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0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를 번역하면서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공감이 갔던 여성 작가의 일화
03:36 불문학을 전공하고 미술사와 박물관학으로 분야를 확장하게 된 계기는?
06: 19 한국과 프랑스의 교육 방식의 가장 큰 차이는?
09: 18 자녀와의 대화법
12 : 49 육아에 있어서 다양성이 필요한 이유
15 : 22 큐레이션이 중요한 시기, 큐레이션을 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은?
[인터뷰 내용]
더 라이브러리(이하 ‘더’): 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박재연(이하 ‘박’): 저는 예술과 역사에 대해서 쓰고 읽고 말하는 박재연입니다. 반갑습니다.
더: 선생님께서는 미술 연구자이자, 아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번역가이자, 두 아이들의 엄마이기도 한데요. 그렇게 다양한 역할을 하시면서 기쁨은 무엇이고 어려운 점은 무엇일까요?
박: 제가 굉장히 자주 듣는 질문인데요, 사실 모범 답안을 내놓기가 어려운 질문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여러 가지라고 하는 것의 종류가 정말 다양하기도 하고, 쏟아야 하는 공력이랄까 마음이랄까 체력 같은 것들도 다 달라서, 가장 적절한 정도의 나를 어느 정도로 투여해야 할까를 결정하는 게 조금 어려울 때가 있어요. 또 제가 조절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그런 일이 즉흥적으로 발생할 때가 많고 미리 예상하지 못한다는 게 좀 어려운 점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달라 보이던 일들이 연결되는 것을 볼 때 기쁨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선생님께서는 앨리스 닐, 도리스 레싱, 어슐러 르 귄, 앨리스 워커, 앤절라 카터 등 동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들의 모성과 돌봄 그리고 창조성에 대해서 쓴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를 번역하셨는데요,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가장 공감이 갔던 여성 작가의 일화로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혹은 용기를 주었던 일화를 소개해주셔도 좋습니다.
박: 번역이라는 행위가 요즘 어떻게 보면 굉장히 기계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긴 한데요, 사실 번역이 언어만으로 옮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야말로 번역은 그 텍스트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신 책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같은 경우에는 제가 들어가기는 조금 쉽게 들어갔는데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던 텍스트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여성 작가들, 창작자들의 모성과 창조성이 만나는 부분에 대한 것이라서 아무래도 공감이 가는 대목 대목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특히 불문학을 전공한 제가 위대한 여성 작가들로만 알고 있었던 분들이 지금 세대의 저와 제 동년배들이 하는 고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는 시간을 통과해 왔구나, 하는 것들을 느끼면서 더 많은 감동을 받았던 책이기도 합니다.
말씀 주셨던 것처럼 인상 깊은 에피소드가 한두 가지 있어요. SF의 거장인 어슐러 K. 르 귄은 아이가 셋이었는데 나이 터울이 조금씩 나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어요. 본인은 글을 계속 써야 해서 부엌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큰딸이 지나가고 이어서 막내아들이 지나가면서 소란을 피워 아이들한테 얘기를 하지만 아이들은 엄마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 자신한테 하는 독백처럼 흐리멍덩한 눈을 한 채 “잠깐만, 잠깐만, 조금 있으면 끝날 거야. 5분만 줘”라고 말하는 뉘앙스의 에피소드가 나오거든요. 그러고 나서 저녁을 하러 갔다는 대목이 이어지는데 마치 저의 일상을 보는 것 같기도 했어요. 본인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임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순간을 놓지 않고 붙잡고 있으려는 마음이 느껴져서 공감이 됐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앨리스 워커의 경우에는 어린 시절 사고를 당해서 눈 한쪽에 상처의 흔적이 있었고 그게 평생 동안의 콤플렉스였대요. 그런데 5, 6세가 된 자기 딸이 엄마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평생의 콤플렉스였던 그 눈 속의 상처를 보고 “엄마 눈 속에는 지구가 들어 있어요”라는 말을 해줬고, 그걸 기점으로 앨리스 워커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와요. 아이를 키운다는 건 내가 모르는 나, 혹은 내가 부정하고 싶었던 나를 새롭게 느끼게 해주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공감했습니다.
더: 국내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난 뒤에 파리로 가서 미술사와 박물관학으로 전공을 바꾸셨는데요, 미술사와 박물관학으로 분야를 확장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미술사에서 가장 관심 있는 세부 분야와 그 분야가 연구자로서의 삶에 미친 영향도 궁금합니다.
박: 사실 저도 처음에는 미술의 역사 자체에 대한 관심, 그리고 문화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불문학에서 전공을 바꿔 유학을 갔어요. 프랑스에서 다시 학부 과정부터 다니면서 학업을 길게 하고 온 케이스죠. 그렇게 긴 시간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니, 어떤 작품의 가치가 작품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전시와 연구와 비평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면서 작품의 가치가 창발하고 또 없어지기도 한다는 게 조금씩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전시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고, 전시 공간인 뮤지엄의 제도 같은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제가 학위논문을 알제리를 배경으로 쓰게 됐는데요, 알제리의 수도에 있는 알제미술관에 관해 연구하게 되었죠. 알제리는 132년 동안이나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는데, 우리나라도 같은 식민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가 갖고 있었던 흥미가 또 발현된 지점이 되었던 것 같아요. 식민 지배라는 상황에서 뮤지엄이 생긴 거죠. 다행히 지도교수님께서 너는 알제리 사람도 아니고 프랑스 사람도 아니니까 제3자로서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할 수 있을 거고, 알제리에 프랑스 미술관이 지어지는 그 맥락을 좀 더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그에 대해 연구했고 학위논문을 썼어요. 그러다 보니 한국에 돌아와서도 자연스럽게 박물관과 미술관 같은 공공의 영역, 예술의 영역이 관람객들을 만나는 방식에 대해서 주목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관람객, 방문자, 유저의 경험들이 뮤지엄에서 어떻게 형성될 수 있고 전시나 교육을 통해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알제리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연구 틀 부분에서 보면 식민 지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뮤지엄이라는 시스템이 생긴 것이라서 관련된 학자적 연구를 꾸준히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더: 사실 이제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는 박물관, 미술관을 많이 갖게 됐는데, 혹시 이 정도면 굉장히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시는 뮤지엄의 예가 있을까요?
박: 네, 저도 이제 한국에 온 지 7년 정도, 학위를 마친 지도 7년 차가 되는데요, 최근에 느끼는 건 사실 굳이 선진 사례를 보기 위해서 외국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젊은 학예사분들이 정말 멋진 전시들을 많이 기획하고 계십니다. 예전에는 부수적인 영역이었던 에듀케이터 영역에도 독자적인 전문성을 가진 분들이 많고요. 그런 분들이 속한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많아서 사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출판물이라든지 전시 디스플레이 디자인이 굉장히 수준급인 뮤지엄들을 우리도 이미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특히 개인적으로는 공공박물관, 국립박물관, 국립미술관에 관심도 많고 관련된 일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격차’입니다. 공공미술관들의 조직과 규모의 차이, 예산의 차이, 운영 방식의 차이 때문에 약간의 격차가 계속 날 수밖에 없고, 갈수록 뮤지엄이 자본의 영역이 되어가면서 자본을 많이 투자한 기관과 그렇지 못한 기관 사이에 많은 격차가 생기죠. 이 격차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조금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를 사실 관람객 분들도 많이 고민을 하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멋지고 큰 전시에 관객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고 사실 마케팅과 홍보가 너무 중요한 영역이다 보니, 그런 부분들을 잘 할 수 없는 작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도 우리가 관심을 더 많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더: 프랑스 그림책 다수를 번역해서 한국의 아이들에게 소개해주고 계신데요, 한국의 교육 방식과 프랑스의 교육 방식에 차이를 느끼시는지, 그렇다면 두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박: 제가 첫 프랑스 그림책을 작업해서 출간한 게 2019년인데 크리스티앙 브뤼엘의 《줄리의 그림자》라는 책이었습니다. 이마주 출판사의 ‘철학하는 아이’ 시리즈 중 한 권이었는데, 저는 해당 시리즈를 번역하기 전부터 독자로서 그 시리즈를 좋아했어요. 번역가 혹은 관련된 분들이 뒤에 해제 글을 쓰는 방식의 기획이었기 때문에 그런 점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외국 그림책 같은 경우는 그네들의 문화적인 맥락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없다 보면 그 이야기만으로는 이해를 못 하고 넘어가는 지점들이 있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철학하는 아이’ 시리즈는 번역자 혹은 관계된 연구자 분들이 그런 부분들을 조금씩 쉽게 풀어주시는 형식의 글이 뒤에 붙어 있어 정말 좋았어요. 그런 맥락에서 저한테 의뢰가 왔을 때도 기꺼이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죠.
사실 그동안 프랑스 그림책이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가 되지는 않았죠. 상대적으로 미국이나 영국이나 일본 그림책에 비해서는 좀 덜 소개됐던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뭘까, 저도 고민을 많이 하고 저와 함께 그림책 관련 활동을 하시는 선생님들과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게 정답은 아니겠지만 프랑스 그림책들이 사실 조금 모호한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메시지도 뭔가 명징하지 못하고 기승전결의 구도라든가 결론 부분도 명확하지 않죠. 그래서 이 책이 뭘 말하고 싶은지가 한 번 읽었을 때는 안 들어오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그쪽 사회의 특징일 것 같기도 해요. 뭔가를 딱 규정하지 않고 열어두죠. 의미는 항상 변할 수 있다는 생각들이 그쪽 사회는 좀 많이 있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림책은 교육의 목적이 크다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교육용이라면 사실 우리 교과서처럼 메시지가 확실해야 하잖아요. ‘착하게 살아야 해’,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돼’ 같은 식으로요. 근데 프랑스어권의 그림책들을 보면 그래서 뭐라는 건지 잘 모르겠는 의미들이 좀 많이 있어서, 그 때문에 아마 시장성을 고려해 그동안 프랑스 그림책들을 출판사에서 적극적으로 소개를 안 하셨던 부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4, 5년 전부터 저도 그렇고 다른 번역자 선생님들께서도 그렇게 열려 있고 유연한 사고를 요하는 프랑스어권의 그림책들을 많이 소개해주고 있죠. 그래서 반갑기도 하고 저도 일종의 책임의식 같은 걸 느끼면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더: 자녀와는 어떻게 대화를 나누시는지요? 그림책을 매개로 자녀들과 대화를 시도해보신 적이 있다면 그 팁을 살짝 알려주세요.
박: 육아에 대한 철학까지는 아닌데, 최근에 와서는 엄마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좀 구체적으로 아이들에게 얘기해주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바빠”, “엄마 일 있어”, “학교 가야 해!” 이렇게 말할 텐데, 그런 것보다는 구체적으로 “엄마는 이런이런 일을 하고 있고, 이 부분이 조금 힘들어서 여기에 조금 더 시간을 많이 쏟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든가, 어떤 경우에는 “다른 전문가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얘기들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디테일하게 하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번에 어떤 책을 번역해 달라는 의뢰가 엄마한테 들어왔는데 어떨 것 같아?” 이렇게 의견을 물어보기도 합니다.
또 좀 더 실질적으로는 말맛 같은 것들이, 어른인 제가 막 일방적으로 어린이를 흉내 내서 번역하는 말투랑 실제 아이가 그걸 읽었을 때 자연스럽게 느끼는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서 일종의 모니터 요원으로 아이들을 쓰고 있기도 해요. 특히 저는 제목을 정할 때 아이들에게 많이 물어보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한국 독자들한테 어필할 수 있는 제목으로 원제를 많이 바꿔서 출판하기도 하죠. 특히 프랑스 그림책은 제목도 굉장히 모호해서 제목과 표지만 보면 도저히 이게 무슨 얘기인가 모르겠는 책들이 많아요. 그래서 출판사에서 제목을 많이 바꾸려고 하시는데, 어린이 독자들이 그 제목을 보고 과연 얼마나 매력을 느낄까 하는 것들을 첫 독자로서 저희 아이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기도 합니다.
더: 일상적으로 아이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시나요. 프랑스와 한국, 두 나라의 교육 문화의 차이점이 있을까요?
박: 제가 아이를 둘 다 프랑스에서 낳았어요. 큰아이는 네 살까지 거기 있다가 왔는데, 프랑스는 만 3세가 되면 학생이라고 하거든요. 학교 시스템 자체가 만 3세부터 시작해요.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큰아이가 만 3세가 돼서 어린이 학교, 유아학교라고 부르는 과정에 들어갔을 때 교장선생님이 저희 초보 부모들을 다 모아놓고 굉장히 진지하게 말씀하셨어요.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자녀는 아이가 아닙니다. 이 아이들은 이제 학생입니다.” 사실은 이제 막 기저귀 떼고 왔고, 아직까지도 입에 공갈젖꼭지를 물고 있는 아기들인데요. 이 아기들이 첫 1년 동안 젖꼭지를 빼서 자기 사물함에 넣고 학교생활을 시작하는데요, 그 아기들을 성인이랑 똑같은 존재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그때 깊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니 생각은 어때?”라고 물어보는 말 습관을 가지게 됐죠. 아이도 그런 식으로 교육을 계속 받다 보니까, 모든 문제에 자기도 발언할 권리가 있다는 걸 너무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된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큰아이는 프랑스 학교를 계속 다니고 있는데요, 제가 서울에 와서도 큰아이 친구들이 4살, 5살, 7살 될 때까지 함께 박물관에 가거나 미술사 수업을 하거나 하면 정신이 없더라고요. 아이들이 동시에 말을 하고 싶어해서요. ‘나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주는 게 아마 그쪽 양육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얘기들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창조적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더: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 《줄리의 그림자》 《비비안 마이어: 거울의 표면에서》 등 다양성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그림책과 그래픽 노블 위주로 번역 작업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육아에 있어서도 다양성이 필요한 이유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박: 사실은 저도 외국인으로서 10여 년을 프랑스에 있으면서 그동안 한국에서 살았던 세계가 굉장히 단조로운 세계 혹은 동일성의 세계였구나,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사실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았고 혹은 크게 다르면 안 됐던 환경에서 저도 대학을 졸업하고 갔기 때문에 문화적인 충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다른 존재들인데 그걸 굉장히 억누르는 사회에서 살았다는 걸 거기서 깨닫게 됐고요. 그러면서 저를 막 깨가는 과정에 있기도 했어요.
또 그들 사회에서 보면 저는 외국인이고 학생이고 엄마였죠. 그렇게 굉장히 이질적인 정체성을 가진 저를 지도교수님을 포함해 체류 관련 행정을 하시는 분들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대해주셨어요. 괜히 제가 먼저 ‘나는 엄마인데 논문을 쓸 수 있을까’라든가 ‘이제 논문을 쓰려면 체류 자격을 획득해야 되는데, 외국인 학생이라는 게 그들에겐 굉장히 짐이 되는 신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혼자 정말 많이 했어요. 그러고 숨을 한번 쉬면서 주변을 보니까 굉장히 많은 정체성을 한몸에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 사회였던 거예요.
요즘은 사실 우리 사회도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각자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억제하고 살아야 하는 부분이 커서 우리가 좀 불행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거든요. 학생들하고도 정말 많이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아이들에게도 막 대놓고 “세상은 다양하단다”, 이렇게 얘기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최근 들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아이도 저랑은 너무 다른 존재인데 참 오랫동안 나와 비슷할 거라고 믿기도 하고, 내가 교육하는 거에 따라서 아이가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자랄 거라고 기대하면서 키우지 않았나. 그런데 그게 헛된 일이구나. 이런 것들을 느끼면서 그냥 아이랑 나도 다르고 우리 모두가 다 다르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아이한테도 많이 강조하려는 부분이 있어요. ‘네 안에 굉장히 많은 네가 있을 텐데, 그 두 개나 세 개의 네가 충돌할 때 굉장히 상처를 받거나 실망할 일들이 앞으로 많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들을 해요. 이렇게 직접적인 워딩은 아니지만 그림책을 통해서라든지 은연중에 많은 얘기를 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더: 뮤지엄도 미술관도 도서관도 큐레이션의 중요성이 새삼 커지는 시기입니다. 큐레이션을 하는 분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박: 큐레이션의 시대가 시작된 지도 한참 된 것 같은데요. 박물관, 미술관의 것이었던 큐레이션이 사실은 도서관을 비롯해서 카페라든지 심지어는 인스타그램 같은 SNS 공간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죠. 결국은 큐레이션을 가지고 나를 드러내고 생각을 보여주는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큐레이션을 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 중의 하나가, 하나하나를 모아놓은 걸 큐레이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5월이 가정의 달이니까 가족과 관련된 큐레이션을 한다고 하면, 제목이나 소재가 가족인 것들을 하나씩 모아놓고 “큐레이션을 했다”,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는 큐레이션도 역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와 하나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에 대한 게 전달이 잘 되면 정말 좋은 큐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디스플레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하나하나가 모여서 새로운 관계와 맥락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정말 성공일 것 같은데, 말은 쉽겠죠. (웃음)
더: 마지막 질문입니다. 삶과 예술의 관계랄까, 예술이 삶에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 지금 대학에서 적을 두고 있는 학과가 문화콘텐츠학과인데요. 정책적으로나 사업적으로도 관심을 많이 보여주시는 분야이긴 한데, 진짜 본질적으로 이게 돈이 돼서 또는 산업적으로 가치가 있어서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상업적인 논리 말고, 그게 왜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다 알겠는데, “왜 중요해”라고 하면 답을 못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고, 저도 어떤 명쾌한 답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한 가지 정도만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글퍼지는 이유 중 하나가, 물론 슬픈 일은 정말 많지만 무감각해지기가 쉽잖아요. 일상을 살다 보면 다 똑같이 느껴지고 맛집에 가도 그 맛이 그 맛이고 그럴 텐데요, 예술에 대한 경험과 감각을 계속 가지고 있고 예술을 많이 경험하다 보면 감각적인 것들을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똑같은 걸 보더라도 다르게 느낄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이 들고요.
질문 중에 ‘다양성’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타자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다른 시대나 다른 상황에 한번 가보기도 하고요. 그냥 윤리적으로 “다양성을 포용해야 해”라고 얘기하는 대신, 정말 좋은 영화를 한 편 본다든지 그림을 따라 그려본다든지 시를 한번 필사해본다든지 해서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시공간을 벗어나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저도 30년 만에 다시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느끼게 됩니다.
박재연_연구자
아주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울에서는 불어불문학을, 파리에서는 미술사학과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사랑하는 두 아이들과 뒹굴뒹굴하며 그림책을 즐기는 엄마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는 《돌봄과 작업》(공저), 《미술, 엔진을 달다》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 《줄리의 그림자》 《비비안 마이어: 거울의 표면에서》 《모두의 미술사》 《파리의 작은 인어》 《샤샤의 춤》, 작은 철학자를 위한 그림책 컬렉션 ‘필로니모’ 시리즈 등이 있다. 서양 미술의 역사와 미술, 그림책을 매개로 독자들을 만나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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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서 취향이 담긴 링크스티치 공책 만들기 세상에는 정말 많은 공책이 있지만, 내가 만든 공책은 단 하나뿐이다. 그런 점에서 북바인딩은 나만의 세계를 펼쳐 나가는 여정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크기와 디자인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고, 바인딩에 사용할 실에 나의 취향을 담을 수 있고, 요즘 읽는 책의 커버를 공책의 표지로 부활시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글로벌 시대에 마을 공동체가 왜 필요하며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도서관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하는 걸까? 인간을 기계화, 도구화 하는 근대의 시간을 넘어 돌봄과 상생의 세계로 가는 방법을 확인해보자! [강연 개요]* 조한혜정 교수 : 마을, 학교, 가족, 그리고 도서관 이야기1. 이어서 말하다- 권위주의적, 탈권력적 공간을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