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무안군오승우미술관에 앉아 있는 이피 작가
Q 설화나 동양 고전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인가.
A 동양 신화는 메소포타미아 신화나 그리스 로마 신화보다 상상동물이나 신화적 인물의 수가 엄청나고, 그 이미지의 다양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하다. 《산해경》을 예로 들어보아도 그 기괴함과 이질적인 형상의 다양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머리가 아홉 개 달린, 사람도 아니고 곤충도 아니고 새도 아닌 구면충(九面蟲)처럼. 거기에 비하면 서양 신화는 서양의 타블로이드판 주간지를 고대판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단순성이 느껴진다. 잘생기고, 능력 있고, 예쁜 신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연애하고, 분노하는 걸 보면 옛 서양 사람들은 가십을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동양 신화는 그와는 다르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동물과 신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유머와 기괴함과 광대함으로 우주 끝까지 이끌어간다. 동양 신화의 또 하나의 매력은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등장인물이 신화에서 사라진다는 거다. 서양 신화에서처럼 끝없이 다시 되돌아와 가십을 생산하지 않는다. 동양 신화의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행동은 내 작업과 연결된 점이 있다. 내가 레진으로 만들거나, 회화 작품으로 제작한 다양성의 생물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서 혀가 온몸에서 내뿜어져 미역처럼 자라고 있거나, 100개도 넘는 시계가 여드름처럼 피부에 돌출되어 있는, 내 상상력으로 주조되거나 그려진 생물들과 무생물들의 조합물인 이 존재들은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작품 속에서 주조해나간다. 그것들은 관객들이 그 작품 앞을 지나가버리면 자신의 기나긴 이야기를 멈춘다. 관객들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자신의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각각의 작품은 하나이면서 여럿이니까. 내 작품에선 디테일한 작은 부분도 하나의 생물/물질이고, 전체도 하나의 생물/물질이다.
Q 귀엽다고 생각한 서사 속 괴물이 있다면?
A ‘귀엽다’는 정의에 대해 이제까지 잘 생각해보지 않았다. ‘불쌍하다’, ‘아름답다’, ‘연약하다’는 생각해본 것 같다. 갑자기 《산해경》의 ‘해외남경’ 편 관흉국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가슴에는 구멍이 나 있다. 두 사람의 일꾼이 사람의 가슴에 막대기를 끼워서 앞뒤로 지고 가는 삽화가 있다. 그들이 지금 시대의 교차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쓸쓸한 광경이다. 바람이 드나드는 가슴을 가진 사람들. 한편으론 귀엽기도 한 건가? 불쌍하고 연약해 보이니까.
만약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의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생각해보게도 된다. 버스나 기차에 좌석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바퀴와 엔진이 달린 교통수단 위에, 꼬챙이에 사람들을 줄줄이 말린 오징어처럼 끼워 이동하게 하면 지금의 교통수단보다 공간 손실이 적을 것이다. 연료도 절감될 것 같다. 이 삽화는 우리가 다른 생물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는 다른 생물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판매와 이동과 요리에 적당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귀엽다고 한다.
Q 외국에서 지낼 때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달래거나 견디게 해준 책이 있나.
A 여러 책이 있겠지만 《Grendel》이 떠오른다. 지금 이 시대에 유행하는 책보다는 내가 읽는 책이 낸 길을 따라서 파생되는 여러 책들을 읽는다. 지나간 세기의 고전들을 많이 읽는 편이다. 19세기나 20세기가 소설의 르네상스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산세계문학총서’를 즐겨 읽는 편이다. 내가 다닌 대학에선 첫 학기부터 마지막 학기까지, 매 학기 ‘에세이 쓰기’라는 과목을 필수로 들어야 했다. 2학년 때 ‘Monster‘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괴물에 관한 책을 한 주에 한 권씩 읽고 짧은 에세이를 제출해야 하는 수업이었다. 《Grendel》은 《프랑켄슈타인》에 이어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그렌델은 베오울프 서사시에 나오는 괴물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서사시와 같은데, 단지 주인공이 영웅 베오울프에서 괴물 그렌델로 바뀌는 것만 달랐다.
미국에서 가장 개방적이라는 대학을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도 인종차별과 아시아인 차별이 있었다. 동양 여자 판타지에서 비롯한 잘못된 시선도 받았다. 그때처럼 내 몸의 형상과 색채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방학이 지나고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벗을 수 없는 두꺼운 가죽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든 적도 있다. 피부와 형상, 그리고 습득된 고정관념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시선의 폭력을 몸으로 느끼는 때였다.
그렌델은 어린아이지만, 용의 가르침을 받아 인간보다 더 고차원적으로 자아와 우주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괴물?)이다. 그는 나무 뒤에서 몰래 엿보면서 인간의 정치, 종교, 전쟁에 대해 신랄하게 비웃는다. 그러나 털북숭이 생김새 때문에 괴물 취급을 받고 습격을 받는다. 아무리 그렌델이 자기 언어로 말해도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한다. 짐승의 울부짖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는 근처 왕국을 습격해서 사람들을 잡아먹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We, the accursed, didn't even have words for swearing in!’이라고 한다.
나는 이방인으로서 혹은 그렌델로서 작업을 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는데, 내가 만든 각각 다른 조소 작품들이 ‘나와 같은 나들’로 모여 있는 군단처럼 보였다. 그것들은 말이 없이 서 있었다. 저주받은 것처럼 언어가 없었다. 《Grendel》은 나에게 이방인, 괴물 정체성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고, 정체성에 대해 사유를 시작하게끔 해준 책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제작한 작품(<승천하는 것은 냄새가 난다>)의 소재가 마른 오징어였는데, 그 냄새나는 주검이 내게는 인간의 피부처럼 느껴졌다. 차별받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들 말이다.
Q 미술 작업 중 최고의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
A 금선(金線)을 그을 때다. 한국에 돌아와서 만봉 스님의 제자인 원미희 선생님으로부터 불화를 배웠다. 내가 받은 서양 미술 교육에 동양 미술(한국 미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선을 몇 개 긋고는 참선하시고, 다시 선을 긋기를 반복하셨다. 불화의 선은 매우 가늘다. 실선을 그을 때는 다른 생각을 하면 그림 전체를 망치게 된다. 코가 가렵다고 느끼기만 해도 선이 비뚤어진다.
불화를 배우고 나서 고려 불화의 선 긋기를 내 작품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금선을 그을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다. 마음이 저절로 매우 평온해진다. 나의 정신과 몸을 붓 끝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곧 느끼지 못하게 된다. 오직 이 세상에 가느다란 선만 존재한다. 형언하기 어렵지만 어느 감각도 내 것으로 느껴지지 않다가 선이 다 그어진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을 때 최고의 (불교적) 희열을 느낀다.
설치 작품 가운데에서 독서 중인 이피 작가
Q 규모가 큰 설치작업을 할 때의 감정 상태를 설명해달라.
A 나는 극작가이신 아버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성인 연극을 즐겨 관람해왔다. 나는 스스로 기억력이 굉장히 뛰어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나간 일들의 디테일들을 같이 경험한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그들은 매우 놀란다. 아버지의 연극인 <호모 세파라투스>를 관람했던 서너 살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배우들이 모두 커다란 가면을 쓰고 있었다. 팝콘 기계에 얼굴을 넣고 확대시키면 그런 얼굴이 될 것 같은 가면을 쓴 배우들이 등장했다. 아직도 그들이 빌딩들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오래된 사진처럼 나는 그 장면을 자주 꺼내 본다. 그것이 내가 가장 처음 목격한 설치 작품일 것 같다. 큰 설치작품을 하는 건 어린 시절의 그 기억과 이어져 있다. 규모가 큰 설치작업을 하는 건 연극 무대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연극과는 달리 내 연극의 서사의 완성은 관객들이 만든다. 나는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4차원이 아닌 4와 8분의 1차원처럼 비뚤어진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관객들이 그 속에서 잠시 살게 한다.
설치작업을 할 때의 감정 상태는 그저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밥을 하고 청소를 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놀라게 하고 감동시키려 작업을 하지 않는다. 교훈을 주거나 문제를 제기해서, 우리가 다 아는 문제를 다시 한 번 거론해보고 싶지도 않다. 가령 창조해놓고 피조물들이 알아서 잘 살길 바라는 여러 신화의 창조주들의 마음과 비슷할 것 같기도 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쉈다가 다시 만들 수도 있고. 어렸을 때부터 이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작업을 할 때는 감정의 동요가 없다. 오히려 작업을 하지 않을 때 슬프고 아프고 기쁜 감정을 느낀다.
Q 아직 읽지 못했지만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을 꼽아본다면?
A 도서출판 동연에서 나온 이규호 역 《나그함마디 문서》를 며칠 전에 강남 영풍문고에서 샀다. 1945년, 나그함마디라는 이집트의 작은 마을에서 콥트어로 쓰인 영지주의 복음서들이 대거 발견되었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완역본이다. 나는 몇 년 전에 문서들 중 하나인, 2006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출간한 《Gospel of Judas》를 읽은 적이 있다. 유다는 예수의 의중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제자다. 예수는 유다에게 우주의 비밀을 알려준다. 예수는 이 세상에는 만 개가 넘는 우주들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사는 우주는 가장 하등하고 덜떨어진 신이 다스리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불쌍한 피조물을 위해서 예수가 이 우주에 왕림한 것이다. 이제 다시 원래 있던 우주로 돌아가야 하는데 유다의 배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버블우주와 비슷한 가설을 펼치는 예수의 모습이 매우 흥미로웠다. 나는 나그함마디의 문서들에도 상상해보지 않은 기상천외한 내용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미친 사람의 공상 속에서 나온 것 같은 이론들이 천체물리학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세상은, 혹은 세상 밖은 우리가 모르는 비밀들로 가득 차 있다.
Q 원뿔이란 도형에 대한 생각들을 들려준다면?
A 원뿔에는 비밀을 숨기고 폭로하는 상반된 기능이 있다. 나는 유학하는 동안 일기를 열심히 썼다. 하루치 일기를 다 쓴 다음 그 일기를 찢어 원뿔형으로 종이를 말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텔레비전 포장 박스 위에 하나씩 붙여나갔다. 다 붙여놓고 보니 그 작품은 내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 짐 속에 몰래 숨어 들어온 ‘나방’의 모습과 흡사했다.
뾰족한 쪽을 통해 원뿔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누구도 내 일기를 읽을 수 없다. 그러나 넓은 쪽에서 들여다보면 내 일기를 읽을 수 있다. 그 다음 뾰족한 쪽에 입을 대고 나에 대해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 비밀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쪽에 대고 얘기하면 아무도 들을 수 없다.
원뿔은 나의 말하기와 글쓰기에 대해 반대의 방향으로 나를 드러내주는 이상한 입체다.
무안군오승우미술관에서 독서 중인 이피 작가
Q 어렸을 때 무작정 빠져들어 읽었던 책이 있는가.
A 지금은 ‘반지의 제왕’으로 알려진 《반지전쟁》이다. 초등학생 때 엄마가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호비트의 모험》을 사주었다. 문자 그대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어느 날 엄마의 책장을 보니 같은 저자의 《반지전쟁》이 꽂혀 있었다. 그 책들을 다 읽었다. 그러자 엄마는 다시 《실마릴리온》을 사주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 책들에 대해, 톨킨에 대해 얘기할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중간계’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 아무도 없었다. 영화가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 뒤까지 말이다.
책을 다 읽은 얼마 후 도서출판 예문의 편집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도 주변에 톨킨 전집을 다 읽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놀라워했다. 중간계는 오롯이 나만의 세상이었다. 갠달프도 빌보도 사우론도 나만 알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엄마 친구에게 《산해경》과 《보르헤스의 상상동물 이야기》의 상호 텍스트성에 대해 얘기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그분은 나에게 ‘지금은 생각을 중지하고 대학 입시 준비를 할 때’라고 했다.
여하튼 2001년 피터 잭슨의 영화가 나오면서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을 우리나라 사람 전부가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내가 책을 읽고 상상한 세계와는 많이 달랐다. 어두운 표정의 아라곤이 싸움 잘하는 잘생긴 남자가 되었다. 길쭉하게 생긴 백인 남녀가 자신들이 엘프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본 이후로 내가 ‘중간계’를 방문하는 횟수가 줄었다. 흑인들이 패러디한 《반지의 제왕》을 보고 톨킨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더욱 확실하게). 이제는 중간계에 아예 가지 않는다. 엄마는 이 영화를 볼 때 외투로 자기 머리를 덮고 아예 화면을 보지 않았다.
Q 전시나 작품의 제목을 잘 짓는 비결이 있는가.
A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계속되는 나의 이야기 안에서 제목은 저절로 추출된다.
Q 타임머신을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떤 시대로 가보고 싶은가.
A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로 가고 싶다. 나는 한 시대나 혹은 장소, 생물에 빠지면 그 미시사와 그 시대사, 사물까지 다 알아내고야 마는 집요한 덕후 기질이 있다. 이를테면 바로크 시대나 심해 생물, 조선시대, 천문학, 위촉오 삼국시대 등등 많이 있었다. CRYO 사에서 나온 ‘Versailles 1685’라는 게임을 한 적이 있다. 게임에서 왕의 시종이 된 나는 베르사유 궁전 곳곳에 숨겨진, 그 시대의 일과 관련한 단서들을 발견하여 루이 14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막아야 했다. 내 상관인 시종장 봉탕의 도움으로 3D로 재현된 베르사유 궁전 내부를 자유자재로 드나들었다. 라신느나 륄리, 몽테스팡 부인 같은 유명인사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귀족들의 옷장을 열어보거나 망원경으로 거울의 방 천장 벽화를 살펴보기도 하고 오렌지나무 화분을 삽으로 파보기도 했다. 아폴론의 방에 있는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서 시종들의 숙소도 마음껏 들락날락거렸다.
그 게임을 하면서 몰리에르와 라신느의 희곡을 사서 읽고, 바로크 음악을 듣고, 건축 양식과 철학, 루이 14세 시대의 역사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당시의 복식, 장신구, 생활사 등등의 미시사를 공부했다. 긴 곱슬머리 가발, 화려한 코트, 꽉 조이는 스타킹, 그 시대 우스꽝스러운 남자들의 패션에도 관심이 많아서, 용돈을 모아 그 시대 패션에 대한 해외 책자를 아마존닷컴이 생기기도 전에 사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베르사유 궁전에 가게 되었다. 같은 날 두 번이나 궁전에 입장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입장객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의 장소에서 어떤 관객도 알지 못하는 벽지 타피스트리 속 비밀의 문을 가리키는 가는 금들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감, 나는 방들의 입구마다 놓인 당시 재상들과 문학가, 예술가들의 두상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들의 작품을 상기했다. 안내 책자에도 없는 벽지 속의 문들과 비밀의 장소들, 그 모든 디테일들을 같이 간 엄마에게 루이14세 시대에서 나온 사람처럼 가이드해줬다. 정말 전생의 기억을 찾은 듯 기시감을 느꼈다. 엄마도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고, 나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결국 나는 ‘Louis XIV-Bodhisattva’라는 제목의 회화 작품도 완성하게 되었다. 루이 14세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곱슬 가발 대신에 구슬 가발을 씌워줬는데 머리를 그리는 데만 보름이 걸렸다. 왕의 모든 일정을 알고 있고, 그의 신하들의 미래를 알고 있으며, 그 시대 예술가들의 작품과 학자들의 저술을 알고, 궁전의 구석구석을 속속들이 다녀봤으니 내가 만약 루이 14세 시대로 간다면 적응을 잘 할 것 같다. 하지만 화려하나 더러운 궁전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다고 알려졌는데 사실 시종들의 화장실은 있었다. 상자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는 모양이었다. 게임에서 나는 루이 14세의 암살을 막은 공으로 그의 침대맡 촛불을 끌 수 있는 가신이 된다. 그 당시로 가면 게임 안에서처럼 조금은 성공한 가신의 삶을 살지도 모르겠다.
Q 다른 사람과 꼭 함께 나누고 읽어보고 싶은, 이피의 작업에 대한 비평글이 있다면 무엇인가.
A 지금은 소설가로 알려진 전하영 작가가 쓴 비평, “능동적 수동태의 미스터리: 이피 작가의 <천사의 내부>에 대한 단상”을 추천한다. 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난지창작스튜디오의 2014년 입주 작가였는데 그곳에서 전하영 작가를 만났다. 그때 전하영 작가는 아직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이었고, 영화감독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였다. 우리는 시기는 달랐지만 같은 학교인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의 대학원 과정을 졸업했기 때문에 서로 얘기할 것이 많았다. 나는 A동에 머물고 있었는데 전하영 작가가 입주하고 있는 B동에 자주 커피를 마시러 갔다. 그 글은 일년 동안 가졌던 우리의 커피 타임의 결과다. ‘흩어져 있는 우연 속에서 필연과의 인연을 찾아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진 자가 좋은 작업을 이끌어낸다’며, 예전에 그가 스태프로 있었던 홍상수 감독과 나의 작업 방식을 비교하는 부분이 재미있었다. Hexagon출판사의 《한국현대미술선 032: 이피》에서 그 글을 읽을 수 있다.
이피가 추천하는 책 다섯 권
《산해경》(정재서 옮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신화집. 동양적 상상력의 기원이자 정수라고 이야기되는 책이다.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프랑수아 라블레)
거인왕인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부자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로, 프랑스 르네상스 시기의 최대 걸작이라고 불린다.
《서유기》 전 10권 완역본(오승은)
돌에서 태어난 원숭이인 손오공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명한 이야기의 원전. 손오공과 삼장법사 일행이 온갖 요괴들의 방해를 이겨내고 불전을 구하러 인도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이 그려져 있다.
《누란》(이노우에 야스시)
실크로드 사막의 오아시스 왕국 ‘누란’에 대한 이야기. 모래폭풍 속에서 사라졌나 다시 나타났다는 신비로운 여인의 전설을 다룬 책이다.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알베르토 망겔·자니 과달루피)
동서고금을 통틀어 수많은 작가들이 상상해낸 장소들을 탐방하고 실제 위치를 추측해보는 상상의 지리학을 담은 책이다.
《The Gospel of Judas》(Edited by Rodolphe Kasser, Marvin Meyer, and Gregor Wurst in collaboration with François Gaudard | National Geographic)
그리스도 신약성서의 외경 중 하나. 유다의 입장에서 본 예수의 이야기로, 유다가 배신한 것이 예수의 계획이라는 등의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피_미술 작가
서울 출생. 평면과 조소 설치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시카고미술대(SAIC)에서 BFA, MFA 과정을 수료했다. 뉴욕 Gallery HD 텔레비전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Artstar> 시즌 2에 출연했다. <이피의 진기한 캐비닛> 전(2012), <현생대 신생누대 이피세> 전(2019)과 <태어나기 전날의 축제> 전(2022) 등 16회의 개인전, 여러 그룹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와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빌바오아르떼 레지던시에 입주했다.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언제, 어디서, 어떤 책을 주로 읽나.A 늘상 작업실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기 때문에, 눈이 피로할 때가 많아 취침 전 침대에서 편안하게 책을
세계그림책특성화도서관인 주엽어린이도서관에서는 어린이들이 다양한 나라의 그림책을 실컷 읽을 수 있다. 1회 그림책 세미나를 열고 도서관 및 출판 관계자, 그림책 작가 등이 모여서 ‘그림책 속의 어린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린이와 만나는 방식을 고민하고 즐거워하는 어른들로 둘러싸여 있는 주엽어린이도서관! 도서관 상주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당일배송으로 책을 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인천의 작은 공간에 책방을 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A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1년 휴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