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거실’로 불리는 오디. 그곳의 사서 하르 아날라(Harri Annala)가 내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또 핀란드에 살면서도 도서관과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내가 도서관법, 그것도 핀란드의 도서관법에 대해 알 리 없었다. 당황해하는 나에게 하르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핀란드의 모든 공공도서관과 사서들은 도서관법에 명시된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모든 사람이 교육과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 독서 문화의 촉진, 다양한 능력과 평생 학습 능력의 습득, 적극적인 시민의식, 민주주의 및 표현의 자유 등을 공공도서관의 중요한 임무로 강조하지요.”
내가 하르에게 던진 질문, “오디가 헬싱키라는 도시에, 그리고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에 대한 대답의 시작이었다. 알고 보니 핀란드는 도서관법을 보유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다.
(2) 이러한 목적의 실행은 공동체 의식, 다원주의 및 문화적 다양성과 같은 가치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도서관법의 핵심 가치를 오디는 어떻게 실현하고 있을까? 하르는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Come as you are(당신 모습 그대로 오세요).’
자, 지금 한번 눈을 감고 그동안 우리의 도서관 경험에 대해 떠올려보자. 누구나 도서관에 들어가면 내 발소리가 너무 크지 않나? 내가 입은 옷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너무 많이 나지는 않나? 조심, 또 조심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는 절대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며, 누군가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서도 안 된다고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디에서는 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당신이 어떤 옷을 입건, 어떤 생각과 성격의 사람이건, 본연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오디인 셈이다.
누구든 몸도 마음도 안전한 공간
이렇게 오디가 모두 그들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안전함이다. 여기에는 물리적인 안전함뿐만 아니라 개인이 해당 공간에서 심리적으로 느끼는 안전함도 포함된다. 오디 1층에 들어서면 대형 스크린에 ‘안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한 수칙(principle for a safer place)’이 보이는데, 이는 오디에서의 안전함이 무엇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차별하지 않음
모든 사람은 도서관에 있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곳에선 편하게 쉴 수 있으며, 심지어 권장됩니다. 인종 차별과 함께 그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도서관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사람들과 함께할 때 이 점을 기억해주십시오
오디의 안전 수칙을 지키기만 하면 시민은 물론이고 외국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편하게 도서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숙자가 들어온다고 해도 오디에서는 곧바로 내쫓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행동을 한다면 직원들이 조용히 다가가 오디의 안전 수칙과 다른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을 경우에는 통역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오디의 공간 구성과 설치도 바로 이 안전함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다양한 용도의 워크룸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공간들은 모두 유리창으로 되어 있다.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인 것이다. 이렇게 워크룸 공간을 유리로 만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우선, 공간의 목적을 이용자들에게 홍보하기 위함이다. 게임방, 독서실, 그룹 활동방, 음악 스튜디오까지 다양한 공간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사용되는지, 어떤 시설을 가지고 있는지 2층의 복도를 지나다니는 이용자들이 자연스럽게 관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안전한 공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게임방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싸움이 나거나 누군가에게 안전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경우 오디의 스태프들 또는 지나가는 다른 이용자들이 쉽게 발견해서 도와줄 수 있다. 종종 오디를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 좀 더 사적인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커튼을 칠 수 있는 공간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오디의 목적에 더 부합하는 큰 가치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타협하지 않는다고 한다.
2층에는 유리문뿐만 아니라 다른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다양한 워크숍 공간들이 복도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영상을 편집하는 컴퓨터 데스크부터 레이저 커팅 머신, 3D 프린터와 재봉틀 작업대까지 모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각각의 공간에서 다양한 취미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작업하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렇게 공간을 만들어놓은 오디의 의도는 다양한 사람들이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각자의 관심사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르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은 복도를 지나가다가 레이저 커팅을 하고 있는 사람 옆에 멈춰 서서 “당신은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나요?” 같은 질문을 던지며 서로 대화를 시작한다고 한다. 또는 재봉틀 작업을 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생기면 옆에서 같은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며 친해질 수도 있다.
지난 3년 간 핀란드에 살면서 관찰한 바로는, 핀란드 사람들은 미국인처럼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를 즐기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과묵한 핀란드 사람들도 의외로 자신들이 관심 있어 하는 분야에 대해서 물어보면 수다쟁이가 된다. 아마 이런 공간의 설계는 핀란드 사람들의 그런 성격을 어느 정도 고려한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이 각자가 좋아하는 주제로 자연스럽게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을 우연하게 만날 수 있게 해놓은 공간의 배치에서 오디의 배려심이 느껴졌다.
공간의 열린 배치는 서가가 있는 3층에서도 이어진다. 오디에도 마이얀홀(Maijansali)이나 극장처럼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 있다. 하지만 하르의 설명에 따르면 북콘서트, 작은 정당 토론회 같은 행사는 주로 3층 서가의 중간에 자리한 ‘사리코스키 매트’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펜티 사리코스키(Pentti Saarikoski)는 1970년대 핀란드에서 가장 유명했던 시인이자 작가인데, 3층에는 그의 얼굴 모양이 그려진 매트가 깔려 있다. 이곳에서 다양한 이벤트를 하는 이유는 이 장소가 서가 안에 섞여 있는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이벤트가 홀에서 열린다면 이용객들은 일차적으로 그 이벤트의 존재에 대해서 알아야 하며, 행사가 열리는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아무리 어떤 행사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곳이 어떤 분위기일지, 내가 그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지는 닫힌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열린 공간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또는 관심은 있지만 불편함이 있을 경우 우선은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먼저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하르가 처음에 얘기했던 ‘모두가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오디만의 가치라고 한 부분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하며 도서관 안의 다양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편안하게 녹아들 수 있도록 도서관의 경험이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고개가 끄덕여졌다.
모두가 환영받고 모두가 동등한 공간
서가로 꾸며진 3층으로 올라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든 서가와 책 읽는 공간이 하나로 이어진 탁 트인 개방감이다. 목적에 따라 여러 개의 방들로 구분된 2층과는 다르게 3층에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스토리타임룸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간이 이어져 있다. 왜 이런 구조를 선택했느냐고 물어보자 하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오디에는 핀란드의 셀러브리티들도 많이 와요. 유명한 뮤지션 같은 사람들이요. 저희끼리는 종종 ‘나 오늘 그 사람이 책 찾는 것 도와줬다’와 같은 대화를 하기도 해요. 하지만 유명하다고 해서 그들이 저희 스태프들에게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랍니다. 3층 서가에 별도의 공간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만약 별도의 방이 있다면 그 공간은 누군가의 특별 대우를 위해서 사용될 수도 있잖아요? 저희는 애초에 그런 가능성을 없애고 싶었어요. 오디에서는 누구나 환영받으며 동시에 모두가 같은 서비스를 받는답니다. 어떤 사람이 더 유명하다고 해서, 또는 덜 유명하다고 해서 다른 대우를 받지 않아요.”
3층을 돌아보니 바닥, 소파, 의자 등 자신이 편안한 곳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 각자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마 오디를 사용하는 모든 이용자들은 오디가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원칙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칙을 바탕으로 모두가 똑같이 환영받을 수 있는 공간과 경험을 만들려는 오디와 직원들의 따뜻한 노력이 도서관 안의 공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만은 확실했다.
3층에서 인상 깊었던 공간 중 하나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하르는 이 공간을 소개하면서 여기는 어린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들까지 포함한 ‘가족을 위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과 똑같지 않아요. 아무리 뛰지 말라고 얘기해도 어느 순간엔 아이들이기 때문에 뛰어다니고, 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나 아이들을 가진 부모님이 도서관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디의 3층 서가 한 곳은 가족들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하르의 설명을 들으며 걷다 보니 수십 대의 유모차들이 주차된 공간이 펼쳐졌다. 그 공간에서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책을 읽어주거나 서로 이야기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울거나 큰 소리를 낼까 봐 초조해하고 눈치 보는 모습이 아니라 아이들을 데리고 평온하게 휴식하고 공간을 충분히 즐기는 모습에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그런데 3층 전체가 벽 없이 하나로 이어진 공간치고는 실내 소음이 전혀 크지 않았다. 그 비법은 바로 층고가 높고 사이사이에 원형의 홈이 있는 굴곡진 형태의 천장에 있다. 이와 같은 곡선 형태는 천장이 소음을 잘 흡수하고 소리가 멀리까지 닿지 못하도록 한다. 또한 방음재로 만들어진 천장에는 방음 스프레이까지 한 겹 더 뿌려져 있다. 그런 세심한 설치 덕분에 서가의 책을 바로 읽을 수 있는 공간이 가족들을 위한 공간과 함께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저 연결성, 열린 공간을 추구한다며 모든 것을 연결시켜놓고 제대로 방음 장치를 하거나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많은 이용자들이 편안하게 오디를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도서관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맞게 공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용자들이 실제로 그 공간에 머물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사려 깊게 생각하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함께 공간에 녹이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르에게 따뜻한 감사 인사를 전하고, 다시 한번 1층부터 건물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긴 겨울의 끝에서 아주 살짝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햇빛이 평일 오후의 오디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전에는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던 공간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시작되고 있는 여러 만남들이 주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 에너지를 느끼며 자연스럽게 배낭을 멘 어깨에 힘이 꼭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에너지를 꼭 한국에도 전달해주고 싶다. 연령, 계층, 성별, 국적을 막론하고 누가 어떤 모습으로 와도 안전하고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한국의 도서관을 기대해본다.
20대의 끝자락에 핀란드로 넘어와 4년째 거주하고 있다. 알토대학교(Aalto University)에서 마케팅 석사를 전공하고 핀테크 업계에서 디지털 마케터로 근무 중이다. 쉬는 시간에는 핀란드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산책하며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얕게 공부하는 것을 즐긴다.
2024년 1월, 무려 20년 만에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새로운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헬싱키의 38번째 도서관이기도 하다. 그 주인공이 바로 깔라사따마도서관으로, 그냥 새로운 도서관인 것 말고도 재미있는 특징이 몇 가지 더 있다. 우선은, 어린이와 청소년 대상의 도서관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도시 한가운데 있는 대형 쇼핑몰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4년 전,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알토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연고 없는 이국땅에서 생활한다는 게 녹록지 않은 일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런데 수시로 불쑥불쑥 밀려드는 외로움과 헛헛함은 짐작했던 것 이상이었다. 사회적인 활동 공간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외딴 섬에 갇힌 듯한 소외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나는 마치 한국에서 28년 동안 살면서 하나하나 획득했던 생
친족애를 잊어버리고 세계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우리는 반려친척들과 함께 세계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모든 생물은 본질적으로 친척이다마츠바라 타모츠 감독의 피폭소와 살다(2016)는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사고 지역에서 살아남은 소들과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도쿄전력의 핵발전소가 있던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