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무해한 대화 나누기, 흥미로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와 자기 전에 조금씩 읽기, 낯선 이의 플레이리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며 눈에 띄는 나무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그날의 기분과 함께 간직하기, 오늘의 날씨를 살펴보기 위해 매일 아침 하늘을 올려다보기, 존경하는 이의 인터뷰를 인터넷에서 찾아 읽고 좋은 말 따로 적어두기 등등.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는 데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만 수십 년이 걸렸다. 더디게 배워온 인생이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돼 다행이다.
더 기억할 만한 것은 또 이런 것이다. 이제 나는 평화롭고 안온한 삶을 원하게 됐는데, 그 삶은 나와 타인, 혹은 나와 세계 그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 사이에서 산다는 것은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일이다. 어떤 맥락 속에 있느냐에 따라 나는 매순간 달라진다. 사이에 있을 때 나는 ‘지인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무해한 대화를 나누는 나’, ‘도서관에서 빌려 온 흥미로운 책을 읽는 나’, ‘낯선 이의 플레이리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나’ 등등으로 계속 변해간다.
‘지금까지의 나’가 항상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관념 속의 나였다면, ‘지금부터의 나’는 매순간 바뀌는 관계 속의 나가 되기를. 이 말은 이런 뜻이다. 혼자 힘만으로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없다. 새로운 인생은 세계와, 또 타인과 새롭게 관계를 맺을 때 시작된다. 어떤 관계를 원하느냐는 내게 달린 문제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생에는 새로운 인생관이 필요하다.
사랑보다는 다정, 뜨거움보다는 따뜻함. 또렷함보다는 은은함. 선긋기보다는 스며들기.
내 쪽의 일방적인 열정보다는 다른 이의 사정을 고려하는 은은한 관심이 좋고, 열변을 토하기보다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그 말을 되뇌는 편이 낫다.
돈벌이 역시 생활보다 훨씬 더 많이 벌려고 애쓰지 않는다. 쓰는 만큼 벌고 낡은 만큼 개선할 정도면 충분하다. 내게 필요한 건 시간이고, 내가 할 일은 그 시간을 기쁘게 보내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
무엇보다도 매순간 내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 속으로 뛰어드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겠다. 어쩌면 실패하고 때로 상처받을 수 있겠지만, ‘실패한 나’나 ‘상처받은 나’는 달리 말하면 ‘세계를 껴안은 나’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나’가 ‘지금부터의 나’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인간의 영적 가능성이 열린다. 모든 예술과 종교가 보여주는 길이 여기로 놓인다.
이것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쓰는 동안, 내가 새로 찾은 인생관이다.
청주 열린도서관 ⓒ김연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쓰는 동안, 세상에도 여러 변화가 생겼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곳곳에 새로 만들어지는 도서관들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도서관은 관공서 느낌이 드는 무뚝뚝한 건물, 책들을 빼곡하게 채워 넣은 서가, 개인 공부를 위해 자리 경쟁을 하는 열람실 등이 있는 공간이었다.
2020년을 전후해 새로 만들어졌거나 리모델링된 전국의 도서관들은 나의 이런 선입견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도서관들을 둘러보다가 나는 확신했다. ‘지금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청주의 문화제조창 본관 건물에 있는 청주 열린도서관에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리면 거기가 바로 도서관 내부다. 들어가는 문도, 절차도 없다. 도서관과 나의 관계 속으로 바로 빠져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수많은 책에 둘러싸인 나로 바뀐다.
열린도서관의 서가 뒷면에는 도서관 이용규칙에 대한 글들이 인쇄돼 있다.
‘열린도서관은 정숙을 강조하는 도서관이 아니에요.’
‘자유롭게 책을 소리내어 읽어도 돼요.’
‘친구들과 토론을 해도 좋아요.’
‘도서관 행사가 있으면 조금 소란스러울 수 있어요.’
청주 열린도서관 이용규칙 ⓒ김연수
그 문구들을 바라보다가 《팀랩, 경계 없는 세계》라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팀랩이란 프로그래머, 엔지니어, 수학자, 건축가, 디자이너, 편집자 등으로 이뤄진 일본의 테크놀로지 실험 집단이다. 그들은 관람객이 직접 손대고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디지털 아트를 통해 타인과 세계에 대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든다. 그들은 이 경험이 인류를 미래로 이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이 기획한 ‘꽃과 사람, 제어할 수 없지만 함께 살다’라는 전시는 ‘가만히 있는 사람 주변에서는 꽃이 피어나고, 돌아다니는 사람 주변에서는 꽃이 지는’ 식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뉴욕에서 열린 이 전시에 대해 팀랩을 설립한 이노코 도시유키는 이렇게 설명했다.
“개막 당일에 관객들이 미어터질 정도로 모여들어서 그만 꽃이 전부 지고 말았다. 재미있는 건 그다음이다. 전시장에 모인 관람객이 자발적으로 자리를 떠나 3분의 1 정도로 줄어들자 꽃이 피어난 것이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더라. 그날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으로 예술이 변하는 모습을 제3자의 시점으로 즐길 수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열린도서관의 책 읽기 역시 이 작품과 비슷한 경험이 아닐까?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작스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는 것도, 그 소리가 사라지면서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모두 독서가 아닐까? 열린도서관의 서가에 인쇄된 이용규칙을 읽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 속의 장벽 하나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청주 열린도서관 서가 ⓒ김연수
새로운 세계는 나 혼자 바뀌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와 타인의 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열린도서관에서 무심코 꺼내 읽은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찾았다. 이 책은 한국의 송광사에서도 비구로 수행한 적이 있는 영국인 스티븐 배철러의 회고록이다. 티베트 불교에 입문한 뒤 환생 등의 교리에 회의하던 중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 자신의 명상 경험과 ‘세계-내-존재’라는 하이데거의 용어를 연결 짓는다.
알아차림 명상에 빠져 있던 그는 문득 산비둘기가 구구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그 소리와 그 소리를 듣는 일을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거기에는 ‘새소리를-듣는-나’만 있었다. 나란 지금 내가 있는 세계 안의 존재다. 그 세계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나타나고 사라지느냐에 따라 나는 달라진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항상 변하니 그 세계 안의 나는 늘 바뀌는 존재다. 늘 바뀌는 존재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거기에 팀랩이 말하는 미래가 있다.
청주에서 머물며 이틀 연속 열린도서관을 찾았다. 열린도서관은 관외대출을 하지 않는 곳이라 전날 읽은 책을 같은 서가에서 찾아 계속 읽을 수 있다. 같은 책의 같은 페이지를 두 번 읽었다. 당연히 두 번 모두 다른 경험이었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읽는 것도 독서지만, 내용은 똑같은데 내 삶의 맥락이 달라지면서 전혀 새롭게 읽히는 것도 독서다. 어떤 열람객이 얼마나 오느냐에 따라 매일매일 분위기가 달라지는 열린도서관에서는 후자의 독서가 진정한 독서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된다.
김연수_소설가
경상북도의 작은 도시 김천에서 태어났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시를 좋아하게 됐다. 좋은 시를 읽고 날마다 뭔가를 썼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라 읽고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93년 시 〈강화에 대하여〉를 문학잡지에 발표하며 시인이 됐다. 이듬해에는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문학상을 받으며 소설가가 됐다. 이후로 줄곧 책 읽고 글 쓰는 삶을 살아왔다. 지금까지 《일곱 해의 마지막》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세계의 끝 여자친구》 《소설가의 일》 등 20여 권의 책을 펴냈고,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읽지 않은 책과 쓰지 않은 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따뜻한 11월이 있을까 싶을 정도더니 12월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계절은 순식간에 바뀌어 문득, 겨울이다.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마산에 갔다. 80여 년 전 시인 백석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걸을 요량이었다. 그렇게 부둣가 어시장까지 이르렀다. 겨울 해는 이내 저물고 어둑신한 골목으로 짠물이 흘러갔다.오래 전 백석이 쓴 시를 떠올리니 어떤 마음
진주를 좋아한다. 10년이 넘게 쓰다 말다 하는 소설이 있는데, 글이 막힐 때마다 진주를 찾아간다. 그러다가 정이 들었다. 갈 때마다 비가 내린 덕분에 한적함을 마음껏 즐긴 진주성도 좋았고, 거울처럼 잔잔하고 은은하게 달빛을 비추던 진양호도 좋았다. 비 내려도 좋고 날 맑아도 좋으니 진주는 내게 언제라도 좋은 도시다.이번에는 태풍과 함께였다. 역대급이라고
파도를 바라보는 일이 내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지중해의 항구도시에서 머물던 어느 해 가을의 일이었다.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안)’이란 별명을 가진 피카소의 고향답게 늘 햇살이 작열하는 곳이었다. 컬러가 선명한 곳은 더없이 뜨거웠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그만큼 서늘했다.스페인어는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밖에 모르면서 그 도시에서 석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