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인 우리 집 아들놈은 책을 읽지 않는다. 책꽂이에 수많은 책이 꽂혀 있고 아빠가 소설을 쓰는데도 아들은 책과 거리가 멀다. 책 좀 보라고 하면 아들은 해맑은 얼굴로 “나중에 보고 싶은 거 생기면 얘기할게” 하고는 그만이다. 가끔 뭘 읽었다고 해서 물어보면 일관되게 대충이다. 나였으면 며칠에 걸쳐 읽었을 두꺼운 소설을 두어 시간 만에 뚝딱 읽어치웠다며 으스댄다. 녀석이 독서 천재일 리는 없으니 제대로 읽지 않았을 거라는 추정이 합리적이다. 몰래 유튜브 보다가 걸리고, 몰래 게임 하다 걸리고, 누나 핸드폰 몰래 가져가다 걸리고······ 걸리고, 걸리고, 걸리고를 일주일 내내 반복한다. 깊은 밤 코를 골며 자는 아들놈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아아, 내 아들인데 왜. 대체 왜.
우리 반 아이들은 읽는다.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매일 15분가량 책 읽는 시간을 주려고 노력한다. 책 읽는 시간이면 나도 교탁 앞에 서서 내가 읽던 책을 꺼낸다. 아이들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물어보거나, 읽는 책의 표지를 들춰보고 재미없으면 다른 책을 골라 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끔은 과장된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하기도 한다. “아니! 이 책을 네가 읽는단 말이냐?” “오! 이 책 선생님도 읽었는데 정말 감동받았어!” 이런 말 두어 마디에 책 보는 아이들 분위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책 읽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부드럽고 아이들도 그걸 안다. 사람들은 대부분 책 읽는 아이들을 칭찬한다. 독서의 쓸모를 강조하는 사람도 많다. ‘모든 콘텐츠는 문장에서 시작한다’, ‘문해력을 키워야 대학 입시에 유리하다’ 등등 귀가 솔깃해지는 말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싶지만 과하다 싶을 때도 많다. 어느 논술학원에서는 5학년 아이들에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히기도 했는데 끝까지 읽는 아이는 보지 못했다. 어떤 아이는 시켜서 읽고, 어떤 아이는 숙제로 읽고, 어떤 아이는 좋아서 읽는다. 선생님이 읽어라 읽어라 해서 읽었는데 읽다 보니 책에 빠져드는 아이도 있다. 초등학생은 모든 연령층 가운데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집단이 아닐까.
상상하며 읽어야 누릴 수 있는
많은 아이들이 책을 들지만 모든 아이들이 책에 애착을 갖지는 않는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소수다. 피아노 치기를 좋아하거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거나 수학이나 영어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소수인 것처럼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도 소수다. 기본 소양 교육으로 독서를 강조하는 건 나름의 교육적 성과를 거둘 수 있지만, 어른들이 힘주어 이야기한다고 해서 모든 아이들이 책을 사랑하게 되지는 않는다.
책을 읽는 것은 어렵다. 읽으면서 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감각적인 표현을 읽고 냄새와 표정과 소리와 촉감을 떠올려야 한다. 주인공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있는지, 주인공이 보는 풍경은 어떠한지 마음에 그려야 한다. 긴장 풀고 읽다 보면 맥을 놓치기 일쑤고, 한 단락 두 단락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가면 결국은 대충 읽고 치우게 된다. 서사를 즐기는 데 편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영상물이다. 빛나는 배우와 세련된 영상에 자신을 풍덩 던지면 끝이다.
책은 다르다. 책은 독자를 훈련시키고 싶어한다. 읽어내지 못하는 독자에게 더 능숙해지라고 요구한다.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나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지쳐서 돌아서는 독자에게 책은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정물처럼 서가의 좁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시간이 흘러 아무도 찾지 않는 시기가 되면 조용히 사라진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으나 나는 영화나 음악보다 책을 통해 얻은 감동이 더 오래가는 편이다. 교실에서 매일 만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책 읽는 능력 정도는 길러주고 싶다.
읽어내고 싶게 하는 도도한 책들
아름답고 훌륭한 동화를 좋아하는 아이도 많고 동시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다. 저학년 동화나 그림책을 읽다가 “와! 이거 정말 대단해!” 하고 탄복하는 아이도 종종 본다. 물론 그만 한 가치가 있는 책들이다. 한편으론 조금 더 두껍고 서사가 여러 겹으로 짜인 책이 더 많았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초등학생도 두꺼운 책, 깊이가 있는 책을 누릴 수 있다. 나는 국어 수업을 책으로 하는 걸 좋아해서 일년에 여덟 권 정도의 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공부한다. 내가 수업 재료로 쓰는 책은 경장편 소설 분량의 주니어 소설이 대부분이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이렇게 두꺼운 걸요? 그림도 없는데요?” 하다가도 막상 수업을 하다 보면 재밌어한다. 수업 방법은 단순하다. 모든 아이들이 책상 위에 책을 편다. 나는 소리 내어 읽고 아이들은 들으면서 읽는다. 읽는 중간 중간 나는 작품과 작가의 의도를 풀어 설명하고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지점을 짚어준다. 문집도 만들고 학습지도 푼다. 그렇게 함께 읽고 나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책의 내용을 이해한다. 반응이 정말 좋다. 다음 책은 무엇으로 할 거냐고, 언제 다시 책 수업을 하냐고 묻기도 한다.
‘이거 한번 읽어보지 뭐’가 아니라 ‘나는 이 책을 읽을 거야’ 각오를 세워야 하는 책. 그런 책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어른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알고 누린다. 기본 독서 훈련이 되어 있다면, 그리고 책에 쓰인 문장이 단아하다면, 아이들은 다 읽어낼 수 있다. 아이들은 공들여 읽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간다.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느끼고, 등장인물의 사정을 이해하고, 주인공의 슬픔과 기쁨에 공감한다. 책을 통해 하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애써 읽어낸 책이 준 감동과 깨달음이 영상을 통해 얻은 것보다 더 오래가지 않을까? 한 편집장님께 동화와 청소년 소설과 소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분은 ‘전체 관람가, 12세 관람가, 19세 관람가의 차이로 봐도 될 것 같다’고 대답하셨다. 동화와 소설을 연령대로 구분하는 게 큰 의미 없다는 대답이었고 나도 그 관점에 동의한다.
책은 좀 도도해도 괜찮을 것 같다. 모든 사람을 책으로 끌어들여야 할 필요도 없잖은가. 아이들이 주인공인 깊고 넓고 재미있는 소설을 더 만나고 싶다. 읽는 아이는 읽는 책, 읽는 노력을 기울여볼 만한 책, 그런 책을 아이들에게도 건네고 싶다. “다 읽었어? 어때? 진짜 근사하지?” 묻고, “네, 정말 좋았어요! 대단한 책이었어요!” 하는 대답을 듣고 싶다.
문경민_소설가, 초등교사
소설가, 초등학교 교사. 제17회 중앙신인문학상에 단편 소설 <곰씨의 동굴>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우투리 하나린》으로 제2회 다새쓰 방정환 문학 공모전 대상을, 《훌훌》로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화이트 타운》으로 2021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쓴 책으로 청소년 소설 《훌훌》, 장편소설 《화이트 타운》이 있다.
새해를 맞으며2024년 12월, 대한민국은 무거운 마음으로 한 해를 닫았다. 그리고 여느 해와 다르지 않게 분주했다. 중원도서관 역시 당해 사업을 정리하고 2025년을 기약함은 물론, 여러 가지 교육 이수를 하고 새로운 인력을 배치하거나 함께 근무했던 동료를 떠나보내며 예산을 확정하고 행정사무 감사에 임했다. 묵은해를 돌아보니 한류 열풍은 K-pop에 이어
가장 소중한 만남이 이루어진 곳 도서관 하면 고문서에서부터 최신간까지 다양한 책들을 갖추고, 전문가와 학생들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술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는 게 보편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만남의 장소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를 짓는다. 남편을 처음 만난 ‘소중한 인연의 장소’가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1982년 철
익숙한 것이 새롭게 보이는 순간, 들리지 않았던 낮고 희미한 목소리가 갑자기 귀에 들리는 순간을 붙잡아 기록으로 남기는 때가 창작의 시작 달그락 소리와 함께 사물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두 고양이는 새벽 5시 반이면 어김없이 나를 깨우곤 한다. 그래서 한동안은 새벽마다 잠이 덜 깬 채로 책상에 앉아 원고를 쓰거나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