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긴 겨울을 보냈다. 3월 초순, 한발 먼저 봄을 맞고 싶었다. 순수한 동심으로 마음을 다독여준 이주홍 선생을 만나고 싶었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던 꽃은 아직 꽃망울을 터트리지 않았지만 투명한 햇살과 맑은 바닷바람이 먼저 맞아준다. 아쉬운 마음으로 동래에 있는 이주홍문학관으로 향했다.
명륜역을 나와 부산전자공업고등학교 방향으로 가다 보면 향파이주홍문학거리를 만나게 된다. 만년필을 형상화한 조형물, 빨간 우체통, 공중전화 부스를 활용한 꼬맹이 도서관, 선생의 동시 작품이 벽에 걸려 있다. 발길 멈추고 작품 앞에 서서 글을 읽는다. 봄 햇살에 선생의 따뜻한 감성이 빛난다. 아득한 동심의 기억들이 겹쳐 보인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적한 주택가에 이주홍문학관이 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금강로 61번길 20-12. 소나무 한 그루 우뚝 서 있는 아담한 붉은색 2층 건물이 정겹다.
선생이 태어난 곳은 합천이다. 열네 살, 문학에 목말라하던 감수성 강한 가난한 소년은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문학에 대한 갈증은 더했다. 큰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물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암울한 시대, 귀국해서는 잡지사 등에 근무하며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생애 전반부를 마무리하고 부산에서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은 1947년 불혹을 넘긴 40대 초반이었다. 동래중학교 교사, 수산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육은 물론 지역문화 향상에 힘을 쏟았다. 대본을 써 연극 공연을 하고 동인지를 만들었다. 1987년 타계하기까지 40년간의 부산 생활은 꿈꾸었던 문학의 가치, 문화의 힘을 실현하는 통찰의 시간이었다. 생애 후반을 보낸 부산은 고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후학이나 제자들이 선생을 생각하는 마음은 깊다. 타계 후 2002년 후손과 제자들이 선생의 손길이 스민 자택에 문학관을 열었다. 온천 1동 177-18번지. 이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제자가 살고 있던 곳의 부근 집을 매입해 이전한 곳이 현재의 문학관이다.
아담한 문학관 2층 전시실에는 선생이 살아온 삶의 자취와 흔적이 진한 체취로 남아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정철교 작가가 조각한 선생의 흉상이 반긴다. 정장 차림의 인자한 모습, 평상시 교단에 섰던 모습 그대로다. 선생은 교육과 문학뿐만 아니라 연극, 서예, 만화, 출판미술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기에 전시자료 또한 풍부하다.
먼저 발길 머무는 곳은 ‘소악서루(笑岳書樓)’라 이름 붙인 선생의 서재다. 선생이 생전에 사셨던 온천동 자택 2층 서재를 재현한 것이다. 손때 묻은 목제 책상, 오래된 책들, 등받이 의자, 가방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 사람의 인품과 취향은 물론 삶의 지향까지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서재다. 깊이 사유하고 글을 쓰고 많은 문인과 제자들을 만났을 서재 이름을 왜 소악서재라 했을까? 선생의 호는 향파(向破)가 아닌가? 향파는 ‘파괴를 향하다’라는 뜻일 것이다. 그 파괴의 대상은 또 무엇이었을까? 이에 비해 ‘소악’은 편안하다. 담소를 나누는 산, 화해하는 산이다. 산처럼 담담하게 문학과 사람들과 자연과 얘기 나누고 싶어하셨던 것은 아닌지. 선생이 계시다면 여쭈어보고 싶다.
부산 아동문학을 주류로 이끌다
전시장 작품 활동 코너에 머문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작품집과 저서들--동시집, 동화집, 시집, 소설집, 수필집, 희곡집, 그리고 연구서 등 선생은 생전에 2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냈다고 한다. 선생께서 생각하고 살아온 시간들이, 시대를 살아온 깊은 고뇌가 페이지마다 녹아 있다. 선생은 일찍이 ‘작품은 곧 발언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던 것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인간성 옹호와 회복을 위한 휴머니즘’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교과서에 여러 차례 실려 기억에 생생한 〈메아리〉, 최근에도 새롭게 개정판이 나오고 있는 〈못나도 우리 엄마〉가 먼저 시선에 들어온다. 아득한 두메산골로 시집간 누나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소년의 메아리가 다시 메아리 되어 들린다. 선생은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왔고 따뜻한 인간애를 공유하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부산지역의 아동문학 발전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 일찍이 1958년 손동인, 최계략 등과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1973년 창립한 부산아동문학회 고문을 맡아 《부산아동문학》 창간호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후 부산지역 아동문학 단체의 장을 맡아 지역 아동문학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1980년에는 성기정, 강남주, 김영 등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주홍아동문학상 운영위원회를 발족하고 이듬해 시상식을 가졌다. 선생은 ‘경남지역 근대 아동문학 제1세대 작가이며 문학 실천가다. 경남지역 아동문학을 한국 근대 아동문학의 주류로 끌어올렸다’라는 평이 확신으로 다가온다.
지역문화, 토양을 기름지게 하다
전시장 내 ‘부산지역 문학과 향파’ 코너에는 부산에서의 문학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남송우 교수는 이주홍 선생이 부산에서 해온 문학 활동을 집약해 ‘부산지역 문학의 실질적인 뼈대를 놓고 부산지역 문학을 한국문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고 했다. 문화적 환경은 척박했고 중앙 잡지에 발표할 기회가 적었던 1963년, 선생은 중앙지에 버금가는 지역 문예지 《문학시대》를 창간했다. 선생이 주간을 맡았고 발행인은 추성구, 편집장은 최해군이었다. 당시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과 부산 작가들의 작품을 같은 지면에 발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재정난으로 7집 발행으로 중단해야 했지만, 이는 오직 향파 선생의 역량이 발휘된 결과였으며(남송우, 《향파 이주홍 선생의 다양한 편모》, p. 230), 부산 문단사에 오래오래 기억될 의미 있는 일이었다.(문무대왕, 〈문학시대 이야기〉,https://www.chogabje.com/board/column)
선생은 동인 활동과 동인지 간행에도 힘을 기울였다. 1965년 《윤좌》 창간호를 간행했다. 선생의 주도로 요산 김정한, 청마 유치환, 정운 이영도 등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동인지다. 문학뿐 아니라 음악, 교육 등 문화예술 각 분야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참여했다. 1978년에는 지역 동인지 《갈숲》을 창간했다. 선생이 직접 표지화도 그렸다. 서예가 오제종, 시인 박노석 등 9인이 동인으로 참여했다. 2011년 41타로 종간되었지만 지역 문화인의 생각을 공유하고 나누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주홍문학재단에서는 2021년 이주홍문학축전 20주년 기념 특별전을 마련했다. 주제는 ‘향파 이주홍 선생이 주관한 부산지역 동인지’를 부제로 한 ‘윤좌와 갈숲’이었다. 《윤좌》와 《갈숲》의 각 호 표지와 목차를 전시해 동인지의 흐름을 파악하고 가치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전시였다. 그만큼 지역사회에서 선생의 역할은 컸다.
선생은 동래중학교, 수산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래중학교에서는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당시는 희곡 〈여명〉이 매일신보에 당선된 뒤라서 관심도 컸지만 무엇보다 연극을 통해 힘들게 살아가는 시민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작품 〈청춘기〉를 동래중학교에서 공연한 이래 학산여중, 동래여고 등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부경대학에 부임해서도 정년까지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연극부도 지성으로 지도했다. 바다에 대한 꿈과 미래에 대한 도전정신을 어떻게 키워줄 것인가를 생각했다. 늘 스스로 일어서는 당당함을 강조했다. 스승은 제자를 믿었고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고 따랐다.
순수하고 정직하고 야성적인 곳에 청년다운 매력이 있다. 그들이 무모한 모험을 되풀이한다 해서 웃을 일은 아니다. 그들이 정상적인 곳으로 방종한다 해서 근심할 일도 아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의 체험에서 선악의 분별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이주홍, 〈청년의 향기〉, 《수산》 제7호, 1954)
이런 스승을 제자는 그리워하고 기억한다. 선생의 마지막 제자 이주홍문학재단 류청로 전 이사장의 회고다.
향파라는 거목이 버티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향파는 우리들에게 인문학 시스템을 다 갖춘 대학 캠퍼스보다 훨씬 더 튼튼한 문학, 예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학생들이 싫어하지 않을 정도로만 관여하였다.(류청로, 남송우, 앞의 책, p. 5)
선생은 1966년 개교 25주년을 맞아 학생들이 힘차게 부를 수 있는 행진곡 〈바다의 아들〉을 작사했다. 대학 교시, 학보의 제호, 도서관 현판, 백경탑 휘호를 썼다. 1970년 대학에서는 재학생 대상으로 향파문학상을 제정 시행해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렸다. 1980년에는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기성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이주홍아동문학상도 마련했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2018년 이주홍문학재단에서는 《이주홍과 수산대학》을 간행했다. 류청로, 남송우, 윤한상 교수가 함께 엮었다. 〈수산학보〉에 실린 동화, 소설, 수필, 칼럼을 비롯해 만화, 삽화 등도 수록하고 있다. 스승을 기억하고 이어가려는 아름다운 사제의 정을 느낀다.
그렇게 선생의 길을 뒤따르다
전시실을 내려와 전다형 관장과 강영희 사무국장을 만났다. 봄햇살이 실내에 가득하다.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전 관장은 지난해 관장 소임을 맡아 어려운 시기에 문학관의 활성화에 노력하고 있다. 이주홍 선생이 그랬듯 지역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강했다. 강 국장은 2008년 문학관과 인연을 맺고 현재까지 오랫동안 살림을 맡아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해오고 있다.
전다형 관장(이하 ‘전’): 문학관은 동네 사랑방같이 편안한 공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특별히 시간을 내지 않더라도 오다가다 쉽게 들러 책을 읽고 성찰하고 정보를 나누는 성장의 공간이 바로 문학관입니다. 그러면서 문학을 매개로 꿈을 키우고 함께 커가는 거지요. 동래는 양반촌이잖아요. 예전 서울의 남산골 같은. 동래라는 보석 같은 장소에 문학관이 있는 거지요. 향파 선생님은 이곳에 오래 사셨어요. 돌아가실 때 사모님께 여기를 벗어나지 말라고 유언을 하셨대요. 근본을 저버리면 교육도 예술도 뿌리를 다 잃는 거라고 생각해요.
경: 문학관에서 일하시면서 보람도 있을 텐데요. 전: 우리 문학관은 가능성이 참 많은 곳이라 생각합니다. 한번은 좋아하는 목사님께 제가 관장을 맡게 되었다고 하니 “하늘에서 어머니 한 분을 내려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50세에 나를 낳으셨는데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그러니 잘 모실 어머니 한 분을 주셨다고 하신 거지요. 우리 고장을 대표하는 문인을 선양하는 문학관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복을 많이 지었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늘이 준 인연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좀 늦더라도, 성과가 늦더라도, 이름 없이라도, 옆에서 성실히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경: 국장님은 향파 선생님을 뵌 적이 있으신지요? 강영희 국장(이하 ‘강’): 선생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메아리〉를 읽고 선생님께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때 《사랑하는 악마》라는 신간을 보내주셨어요. 언젠가 인터뷰하는 선생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날 밤 꿈에 선생님이 나타나셨어요.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경: 문학관을 운영하시는 분들은 방문객들이 뭔가 좀 느끼고 갔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전: 우린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다 가잖아요.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이분은 이런 걸 남겨놓고 가셨구나, 그러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아요. 고뇌해라. 꿈을 한번 꿔봐라. 희망을 가져라. 그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강: 선생님 호가 향파잖아요. 향파의 뜻은 스스로 깨치면서 나아가자는 의미입니다. 선생님 자신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여러 분야를 거의 독학으로 배우셨거든요. 그리고 일가를 이루셨습니다. 선생님의 그런 진취적인 도전정신, 그런 걸 느끼고 갔으면 합니다.
경: 문학관은 전시와 보존, 그리고 연구도 중요하겠지만 프로그램 개발 운영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강: 향파 선생님은 여러 분야에 많은 작품을 남기셨어요. 콘텐츠가 풍부하죠. 다양한 콘텐츠를 프로그램에 접목해 실버 세대를 대상으로 그림자극, 그림책 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일찍이 관심을 가졌던 출판미술 분야 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저희 선생님이 아무래도 신문, 잡지 이런 걸 많이 하셨으니까 독서신문 꾸미기, 어린이 연극도 진행했어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예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외부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두 분 말씀을 뒤로하고 문학관을 나선다. 문학관 바로 뒤편에는 고층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선생께서 거닐던 그때의 동네 모습이나 자주 오르시던 금정산은 옛 모습이 아니다. 선생이 걸어온 길에는 향파라는 강한 도전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향파는 두려움 없이 새로운 길을 개척해왔다. 그 정신을 잇고 확산해가는 것은 선생에 대한 사랑이고, 문학에 대한 사랑이고, 지역사회에 대한 사랑이다.
문학관 주변 맛집, 풍원장 시골밥상집
새봄이다. 사계절 자연의 순리에 따라 우리 몸의 조화와 균형을 생각하는 밥상,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42년째 한정식 밥상을 차리고 있는 풍원장을 찾았다. 문학관에서 좀 떨어진 기장에 있다. 시골밥상이라 그런지 시골집을 개조해 만든 한옥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한글로 ‘풍원장’이라 쓴 간판을 현판처럼 대문 위에 달았다.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여느 한정식집과 달리 주 메뉴를 돼지불고기, 오리훈제, 보쌈, 전복회 등에서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돼지불고기를 주문했다. 푸짐하게 상이 차려진다. 각종 나물을 비롯해 채소와 해초무침, 여기에 호박된장찌개, 양념게장, 간장새우, 돼지불고기, 편육, 잡채, 멸치볶음 등 20여 가지 반찬을 기본 구성으로 하고 있다.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말을 실감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에 찰지고 따듯한 밥 한 숟갈, 감칠맛 도는 간장새우 한 입에 따듯한 밥 또 한 숟갈, 어느새 밥 한 공기 뚝딱이다. 마무리 화룡정점은 역시 누룽지였다. 테이블에 설치한 화구에서 바로 끓여 먹는 누룽지와 구수하게 끓고 있는 된장찌개에서 시골밥상의 진한 맛을 느낀다.
5년 만에 내려온 부산,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옛 발자취와 맛을 생각한다. 몰라보게 변화한 발전된 도시 외관에서 오늘의 부산을 새롭게 느낀다. 춘삼월, 이주홍문학관에서 부산의 멋을, 시골밥상에서 부산의 맛을 간직하고 떠난다.
* 이 글을 쓰는 데는 《향파 이주홍 선생의 다양한 편모》(남송우, 베토 현대해양, 2022)를 많이 참고했다. 감사드린다.
경향수_에이치에스라이팅 대표
경희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에이치에스라이팅 대표로 있다. 대학 시절 음악다방에서 DJ를 맡으면서 다양한 음악에 빠졌다. 회사에 입사해서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지역의 특색 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었고 많은 조리장을 만났다. 틈틈이 음악과 음식이 어울리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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