로 개최된다. 서점 공간뿐만 아니라 때로는 공공도서관의 강당으로 무대를 넓히며, 저자와 주민, 학생과 학자가 대학의 담장을 넘어 한자리에 모여 질문하고 토론한다. 이처럼 라비린스는 공공도서관과 함께 대학 안에 축적된 지적 자산을 타운 전체의 일상으로 유기적으로 흘려보내는 핵심적인 통로 역할을 맡고 있다.
서점이 사라진 자리, 라비린스가 남아 있는 이유
서점이 사라지는 일이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시대다. 그렇기에 라비린스가 프린스턴 한복판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더욱 특별하다. 그것은 운이 좋아서도 아니고, 누군가의 일시적인 호의 덕분도 아니다. 대학은 오프라인 서점만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와 역할을 인정하고 비용을 부담했다. 타운은 지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상업 자본의 진입을 조절했다. 서점은 깊이 있는 장서와 꾸준한 문화 프로그램으로 그 신뢰에 응답했다.
라비린스의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는 독립서점에 대한 낭만적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이 서점은 오프라인 지식 공간도 적절한 제도와 지원이 있다면 충분히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래 그리스 신화 속 미노스 왕의 미궁 라비린토스는 한번 들어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두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서점 라비린스는 그 반대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정교하게 배치된 서가 사이를 서성이고 헤매며, 그 길 잃음 속에서 뜻밖의 책을 발견하는 미궁의 기쁨을 누린다.
한강 작가의 서점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접하며 새삼 깨닫는다. 책방을 지키는 일은 단지 하나의 점포를 보호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뜻밖의 책을 만나고, 서로 질문을 나누며, 대학과 도시가 연결되는 통로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 퇴근길에는 늘 무심히 지나치던 라비린스의 모습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서점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지, 또 한 서점이 오랫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과 제도가 필요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오늘도 당연한 듯 대학 맞은편에 문을 연 독립서점 라비린스ⓒ이형배
¹⁾타운 앤 가운(Town & Gown): 대학이 위치한 지역사회(Town)와 대학 당국 및 공동체(Gown)를 뜻하는 관용어. 중세 유럽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긴 학술 가운(Academic gown)을 입고 다니던 것에서 유래했으며, 대학과 지역 도시 간의 역사적 관계, 갈등, 혹은 상생 협력 구조를 언급할 때 쓰인다.
이형배_프린스턴대학교 한국학 사서
프린스턴 대학교 한국학 사서로 재직 중이다. 한국 관련 고문헌 조사 및 디지털 인문학 프로젝트에 오랜 관심을 가져왔다.
주요 활동으로는 동아시아 도서관 협의회 한국학 자료 위원회 회장(2023-2026), 북미 한국학 장서 컨소시엄 회장(2020-2022) 등을 역임하였다.
프린스턴 대학교 소장 한국고서 연구조사, 럿거스 대학 소장 그리피스 컬렉션 연구조사, 일제시기 동아시아 연속간행물 DH 프로젝트 등
국내외 기관의 후원을 받은 다수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으며, 한국어 로마자 자동화 프로그램 K-Romanizer를 개발하였다.
아이의 질문, 사서의 고민“아빠, 사서는 무슨 일을 해?”“그게…… 그러니까…… 어떤 사서는 세상의 수많은 책 중 자기 도서관에 꼭 필요한 것을 골라내고, 어떤 사서는 그 책을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기록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사람들이 공부하다 막힐 때 길을 찾아주기도 하고…….” 주제사서라는 직업상 학생이나 연구자들로부터 까다로운 질
2024년 10월 1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호명했다. 더 라이브러리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맞이해 다양한 관점에서 한국 문학이 가진 힘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노벨문학상 특집 칼럼]으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병국이 MZ가 읽을 만한 한국 소설 10권을 추천한다. 2010년대 중반의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전자 티켓 하나로 유럽 전역을 누비고 다니다두 달 동안 유럽의 도서관을 탐방하고 돌아왔다. 공공도서관의 최신 트렌드와 코로나19 이후 도서관의 변화와 대응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새로 건립된 도서관이나 대규모 공공도서관들을 중심으로 다니다 보니 도시와 도시를 여행하며 국경을 자주 넘나들게 되었다. 총 16개국 62개의 도서관을 방문했는데, 주로 유레일패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