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KBS 라디오 작가로 쓰신 <세상의 모든 음악> 오프닝 원고를 모아서 《오늘의 오프닝》을 출간하셨죠. 오프닝 원고가 책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A 오프닝은 여전히 모든 원고 중에서 가장 어렵습니다. 청취자들께 보내는 매일의 초대장 같은 것이라서 편안하면서도 특별해야 하고, 무엇보다 공감 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가장 신경 쓰게 됩니다.
오프닝 원고가 책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몇몇 분들로부터 특별한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리더가 된 분들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연설을 해야 하는 분들께서 특히 오프닝을 귀 기울여 들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시는 분들이, 그 ‘어떻게’를 채워주는 무언가가 오프닝에 있다고 하셔서 용기를 냈습니다.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은 오프닝을 녹음하고 필사해두셨다가 학생들에게 들려준다고 하셨습니다. 한 번의 방송을 위해 만들어지는 원고지만 조금 더 의미 있게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오늘의 오프닝》을 만들었습니다.
요즘엔 오디오 콘텐츠를 만드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오늘의 오프닝》을 처음 낼 땐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지만, 오디오 콘텐츠를 만들려는 분들이 오프닝 원고를 교재 삼아 연습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프닝을 묶은 두 번째 책도 올해 안에 같은 출판사에서 나올 예정입니다.
Q 매일 라디오 작가로서 오프닝 원고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글이 안 써지는 날도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오프닝 원고를 잘 쓰기 위해서 해왔던 습관 같은 것이 있나요?
A 글이 안 써지는 날도 물론 많습니다. 하지만 텅 빈 화면 앞에서 어떻게든, 무슨 이야기든 써내야 하는 직업이 라디오 방송작가죠. 그러기 위해선 평소에 여러 분야에 관심을 두고 원고 소재들을 저축해두어야 합니다.
방송작가들에게는 모든 것이 원고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책에 붙여둔 수많은 태그가 어느 날 오프닝으로 태어나죠. 버스 안에서 일어난 일도, 길거리의 광고판도, 음식의 마지막에 넣는 통깨나 파슬리도 다 오프닝의 재료가 됩니다.
방송작가 지망생들과 수업을 할 땐 한 단어로 서른 가지 글을 쓰는 것도 연습했습니다. 예를 들어 신발에 관한 글 서른 가지를 쓴다면 신발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신발과 연결되는 많은 것들을 동시에 생각할 수 있어야 하죠. 지금은 방송작가 지망생들이 충분히 배우고 방송에 투입되지만 제가 방송작가가 되었을 때는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터득한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한 단어로 서른 가지 글쓰기’였습니다.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 중입니다.
무엇이든 다룰 수 있는 요리사처럼 어떤 소재로도 오프닝을 쓸 수 있도록 훈련하고 또 훈련합니다. 지름길은 없습니다. 잠자리채를 높이 든 소년처럼 예민하게 바라보고, 세상에 귀 기울이고, 닥치는 대로 읽고 느끼고 메모합니다.
Q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셨는데 라디오 작가가 되셨습니다. 라디오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나요?
A 대학 방송국에서 기자로, 피디로 활동한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원래부터 무엇이든 끄적이는 걸 좋아했는데,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투고하면 언제나 선택을 받았습니다. 대학 2학년 때 책 열 권을 배낭에 넣고 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그 경험을 써서 보냈더니 방송국에서 당시로서는 아주 큰 선물을 주더군요. 그 선물은 직접 방송국에 찾아가서 수령을 해야 했는데, 그때 만난 피디님이 방송작가가 되면 어떻겠느냐고 권하셨습니다. 그분을 나중에 방송국에서 만났죠.
대학 방송국에서는 대본을 직접 써야 합니다. 그 경험도 나중에 많은 도움이 되었죠. 대학 방송국 시절에 만든 프로그램으로 MBC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라디오 작가가 될 운명적인 마일리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거죠.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대학 4학년 여름방학에 황인용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출연했던 일이었습니다. 방송 출연을 한 뒤에 피디로부터 방송작가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렇게 해서 <황인용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보조작가가 되었고, 1년 뒤에는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작가가 되어 서세원, 이문세 디제이와 함께했습니다. 라디오의 전성기를 함께할 수 있었던 걸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 라디오 매체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라디오만 가질 수 있는 소통 방식이 있을까요?
A 라디오가 가진 장점은 상상의 여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청취자에게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와 달리 라디오는 목소리와 음악을 들려줄 뿐 나머지는 청취자의 몫이죠.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꺼렸지만 언제나 라디오는 틀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라디오를 일상의 배경으로 삼는 분도 있고,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앉아 들어주시는 분들도 있겠죠. 라디오와 청취자 사이에 상상이 더해지는 지점부터 라디오는 특별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삶은 계란의 껍데기와 흰자 사이에 있는 얇은 막처럼 존재하는 그 상상의 영역이 바로 라디오의 매력이자 장점이 아닐까요.
라디오는 머플러 같고, 내복 같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매체죠. 요즘처럼 영상 매체가 주도하는 시대에도 팟캐스트나 오디오북, 또 라디오를 닮은 새로운 콘텐츠들이 생겨나는 걸 보면 라디오는 가장 친근하고 매력적인 매체인 건 분명합니다. 예전에 텔레비전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이제 라디오의 시대는 갔다’는 비관론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라디오는 그때부터 더 라디오다워졌죠.
상호작용이 있는 것도 라디오의 장점입니다. 신청곡을 들려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매체가 있다는 건 멋진 일이죠. 형식이나 물성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또 고전적인 라디오의 전성기는 지났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라디오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의 곁을 지킬 거라고 생각합니다. 재난이 닥쳤을 때도 사람들 곁을 끝까지 지키는 건 라디오인 것처럼 말이죠.
Q <노래의 날개 위에> <당신의 밤과 음악> <세상의 모든 음악>처럼 음악을 다루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작가를 오래 해오셨습니다. 음악과 관련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을까요?
A 제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음악>은 클래식부터 세상 곳곳의 월드뮤직까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음악을 전해드리는 프로그램입니다. 유럽과 미주, 아프리카에서도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듣는다는 청취자들 사연이 도착합니다.
언젠가 뉴욕의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이 사연을 보내오셨습니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답게 뉴욕의 정형외과에는 다양한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데, 병실에 <세상의 모든 음악>을 틀어드리면 모두들 좋아하신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진행자의 언어는 알아듣지 못해도 흐르는 음악 중엔 낯익은 음악들이 있어서 ‘내가 아는 노래야’, ‘우리 고향에서 부르던 노래야’ 하며 반가워하신다고 쓰셨죠. 뉴욕의 어느 병실에 흐르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생각하면 늘 힘이 납니다.
Q 작가님은 방송국으로 출퇴근을 하는 대신에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장소를 찾아 나서곤 하시는데요, 영감을 얻었던 장소로는 어디가 있었나요?
A 방송작가는 채널의 특성에 따라 일하는 방식이 다른데, 대개의 방송작가는 방송 현장에서 일합니다. 하지만 제가 속한 채널은 현장성보다 다양한 자료를 종합하는 글이 필요하기 때문에 익숙한 공간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입니다.
제게 영감을 주는 장소는 집 근처의 ‘아람누리도서관’입니다. 특히 예술 자료실에서 보내는 시간을 참 좋아합니다. 정발산을 바라보고 있는 창문 밖 풍경도 좋고, 도서관 공간 자체도 무척 쾌적해서 최고의 집필실이 되어주죠.
도서관 외에도 제가 집필실로 삼는 몇몇 장소들이 있는데, 아예 ‘작업실’이라는 이름을 건 서점 겸 카페와 개성 있는 독립서점들도 자주 이용하는 편입니다.
Q 라디오 작가는 다방면으로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내가 본 것과 들은 것을 기록해두는 방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이야기 수집법이 궁금합니다.
A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또 다양한 수단을 이용해서 기록합니다. 운전을 할 때 글감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은데, 예전엔 아무리 기억을 잘 하려고 해도 차 문을 닫는 순간 다 잊곤 했죠. 요즘은 음성 메모 기능을 잘 활용합니다.
디지털 기기는 비교적 잘 다루는 편이지만 체계적으로 분류된 저장법을 활용하지는 못합니다. 때론 비효율적인 저장 방식이 새로운 영감을 줄 때도 있죠.
무라카미 하루키 방식의 메모도 가끔 활용합니다. 하루키는 몇 개의 연관 없는 문장이나 단어를 툭 던져놓는 식으로 메모를 한다는데, 예를 들자면 ‘얼굴 붉은 몽골 여인’, 이런 식으로 메모하고 나중에 상상력을 더해서 글을 쓴다고 합니다. 저도 책을 읽고 영화를 본 뒤에 생각나는 단어와 뜬금없는 단어들을 뒤섞어 던져놓기도 합니다. 그런 메모들은 원고로 쉽게 풀리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잘 풀리면 꽤 마음에 드는 원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수시로 메모합니다. 그렇게 메모할 때 가끔 흐뭇합니다. 제 잠자리채가 아직은 건재한 것 같아서요.
Q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라디오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을 위해서 몇 년 전엔 사회적 기업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멘토로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라디오 방송작가 양성 과정에도 참여했고, 개인적으로 멘토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빠짐없이 했던 말은 ‘라디오 방송작가가 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기회도 많지 않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화려한 방송작가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습니다.
라디오 방송작가는 생각처럼 고소득자도 아닙니다. 다만 자기 만족도는 무척 크죠. 일이 아니어도 책 읽고 영화 보고 음악 듣는 일을 좋아하는데, 그 일들이 모두 원고와 연관된다는 건 멋진 일입니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많은 사람들과 나눈다는 것도 한편으론 두렵지만 그만큼 멋진 일이죠.
누구나 라디오 방송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한 달 정도는 아주 잘 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라디오는 매일 차리는 밥상 같은 것이어서, 가지 하나로 서너 가지 요리를 만드시는 어머니처럼 별것 아닌 재료로 끈기 있게 밥상을 차려내야 하죠. 세상을 보는 관점이 그만큼 다양해야 하고, 책과 영화와 음악엔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에 늦지 않게 쓰는 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매일 글 쓰는 훈련이 필수적이고, 불특정 다수가 들어도 공감이 될 이야기를 하루에 서너 가지 정도 써낼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합니다. 남들이 놓치는 걸 섬세하게 건져낼 수 있는 시선도 필요하겠죠.
사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라디오의 전성기는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라디오 작가가 될 수 있는 공식적인 루트도 없으며 수요도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다면 적극적으로 훈련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분명 일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결과가 어떻든 일상의 글쓰기는 두려움 없이 해낼 능력을 얻게 될 겁니다.
Q 매일 글을 쓰면서 생겨나는 내적 변화로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A 매일 글을 쓰는 일은 매일 반성문을 쓰는 일 같기도 합니다. 불특정 다수의 청취자들이 함께 들어도 좋은 원고를 쓰려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필수죠. 원래 대학에서도 심리학 강의를 부전공 학점만큼 들었지만, 원고를 쓰기 위해서 늘 다양한 심리학 서적을 접했습니다. 그 책들은 일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지만 제가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을 통해 차분하게 문제의 본질을 보는 훈련을 많이 한 셈입니다.
매일 쓴 글들은 훈장도 되고 족쇄도 됩니다. 제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뿐인데 청취자들은 마치 당신들을 위해 종일 수고한 것으로 받아주시죠. 좋은 원고를 쓰기 위해서 반걸음만 앞서 걷자, 조금만 더 넓고 깊게 보자는 생각을 늘 하는데, 그것 역시 저를 성장하게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Q 김미라 작가님에게 책이란?
A 예전에 첫 책을 내던 때, 걱정도 많았고 욕심도 많았습니다. 그때 어느 선배님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책은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과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내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고백 같은 거라고 말이죠. 그 말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은 남아 있습니다.
매일 쓰다 보니 제 컴퓨터에는 많은 원고가 있습니다. 또 저희 방송 애청자 중에는 출판 관계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책을 내자는 제안을 많이 받는 편이고, 어느덧 열한 권의 책을 내고 말았네요. 한 번의 방송이 끝나면 공기 속에 흩어지는 것이 방송의 매력입니다. 곧 흩어질 원고를 쓰는 것도 근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완성되면 허물어버리는 티베트 스님들의 만다라처럼 말이죠.
그래도 아주 가끔은 남겨두고 싶은 오프닝이 있고, 예술가의 이야기가 있고, 저녁의 단상도 있긴 합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 책이 되었겠지요. 그 책들 가운데 단 한 권이라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준 적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김미라_라디오 작가
매일 글 쓰는 사람. 시간을 들여야 이루어지는 일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는 믿음으로 오랜 시간을 라디오 방송작가로 살았다. KBS 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로 시작해서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KBS 클래식 FM의 <노래의 날개 위에> <당신의 밤과 음악>을 집필했고, 지금은 역시 KBS 클래식 FM의 <세상의 모든 음악>을 집필 중이다.
방송 원고를 모아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아름다운 단어, 특별한 사용법을 가진 말을 수집해서 쓴 ‘감성사전’이라는 코너는 《그 말이 내게로 왔다》라는 책이 되었다. 월간 ‘샘터’에 8년간 연재한 글들은 에세이집 《위로》가 되었다. 예술가들의 삶을 수십 년 동안 다루며 연결해낸 예술가들의 네트워크, 예술가들의 빅 데이터는 《예술가의 지도》로 출간되었다. 청취자들에게 보내는 매일매일의 초대장인 오프닝 원고들을 모아 《오늘의 오프닝》을 만들었고, 그 밖에도 《나를 격려하는 하루》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저녁에, 당신에게》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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