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우리 도서관의 북큐레이션 담당자가 되었을 때 큐레이션의 뜻부터 찾아보았다. 사전에서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콘텐츠를 목적에 따라 분류하고 배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분야를 막론하고 요즘 같은 시대에 가장 필요한 과정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글을 빌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본다. 북큐레이션, 왜 하는 거지?
일본의 츠타야 서점 CEO의 이야기를 빌려 오자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요보다 부족한 공급으로 인해 소비하기 급급했던 시대인 ‘퍼스트 스테이지’가 있었다. 이후 대량 생산과 대형 유통 플랫폼의 등장으로 소비자가 상품을 선택할 수 있게 된 ‘세컨드 스테이지에’ 이어, 현재는 그 모든 것이 과공급된 ‘써드 스테이지’ 시대이다. 브랜드 매장이 줄어들고 편집숍이 유행하는 걸 보면 사람들은 특별히 선별되고 누군가 먼저 검증해준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마케팅 영역에서는 MD가 그 일을 하고 도서관에서는 사서가 그 일을 맡는다.
정보가 독점되던 과거를 지나 공공도서관의 등장으로 자유로운 독서가 가능해졌다면, 현재는 기존 출판산업에 더해 POD 도서, PDF 전자책 등 다양한 출판 경로를 통해 하루에도 몇백, 몇천 권의 책이 쏟아지는 시대다. 그중엔 분명 ‘양서’라고 하는 좋은 책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책도 있다. 그래서 도서관의 북큐레이션은 한정된 예산으로 얼마나 좋은 책을 확보하고 선보이는가와 연결된다.
북큐레이션은 수많은 책 중에서 도서관에 어떤 책을 들여놓을 것인가 하는 수서 단계부터 시작된다. 지난한 단계를 걸쳐 선택된 서가의 책들은 이제 이용자의 손에 다다르게 되는 걸까? 슬프게도 꽤 많은 책이 한 번도 이용되지 않은 채 오랜 시간 서가에 잠들게 된다. 여기서 사서는 책을 세상으로 한 번 더 끄집어낸다. 수많은 장서 중에서 특히 이용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도서를 선별하고, 주제를 정하고, 보기 좋게 꾸며 전시한다. 이처럼 잠자고 있는 책을 꺼내 주고 그 책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이 북큐레이션이다. 사서들은 그 일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
눈이 가요 눈이 가
요즘은 책도 표지 마케팅이 있을 만큼 비주얼이 중요한 시대이다. 아무리 좋은 책을 갖다 놓아봤자 그 공간에 눈길이 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 그러나 슬프게도 한정된 예산으로 인해 공간을 제대로 꾸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우리 도서관은 전시 공간이 마련되기 어려운 구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효용성을 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처음 북큐레이션 담당이 되었을 때 다시 보게 된 북큐레이션 서가는, 거대하기만 하고 눈도 손도 가지 않는 구시대적인 모습이었다. 디테일에 집착하는 사회에서 이런 모습으로는 이용자의 눈길을 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가도 바꾸고, 공간 배치도 다시 하면서 ‘여기 추천 도서 있어요!’라는 느낌으로 좀 더 눈에 띄게 꾸미기도 했다. 이런 유행이 또 언제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담당 사서의 감각대로, 느낌대로, 믿음대로 북큐레이션은 계속 변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도서관 ‘마음양식장’ 서가서울도서관 ‘마음양식장’ 서가
욕심 vs 현실
우리 도서관은 상설 전시인 ‘월별 북큐레이션’과 비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프로그램 북큐레이션’을 하고 있다. 전자는 정해진 북큐레이션 공간에서 월별로 주제를 선정해서 주제와 관련된 도서를 소개하는 전시이고, 후자는 우리 도서관에서 운영한 강좌나 행사와 관련한 책을 소개하는 전시이다.
주기적으로 주제를 바꿔 추천 도서를 찾는다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처음 몇 개월만 지나면 곧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사서를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왕 하는 거 잘해보자는 욕심에 우리 도서관만의 독특한 주제를 찾고 싶다는 의욕이 앞선다. 편한 길도 사서 고생하는 참사서다운 미련함이다. 그래도 이런 미련한 사서가 도서관에 한 두 명은 꼭 있어야 도서관이 재미있게 굴러간다고 믿는다.
큐레이션 주제는 주로 이용자에게서 찾는다. 이용자들(확대하면 대중)은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것들이 유행하는지, 주된 이슈는 무엇인지 등을 주의 깊게 살핀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기에는 함께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 사랑, 희망과 같은 주제를 다뤘다면, 요즘에는 좀 자유로워졌다. 사서 마음대로 한 세트를 구성해보는 북 오마카세라든지, 이용자의 추천을 모아 다시 큐레이션 해보는 등의 재미있고 실험적인 시도들도 계획 중이다(관장님이 결제해주신다는 전제 하에).
처음엔 의욕이 앞서 큐레이션 해보고 싶은 주제를 여러 개 찾았지만, 업무가 너무 바빠지면 서점 검색창에 키워드를 검색해서 목차와 요약을 보고 대충 내가 생각한 주제 방향에 맞으면 큐레이션 목록에 넣기도 한다. 머릿속에선 ‘이러면 안 돼!’를 외치지만, 현실적으로 계속 실적과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사서가 아닌) ‘직원’ 입장에선 모든 책을 읽어보고 추천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완전히 읽지 않고 이렇게 추천해도 괜찮은 걸까? 다른 사서들도 나와 같은 딜레마를 안고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으로 큐레이션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렇게 완성된 북큐레이션 공간은 지나갈 때마다 괜히 긴장하게 된다. 나의 안목과 기타 등등이 시험대에 오른 느낌이다. 처음으로 큐레이션을 완성했을 때는, 이용자가 그 앞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뒷걸음질 쳐 어떤 책을 고르는지 숨죽여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책을 빌려가면 뿌듯함을 느꼈다. 선택받은 기분이 이런 걸까? 반대로 죄인이 된 적도 있다.
큐레이션 도서는 보통 한 달 정도 큐레이션 서가에 따로 전시한다. 그런데 어떤 이용자분이 찾는 도서가 전시 서가에 비치된 것을 모르고 일반 서가에서 한참 찾다가 끝내 직원에게 물어보고는 자신을 헛고생시켰다며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물론 검색 결과에 도서 위치가 북큐레이션 서가라고 부기되어 있지만, 종종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이용자 눈엔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해해야 한다.
북큐레이션을 좋아하는 분들도 많다. 북큐레이션 서가를 보다가, 지나가던 사서에게 곁다리 질문-주제가 ‘정월대보름’이었는데 추석에 관한 책도 추천해줄 수 있는지 등-을 하는 분들도 있다. 지방의 모 교육원에서는 자신들의 홈페이지 교육자료실에 웹 링크로 우리 도서관의 북큐레이션 페이지를 게재하고 싶다는 요청도 있었다. 어느 정도 쌓인 도서 목록과 데이터들이 누군가에게 교육자료가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유의미한 성과도 있다. 월별 북큐레이션을 예로, 한 달 동안의 이용률 통계를 내보면 우리 도서관 장서가 된 이래로 대출 횟수가 0이었던 책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대출 횟수가 0인 도서를 20권쯤 소개한다면 한 달 뒤 7권 정도로 줄어드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몰라서 못 읽은 책이 있다는 방증이니 사서는 계속 꺼내고 보여줘야 한다.
북큐레이션은 사서가 권위자라서 책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다. 숨겨진 책을 찾고 주제별로 엮어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선택에 도움을 주는 일이다. 비독자를 독자로, 독자를 애독자로 만드는 그 날까지, 도서관의 북큐레이션은 계속될 것이다.
이지영_서울도서관 사서
현재 서울도서관 정보서비스과 주무관으로 재직 중이다. 2022년부터 서울도서관 북큐레이션 전시 총괄 업무를 맡고 있으며, 그 외에도 인문학 강좌 기획 운영, 서울도서관 독서문화 프로그램 운영, 대시민 독서증진 프로그램 개발 등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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