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경 아바스 칼리파국 기간 동안 이라크의 바그다드에 번역을 목적으로 설립된 ‘지혜의 집’ [이미지 출처: islamicity.org]
도서관이 지식의 보고이자 종교와 민족에 상관없이 학문 연구의 장으로서 역할을 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8세기 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이슬람 아바스(Abbasid) 왕조는 고대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에서 영감을 받아, 전 세계의 지식을 보존하는 도서관을 설립하겠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아바스 왕조 2대 칼리프 만수르(Caliph Al Mansur)가 통치하는 기간에는 단순히 책을 저장하는 장소인 ‘지혜의 도서관(Khizanat al-Hikmah)’으로만 구상됐지만, 이후 하룬 알 라시드(Harun al-Rashid)가 통치하면서 ‘지혜의 집(Bayt al-Hikmah)’이라는 학술 중심지로 확장됐다.
하룬 알 라시드는 권력을 잡자마자 궁전 내 비공개 도서관의 일부를 공적인 공간으로 변경시켜서, 이전에는 궁정 학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던 도서관과 그 안의 자료들을 일반 대중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알고리즘의 어원이 된 수학자 알 콰리즈미(al-Khwarizmi), 천문학자 야흐야 이븐 아비 만수르(Yahya ibn Abi Mansurh), 철학자 알 킨디(al-Kindi) 등 당시 여러 학자, 번역가들이 지혜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21세기인 지금도 우리가 곧바로 떠올리는 도서관과 학자의 관계는 지혜의 집과 그곳에 모였던 학자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학자와 작가의 공동체가 되는, 뉴욕공립도서관의 프로그램
미국 뉴욕공립도서관의 ‘학자 및 작가를 위한 도로시·루이스 B. 컬먼 센터’는 스티븐 슈워츠먼 건물에 있는 자료를 활용해 자신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학자, 소설가, 극작가, 시인뿐 아니라 서적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시각예술가들에게도 연구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센터는 매년 9월에서 다음해 5월까지 지원할 15명의 연구자를 선정하는데, 센터의 임시 이사인 마사 호데스(Martha Hodes)는 “연구자의 탁월한능력과 더불어 도서관의 자료가 얼마나 강력하게 필요한 프로젝트인지를 바탕으로 연구자들을 뽑았다”고 선정 배경을 밝혔다.
올해 선정된 15명의 연구자들은 2023년 9월부터 2024년 5월까지 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원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연구자들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급여를 받으며, 스티븐 슈워츠먼 건물에 있는 개인 사무실을 이용해 본인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 센터는 도서관뿐 아니라 뉴욕시 내에 창의적이고 학술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연구자들이 센터의 공개 포럼을 주최하거나 뉴욕공립도서관의 공개 포럼에 참여하도록 한다.
1999년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에 수많은 연구자들이 참여해 작품을 완성했고, 그로 인해 수상의 영예를 얻은 사람들도 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람다문학상을 수상한 안드레 애치먼(André Aciman), 《트러스트》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에르난 디아스(Hernan Diaz), 《깡패단의 방문》을 쓴 작가 제니퍼 이건(Jennifer Egan), 《미국식 쿠바 역사(Cuba: An American History)》를 쓴 역사학자 에이다 페러(Ada Ferrer), 역사학자인 아네트 고든 리드(Annette Gordon-Reed), 애니메이션 감독 스티븐 한(Steven Hahn), 역사학자 니콜 플리트우드(Nicole Fleetwood)와 앤서니 그래프턴(Anthony Grafton) 등이 그러하다.
2018년 9월,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프린스턴대학교 브룩 홈스(Brooke Holmes) 교수는 “컬먼 센터와 뉴욕공립도서관의 방대한 자원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생각하고 쓸 수 있는 끊임없는 시간과 흥미로운 학자와 작가들의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전혀 고립되지 않았다. 우리는 글을 쓸 때 지지를 받고가치를 느끼기 때문에 글을 쓰는 환경에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작가, 시인, 비평가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중 몇몇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컬먼 센터는 각자가 고독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일을 한다”고 회상했다. 학자이자 작가인 후아 슈(Hua Hsu)는 2019년 9월이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매일 아침, 나 이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을 이용했는지 생각하면서 일종의 스릴을 느꼈다”며, “센터의 프로그램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강조했다.
도서관 자료를 이용해 소설을 집필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에르난 디아스, 그는 2023년 퓰리처상 수상작가다.
[영상 출처: nypl.org]
전쟁으로 설 자리를 잃은 우크라이나 학자들을 위한 긴급 지원
학자를 위한 지원은 뉴욕공립도서관에서 그치지 않는다.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미국 포드햄대학교의 유대인연구센터는 상상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12명의 학자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이 센터는 유대인과 슬라브인 연구 분야에서 석사과정을 진행하는 학생들에게 1년 동안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동일한 분야에서 박사과정 중인 학생들과 학자들에게는 급여와 더불어 포드햄대학교 도서관의 온라인 자료에 대한 접근권과 원격 워크숍 초대권을 제공했다.
이에 뉴욕공립도서관과 미국 유대인연구아카데미도 동참하여, 어쩔 수 없이 고국 우크라이나를 떠나야 했던 학자들을 지금까지 지원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관리자인 매그다 티터(Magda Teter)는 “수집하고, 보존하고, 기억하는 것이 이 순간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학자들이 이 시기를 역사에 기록하는 데 이 프로그램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매그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학자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그들의 학술기관이 폭격을 당했거나 기관에 접근할 수 없을 때 작은 도움이라도 준다면 그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고 이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전쟁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언어 유산 보존
테티아나 바타노바(Tetyana Batanova)는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에 있는 베르나드스키국립도서관 유대인 문헌 부서의 대행 부서장으로서, 1917년부터 1918년까지 우크라이나 정부에 관여했던 다섯 개의 유대인 정당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2022년 4월에 테티아나가 키이우에 위치한 그녀의 거주지에서 ‘이디시어(Yiddish)의 어원과 자료: 유대인과 이디시어 연구에 대한 나의 길’이라는 강의를 화상으로 진행했을 때,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한 2022년 2월부터 러시아 군대는 키이우 부근 부차(Bucha)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디시어는 중앙 및 동부 유럽에서 쓰이던 유대인 언어로, 1917년 당시에는 우크라이나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네 개 언어 중 하나였다.
테티아나는 “화상 강의를 요청받았을 때가 4월이라서 좋았다. 3월에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며 2022년을 떠올렸다. 고국이 존폐 위기에 직면한 상황 속에서 테티아나는 자신의 연구가 과연 중요한지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가졌다. 테티아나는 포드햄대학교의 유대인연구센터, 뉴욕공립도서관, 미국 유대인연구아카데미가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연구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을 회복했다. 역사 연구는 원본 자료를 얻을 수 있는 만큼 깊어지기 마련인데, 테티아나는 2006년에 뉴욕공립도서관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어서 어떤 종류의 문서와 기사가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테티아나의 연구는 홀로코스트 그리고 그 희생자들과 본질적으로 연관된 언어인 이디시어에 초점을 두고 있다. 1919년 우크라이나를 휩쓴 반유대인 집단 학살로 사망한 3만여 명의 주요 언어가 이디시어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의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크라이나어만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만, 테티아나는 “이디시어가 일반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역사를 배우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도서관과 학자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으며 상호 보완적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보들리언도서관은 1952년부터 매년 저명한 학자를 선정해 문헌학의 모든 주제에 대해 ‘라이엘 강연(The Lyell Lectures)’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5월 23일부터 6월 6일까지 진행된 라이엘 강연은 초기 유럽, 특히 1500년부터 1630년에 이르는 북부 르네상스 시기 학술 작업에서의 대필작가나 자료조사 등의 집필 어시스턴트역할에 초점을 맞췄다.
이번 강연에 참여하는 앤 블레어(Ann M. Blair) 하버드대학교 교수는 전문 분야가 초기 유럽의 문화적·지적 역사인데, 독서의 역사, 학문의 역사, 과학과 종교가 상호작용하는 역사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앤은 이번 강연에서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Erasmus), 프랑스의 인문학자 아드리앵 튀르네브(Adrien Turnèbe)와 페트뤼 라무스(Petrus Ramus)를 포함한 사례 연구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라이엘 강연에 참석하고 싶은 사람은 예약을 통해 다섯 개의 강연에 모두 직접 참석할 수 있고, 사전에 등록하면 온라인으로도 참석할 수 있다. 모든 강연이 끝난 지금은 온라인으로 강연을 들을 수 있다.
더블린 트리니티대학교 중앙도서관 정문. 도서관 이름에 ‘Berkeley’가 들어가 있다.[이미지 출처: 위키]
모든 공동체를 위해 학자를 재평가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서관
곧바로 생각나는 도서관과 학자의 관계는 공생이지만, 최근 도서관은 학자를 재평가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지난 5월,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대학교가 중앙도서관 이름 ‘Berkeley Library’에서 ‘Berkeley’를 지우고새로운 명칭을 찾기로 결정했다. 중앙도서관명의 ‘버클리’는 더블린 트리니티대학교 졸업생이자 18세기 철학자인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의 이름에 유래를 두고 있다.
조지 버클리의 유산에 대한 공식적인 재조사는 더블린 트리니티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와 캠페인으로부터 말미암아 2022년부터 시작됐다. 문제적 유산을 검토하는 단체의 수개월 간의 연구에 따르면, 조지 버클리는 1729년부터 1732년까지 미국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에 거주하는 동안 그가 운영하는 농장을 위해 몇몇 노예들을 사들였다. 대학교의 가비 풀람(Gabi Fullam) 학생회장은 “중앙도서관은 캠퍼스 내 모든 공동체를 위한 물리적인” 공간임을 강조하며 “점점 다양해지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노예 주인의 이름을 딴 도서관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대학교의 이사회는 단체의 연구 결과와 권고에 따라, 조지 버클리가 노예를 소유했고노예제를 지지하는 글을 매체에 썼다는 결론을 내려 중앙도서관명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도서관이 학자들의 학술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관계를 넘어, 학자들이 도서관에서 대중과 학술적 교류를 하고 도서관이 학자를 재평가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지금까지 도서관과 학자가 상생해온 길을 더욱 새롭고 굳건하게 만들어갈 것이다.
5. “A Philosopher and a Slaver, but No Longer a Name on a Library”, 2023.5.8., https://www.nytimes.com/2023/05/08/world/europe/george-berkeley-trinity-college-dublin.html
서우민_자유기고가
자유기고가. 대학에서 국제학부를 전공하고 국제환경단체에서 콘텐츠 담당자로 근무하며 잡지 《그린 마인드》에 기고했다. 최근에 다시 기고를 시작해 해외의 다양한 현안 이슈와 도서관 이슈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5월, 스페인 극작가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 1562~1635)의 새로운 희곡 작품 《프랑스 여성 로라(La Francesa Laura)》가 출판됐다. 스페인국립도서관에 숨겨져 있던 이 작품을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발견했기 때문에 이번 출판이 더욱 의미 있다. 이 작품은 국립도서관의 기록보관소에
청소년-노년이 짝을 이뤄 열띤 토론을 하는 도서관 지난 5월, 미국 브루클린공공도서관은 ‘자유로운 노년’이라는 주제로 노년층을 위한 행사를 진행했다. 매년 노년층을 대상으로 행사를 하는데 올해로 7회를 맞이했다. 이번 행사는 55세 이상의 시민들이 노년층을 위한 도서관 프로그램을 체험하고 지역사회가 고정관념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기회를 제
2114년에 출간될 책을 위해 100년 동안 천 그루의 나무 심기노르웨이 예술가 케이티 패터슨(Katie Paterson)은 2014년부터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Future Library Project)’를 진행하고 있다.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에서는 2114년에 출판될 책의 재료를 자급자족하기 위해 100년 동안 천 그루의 나무를 심고 수확한다. 케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