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어린이 그림책의 세계》를 쓴 일본의 그림책 전문가 마츠이 다다시(1926~2022)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1926년생인 그는 세계 굴지의 그림책 출판사 후쿠인칸쇼텐(福音館書店)의 설립에 참여하고 편집장을 거쳐 사장까지 지내면서 평생에 걸쳐 그림책 출판의 역사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후쿠인칸쇼텐은 ‘아이들에게 기쁨을 느끼게 하는 책을 만들자’는 것을 모토로 하는 회사다. 그가 처음 그림책 출판에 뜻을 품게 된 사연이 인상 깊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1950년대, 마츠이 다다시가 대학생이었을 때의 얘기다. 그의 여자친구는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인 나가지마 출신이었는데, 어느 겨울방학에 자신의 고향에 그가 와서 둘이 함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눈 속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먼 길을 찾아간 그는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작은 책방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겨울, 눈, 책방은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그 안에 놓인 책의 세상은 더욱 아름다웠다.
그는 책방 주인인 여자친구의 아버지와 책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을 좋아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결국 둘이서 조그마한 출판사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는데 이 회사가 바로 후쿠인칸쇼텐이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는 볼 만한 그림책이 거의 없었는데 미국이나 유럽에서 수입된 그림책들을 보면서 이런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결과 오늘날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세계 최고의 그림책 출판사 상(BOP)’을 받은 회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마츠이 다다시의 사랑 이야기로 출발했으니 그 부분도 전하자면, 그는 눈 오는 책방으로 자신을 부른 여자친구와 결혼했고 그들 부부는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세 남매를 키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글자를 모르는 나이였지만 종종 그림책을 통권으로 외워버리곤 했다. 자신과 아내가 읽어주는 소리를 듣고 기억했다가 그 책을 꺼내와 혼잣말처럼 모두 읊으면서 몇 번이고 같은 책의 책장을 넘기는 것이었다. 마츠이 다다시는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너무 사랑해서 모두 외워버리게 만드는 세계, 마음에 닿아서 바로 나 자신이 되어버리는 문장들, 영원히 갖고 싶어서 다 기억하는 장면들, 이것이 어린이에게 그림책의 세계라고 했다.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고밀도 문학
그림책을 알게 된다는 것은 어른에게도 신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그림책을 읽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는 말이 있다. 그림책은 뛰어난 시와 노래를 담은 책이기도 하다. 좋은 그림책의 문장은 서술형 문장이 아니라 낭독형 문장이다. 리듬을 만들어 읽어보았을 때 훨씬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림책은 손에 잡히는 하나의 ‘사물’이어서 책이 전하려는 의미는 글과 그림, 책의 모양, 제본의 특징, 타이포그래피, 인쇄에 사용된 종이의 질감, 사용된 안료의 특성까지 여러 요소들과 복합적 관련이 있다.
그림책의 서사는 중층적이어서 어린이에게 전달되는 의미와 어른에게 전달되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어른은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토대로 조금 더 중의적인 지점까지 해석해낸다. 반면 어린이는 직관적으로 어른이 놓치는 의미를 더 먼저 발견한다. 또한 그림책의 그림은 문자로 표현하지 못하는 시공간의 오묘한 분위기와 문화, 역사의 맥락까지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그림책은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고밀도 문학이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이야》(최민지 글 그림, 모래알, 2022)
최민지의 그림책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이야》를 보면 어린 시절의 그림책 읽기가 어떻게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구성해가는지, 그리고 그림책은 왜 문학적이라고 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이 그림책에는 빨간 가름끈이 있는데 이 가름끈은 책 속 주인공이 책의 나라로 올라가는 동아줄이 된다. 최민지 작가는 우리가 책을 통해서 더 높고 먼 세계로,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의 모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동아줄을 타고 책의 나라로 올라간 어린이는 그 안에서 온몸이 글자로 이루어진 ‘책 아이’를 만난다. 그는 이응 모양의 눈, 기역으로 만든 코, 물음표로 빚은 귀를 가지고 있었다. 둘은 그림책 속에서 모험하며 새로운 책의 동아줄을 내려 다른 어린이를 이 세계에 초대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모험 속에서 콜라주로 사용된 문장들이 손보미, 정용준, 서이제, 김태용의 소설들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는 주인공 자신의 일기가 콜라주 텍스트로 등장한다. 그 일기는 작가 최민지 개인의 소설이기도 하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자신의 영화에 슬쩍 등장하는 것처럼 최민지 작가는 자신의 그림책 속에 자신의 소설로 잠시 나타나 모습을 비춘다.
모든 편견을 넘어, 그림으로 모두를 연결해주는
그림책은 어린이에게는 두고두고 읽으며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갈 문학이며 어른에게는 오래오래 옛집처럼 찾아가 읽을 문학이다. 세대와 성별과 인종을 뛰어넘어, 번역이 필요하지 않은 텍스트인 그림을 통해 모두를 연결해주는 문학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간 세계의 그림책은 그림책 안에 다양성이 얼마나 잘 표현되고 있는지가 중요한 화두다.
《행복을 나르는 버스》(맷 데 라 페냐 글, 크리스티안 로빈슨 그림, 김경미 옮김, 비룡소, 2016)(좌), 《여름이 온다》(이수지 글 그림, 비룡소, 2021)(우)
크리스티안 로빈슨은 이 지점에서 선두에 서 있는 작가다. 그는 칼데콧상 수상작인 《행복을 나르는 버스》에서 거대한 대도시를 모자이크처럼 구성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들은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도시 외곽의 급식소에서 만난다. 나란히 밥을 나눠 먹는 그들 사이에 차별이나 혐오는 없다. 케이트 그린어웨이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그의 또 다른 작품 《마일로가 상상한 세상》에는 엄마가 교도소에 간 사이에 성장해야 하는 어린이들의 삶이 나온다. 미국의 경우 교도소에 수감된 여성의 80퍼센트가 어떤 어린이나 청소년의 엄마라는 통계가 있다. 작가는 이 그림책 한 권을 통해서 ‘수감된 엄마들과 그 아이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잘 보존해줄 것인가?’라는 사회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림책은 이렇게 우리가 놓칠 뻔했던 세계의 구석구석, 중요한 지점을 찾아서 쉽고 간명한 언어로 조명해준다.
그림책은 이미지를 통해서 의미를 전달하므로 독자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특정한 편견을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다. 해외의 출판사들은 창작자의 반편견 의식을 환기하고 책임을 묻는 조항을 출판계약서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인종주의적인 태도나 여성 혐오 등이 포함된 작품은 출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자유롭고 풍성한 다양성의 협주곡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작가 이수지는 그림책 《여름이 온다》에서 소나기 내리는 여름날 어린이들의 모험을 그린다. 이 작품은 비발디 협주곡 〈사계〉의 음률과 함께 진행되는 ‘음악 + 책’의 구조를 지닌다. 그런데 이 책에서 협연을 벌이는 것은 음악과 문학만이 아니다. 다양한 피부색, 성별, 연령의 어린이들이 어떤 장벽도 없이 서로 어울리면서 논다. 그들 모두의 꿈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하늘을 나는 오렌지색 우산 하나로 통합된다. 이 하나의 대행자 안에 수많은 어린이의 각양각색 꿈이 깃들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책은 자유롭고 풍성한 다양성의 협주곡이다. 이수지 작가는 그동안 자신의 그림책을 통해 글과 그림, 책과 책 아닌 것, 소리와 묵음의 경계를 허물고 상상의 영역을 확장해왔다. 그러한 그가 2022년인 지금 예술의 힘으로 허물고 있는 단단한 지점은 차별과 혐오의 벽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는 오래도록 책을 읽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찍 읽기 시작해서 가장 늦게까지 읽는 책은 아마도 그림책일 것이다. 우리는 그 책 안에서 사랑하고 사랑해서 외울 수밖에 없는 세계를 만난다. 나는 사람들이 그림책을 읽어서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그림책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라고 대답한다. 외우고 싶을 정도로 멋진 세계를 사랑하면서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일, 그것이 바로 어린이와 어른이 그림책을 읽는 일의 의미다.
김지은_문학평론가, 교수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심리철학과 철학교육을 공부했다.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비평집 《거짓말하는 어른》 《어린이, 세 번째 사람》 등이 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문예창작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수많은 책들 중에 소수의 책을 선별하는 기준은 솔직히 개인의 취향,취향이 동네책방의 개성을 만든다. 그림책방 곰곰을 한두 줄로 소개하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늘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를 위한 그림책방”이라고 소개한다. 연령대와 상관없이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우리 책방에서 좋아하는 그림책을 발견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실 처음에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방’
The Liverary에서는 2022년 9월 창간호부터 다독가들을 운영하고 있다.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로,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되어 독자들의 호응이 큰 연재물이다. 이번에 The Liverary 에디터 팀에서는
도서관은 ‘빈민의 대학’‘소외된 사람들의 지적 생명선’이라는 정의를 다시 짚어보면······ ‘도서관은 빈민의 대학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지적 생명선이다.’ ‘도서관이 있는 지역을 파악하지 못하고 지역사회 프로그램을 하지 않는 도서관은 도서관이 아니다.’ 도서관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교과서처럼 남아 있는 책 《도서관을 통한 지역사회 프로그램》은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