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을 끌던 코로나 비대면 시대가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강의실 밖 캠퍼스는 만개한 겹사과꽃처럼 활기로 가득하다. 대면 강의는 물론 답사, MT 등 미루어놓았던 모임과 만남이 끊임이 없고 일정 너머 일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교수라면 이럴 때 간절한 것이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편안한 의자에 기대 좋아하는 책을 펼치는 시간일 것이다.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만이라도 다른 세상으로 떠나고 싶다. MZ세대 이전 세대인 아날로그 네이티브 대부분에게 도서관이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정신줄 놓치기 쉬운 일상에서 간단히 벗어날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
강의실 안에는 노트 대신 패드에 필기하거나 랩톱에 타이핑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수업 중에도 와이파이 네트워크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참고자료도 찾고 메신저로 친구들과 소통한다. 진정한 멀티태스킹. 디지털 네이티브라 불리는 이런 알파세대에게 도서관은 어떤 의미일까? 인쇄된 책을 귀를 접어가며 읽어본 적 없는 세대, 필요한 지식과 정보는 아무 때고 검색과 질문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세대, 같은 공간에서 나란히 앉아 강의를 듣지만 정신은 각기 다른 사이버 세계를 헤매는 세대. 이들에게도 도서관은 과연 필요할까? 지식과 정보를 개별적인 디지털 통로를 통해 시공의 제약 없이 구할 수 있는 세대에게 옆에 앉은 학우, 앞에 서 있는 교수는 어떤 의미일까?
이 익숙한 문장은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던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희곡 〈출구 없는 방〉(1944)의 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원문은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중략) 지옥, 그것은 바로 타인들이야’인데, 1965년의 강의에서 사르트르가 내놓은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 (중략)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타인들의 판단과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의 시선과 잣대에 의지해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고 그 틀에 자신을 재단해 꿰어 맞추면서 괴로워하는 현대인을 꼬집는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지적했음에도 계속 타자에 빗대어 자신을 바라보는 현대인은 더 큰 고통에 빠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같은 것들의 지옥’ 이다. 타자와의 상대적인 차이를 없애려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가는 지옥이다.
아노말리사(ANOMALISA), 2015
〈아노말리사〉(Anomalisa, 2015) 포스터
이 지옥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찰리 카우프만 감독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아노말리사〉가 그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마이클은 프레골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데 만나는 모든 사람을 개별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모두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주인공의 관점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애든 어른이든 모두 같은 목소리와 같은 얼굴의 존재들이다. 이 때문에 성공적인 커리어와 안정된 가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권태와 허무, 그리고 지루함으로 점철된 지옥일 뿐이다.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이클은 발버둥친다. 헤어진 첫사랑 벨라에게 다시 들이대기도 하고, 다르게 들리는 목소리를 찾아 호텔방들을 헤매기도 한다. 그러던 중,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가진 리사(Lisa)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 특별한 만남의 대상에게 ‘Anomaly(특별한)’와 ‘Lisa(리사)’를 결합한 ‘Anomalisa(아노말리사)’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했던 리사도 결국 다른 인간들과 똑같은 목소리와 얼굴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서 마이클은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식의 주체가 고유한 대상의 특별함을 잃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대상들의 차이가 사라지는 이유, 그리하여 의미의 종말, 무의미의 사막에 홀로 선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November 30, 2022
chatGPT 초기화면
이 글을 쓰기 불과 몇 달 전에 openAI에서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 chatGPT를 공개했다. 2022년 11월 30일의 일이다. 이 인공지능은 최근까지 축적된 방대한 양의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 사람과 자연어로 대화하며 다양한 질문에 실시간으로 답변을 준다. 서비스의 오픈을 기점으로 구글은 ‘검색의 시대’가 끝나감을 예견한 듯 긴급대책회의에 임원들을 소집했고, 마이크로소프트를 필두로 세계 톱 인터넷 기업들은 대화형,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를 앞다투어 선보이고 있다.
어떤 질문을 해도, 어떤 정보를 요구해도 마치 많이 배운 사람마냥 그럴싸한 문장의 답을 실시간으로 척척 내놓는다. 신기하기도 하고 압도되기도 하여 의심할 여력도 생기지 않는다. 2021년 9월 이전의 문서 5조 건을 학습한 최첨단 인공지능이니 사진보다 뚜렷한 기억력을 갖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 해도 더 진보한 GPT-4(2023년 3월 14일 출시된, chatGPT의 진화된 버전)의 답변 역시 진실과 사실에 근거했다고 보기도, 공신력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어떤 단어들의 조합 뒤에 나오는 높은 확률의 단어들을 최선을 다해 조합한 언어의 지도에 불과할 뿐. 텍스트라는 이미 두 번 세 번 재해석된 세계를 높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하지도 않은 확률로 다시 구성해 우리에게 내놓는 것으로서 chatGPT의 답변은 맞는 이야기도 틀린 이야기도 아닌 것이다. 유려하고 그럴싸하지만 어딘가 좀 부유하고 있는 듯한 대답들, 혹은 너무나 판에 박힌 견해들. 이로써 지식과 정보의 진위도 양극화하기 시작한다.
지난 1월 서비스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1억 명의 사용자를 넘어섰다고 한다. 이런 추세라면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낼 텍스트의 양은 유사 이래 인류가 생산한 양 전체를 2~3년 내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한다. 확실한 근거와 사실에 기반한 텍스트의 양보다 그저 나올 확률이 높은 단어들을 조합한 근본 없는 텍스트들이 더 많아지는 세상. 그것의 도래가 멀지 않다.
이는 어떤 실물의 사진 원본을 계속해서 흑백으로 복사를 거듭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복사 초기에는 원본과의 유사도가 높지만 복사를 거듭할수록 원본과의 거리는 멀어진다. 그러다 종국에는 원본과 복사본을 같은 것으로 볼 만한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는 특이점의 순간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언어와 문자를 기반으로 하는 세계 어디에서도 절대적 진리를 찾을 수 없게 되고 오로지 근접한 콘텍스트만을 적당히 따르는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 문장들에서 차별된 의미를 더 이상 발견할 수 없는 세상은 보르헤스가 상상한 ‘바벨의 도서관’ 같은 세상이 아닐까?
바벨의 도서관, 1941
시력을 잃을 정도로 책을 탐닉했고 아르헨티나의 국립도서관장까지 역임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그의 대표작 〈바벨의 도서관〉(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픽션들, 민음사)은 아래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주(다른 사람들은<도서관>이라 부르는)는 부정수 혹은 무한수로 된 육각형 진열실들로 구성돼 있다.(129쪽)
그의 소설에서 화자가 말하는 도서관은 우주에 다름 아니다.
육각형 진열실에 가면 그 어떤 개인적 문제나 세계 보편적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었다.
우주는 그 존재 이유가 밝혀졌고, 우주는 순식간에 무궁무진한 희망의 차원을 획득하게 되었다.(137쪽)
소설 속의 사람들은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도서관을 소비하다가 파멸한다. 그리고 파멸하는 그들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허무이자 허상, 권태와 지루함, 그리고 모두가 같은 것만을 쫓고 있는 지옥으로 변해간다.
한때는 인류에게 잠재된 모든 가능성의 총체, 인류가 생산한 지식과 상상력의 산물을 보관하는 특별한 장소였던 도서관. 마치 마이클의 Anomalisa와도 같던 도서관.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엄청남 행복감을 느꼈던, ‘도서관이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게 공표되었을 때’처럼 지금 우리는 같은 욕망 추구의 산물인 GPT-4라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의 등장에 경이와 희망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리의 세계는 빠른 속도로 바벨의 도서관으로 변할 것이다.
사라지는 도서관의 미래
도서관은 ‘축적의 역사’의 산물이다. 반면에 새로운 기술은 항상 ‘대체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유선전화는 무선전화로, 브라운관은 LED 패널로, 하드디스크는 클라우드로. 대체된 것의 사라짐에 예외는 없다. 인류의 마지막 기술이라 불리는 강인공지능. 그것의 문턱을 넘은 AGI, GPT-4가 열어버린 세상은 분명 이전의 세상과는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간절하게 원한다 해도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과 상상력에 기반한 인류의 지적 산물의 저장소였던 도서관.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선별해 소장할 것인가? 선별해 소장할 가치가 있는 진실된 원전 텍스트는 강인공지능 시대에도 과연 생산될 수 있는 것인가? 70억 인구가 아무리 열심히 문장을 쓰고 책을 만든다 해도 인공지능이 생산하는 문자의 확률적 조합의 속도와 데이터의 양에 비교나 될 수 있을까?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는 ‘도서관은 한계가 없지만 주기적이다’(143쪽)라는 해결책을 추론을 통해 끌어낸 다음 우주의 원리를 확인했다고 믿는 화자가 기쁨에 젖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도서관의 미래에 대한 고민 끝에 간신히 필자가 내린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아날로그 네이티브가 알던 형식과 내용의 도서관이 디지털 네이티브의 시대에도 계속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들은 이제 소멸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항만_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와 New York의 Columbia University 건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주)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 (주)아아아크 건축사사무소, GreenbergFarrow New York, H Architecture, New York 등 한국과 뉴욕의 설계사무소에서 17년 간의 실무를 경험했다. 이후 2013년부터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종시 정부청사 마스터플랜, 정부세종청사 1-1, 2-2, 경찰대학교 마스터플랜, 2012 여수 엑스포 국제관,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 남부학술림 교육연구동 등 다양한 규모와 종류의 공간 및 건축, 마스터플랜과 도시디자인을 했고, AIA NY Design Award, WAN Building of the year, 김수근 건축상 프리뷰상 등 많은 건축상과 여러 공모전 수상 경력이 있다.
도서관은 ‘빈민의 대학’‘소외된 사람들의 지적 생명선’이라는 정의를 다시 짚어보면······ ‘도서관은 빈민의 대학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지적 생명선이다.’ ‘도서관이 있는 지역을 파악하지 못하고 지역사회 프로그램을 하지 않는 도서관은 도서관이 아니다.’ 도서관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교과서처럼 남아 있는 책 《도서관을 통한 지역사회 프로그램》은 도서관
2024년 10월 1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호명했다. 더 라이브러리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맞이해 다양한 관점에서 한국 문학이 가진 힘과 가능성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이병국 시인의 ‘MZ에게 추천하는 한국소설 10’에 이어, 한강 작의 《소년이 온다》 책임편집자인 김선영이 ‘사람들이 매일 소설을 읽는 것’에 대해
2000년대 초, 생애 처음 한국 밖으로 여행 갔을 때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뉴욕의 2월. 여행 중이라 겨울옷이 변변치 않았기에 발을 동동 구르며 눈이 쌓인 인도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고 버스의 앞문이 열렸다. 날이 많이 추워 버스에 얼른 올라타려고 하는 순간 버스 기사님이 잠깐 기다리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