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읽고 있으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남과 비교해서 낫다는 말이 아니라, 그 책을 읽지 않았을 때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잊고 지냈던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다든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나는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인가 생각해본다든가, 지구를 보전하기 위해 지금의 불편을 감수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책에 언급된 각종 지식의 편린을 통해 지적인 자극을 받고, 그리하여 한참 부족한 나 자신을 깨달으면서 무려(!) 겸허함까지 갖추게 될 수도 있다.
서경식 선생의 책이 늘 그러했다. 서경식 선생의 글을 처음으로 접한 것이 언제 어떤 책에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분의 글에서 “아……” 하는 낮은 탄성을 몇 번이고 내뱉었던 것은 확실하다. 글이라는 것이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글쓴이의 생각을 헤아리기 전에 먼저 쉽게 감동받는 것은 표현력과 문장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경식이라는 작가가 어떤 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글을 먼저 접하게 된 나는 그의 뛰어난 문장력과 표현에 감탄하고 음악과 미술에 대한 사랑과 이해에 이끌렸다. 그 후 선생의 글을 찾아 읽는 팬이 되었는데, 읽을 때마다 번번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물론 그 다짐대로만 살았으면 지금쯤 훌륭한 인물이 되었겠지만, 그렇지 못함은 내 됨됨이의 한계이니 할 말이 없다.
지난해 12월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많은 이의 안타까움을 샀던 서경식 선생은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났다. 그는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와 대한민국 성공회대학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뛰어난 저서들로 일본과 한국에서 다수의 상을 받았다. 그의 아이덴티티와 경력을 다른 이와 차별화시키는 뚜렷한 사건은 1971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두 형(서승, 서준식)이 군사독재 정권의 간첩 조작 사건에 휘말려 구속된 일이다. 그는 이후 오랜 세월 두 형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를 위해 문필, 강연 등 다방면의 활동을 했다.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나 일생을 소수자, 경계인으로 살면서 경험한 일들과 사색이 서경식 선생 저서의 주요 주제이며, 그 저서들에서 서경식 선생은 당연히 부당한 제도와 권력에 대한 비판, 그런 부당함에 희생되는 힘없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피력한다.
선생의 여러 저서 중에서 특히 내 시선을 끄는 것은 음악과 미술에 대한 글들인데, 30대에 쓴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비롯해서 2011년에 쓴 《나의 서양음악 순례》, 그 외에 《나의 조선 미술 순례》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나의 일본 미술 순례》 등이다. 앞뒤로 꽉 막혀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두렵고 갑갑한 현실에서 예술은 선생에게 숨 쉴 틈을 주는 안식처, ‘케렌시아(Querencia)’였던 것 같다. 그분은 어느 도시를 가든 방문 목적과 별개로 미술관을 찾고 공연장을 찾았다. 무겁고 어지러운 현실을 벗어나 생각과 마음이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예술은 언제나 영감을 주기 마련이니 작품에 투영된 선생의 생각들이 삶에 용기 또는 여유를 주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서경식 선생의 예술 감상문, 인문 기행서에는 선생답게 작품의 아름다움에 대한 탄복에 그치지 않고 그 예술품에서 찾아내거나 유추해낸 사회적 부조리와 모순, 제대로 쓰이지 못한 권력에 희생된 인간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과 배경에 대한 설명을 읽다 보면 선생 특유의 발상과 설득력 있는 표현 때문에 종종 내 눈에 물기가 서리곤 한다. 그러면 잠시 읽기를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떠올려본다. 이것이 바로 서경식 선생의 글이 가진 힘이자 선생의 글을 읽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백 퍼센트 실현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저서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이 올 초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두 형을 포함한 양심수에 대한 지원 활동을 목적으로 갔던 1980년대 미국과 강연 초청으로 갔던 2016년의 미국 방문 경험, 그리고 이 글을 쓰던 2020년의 사유가 담겨 있다. 뉴욕과 워싱턴 D. C., 디트로이트의 미술관과 공연장에서 만난 예술품에 대한 감상이 빠지지 않고 있으며, 지난 날 미국 방문 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 아메리카라는 나라의 명암(선악)에 대한 생각도 서술되어 있다.
서경식 선생은 ‘아메리카(미국)’라는 나라에 대해, 하나의 단일한 느낌을 가질 수 없는 까다로운 상대임을 토로한다. 대표적 자본주의 국가로서, 본성을 천박하게 드러내는 인종차별주의자를 대통령으로 뽑는 나라인 동시에 약자를 보듬고 불의한 권력에 맞서 항거하고 분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나라이기도 한 것이다. 하긴 애초에 다양한 민족, 인종으로 구성된 나라인 만큼 상반된 모습뿐 아니라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메리카이긴 하겠다.
이 책에서 가장 비중 있게 언급된 인물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2003)다. 팔레스타인 태생으로 미국에 이주한 그는 서경식 선생과 같은 디아스포라 지식인이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저서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문화비평가다. 선생은 2016년 미국 방문 때 컬럼비아대학에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 기념실’을 찾아갈 정도로 사이드에 대한 공감과 존경심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줄리어드 음대 진학을 준비할 정도로 피아노를 잘 쳤으며 음악에도 학식이 깊었던 에드워드 사이드를 만나서 음악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시각으로 음악을 바라보고 해석한 사이드의 비평문에 깊은 공감과 동질감을 느꼈기에 누구보다도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이드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으니, 기념실에서나마 그의 흔적을 통해 정신적 대화를 나누어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에드워드 사이드는 유대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 )과 함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젊은 연주자로 구성된 서동시집오케스트라를 결성한 것으로도 유명한데(4월 ‘음악이 있는 서가’ 참조), 그가 음악에 관해 진심을 담아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82년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 1932~1982, 캐나다)의 죽음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시작해 20여 년에 걸쳐 쓴 사이드의 음악 평론은 《경계의 음악(Music at the Limits)》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를 음악 평론의 분야로까지 이끈 글렌 굴드는 어떤 음악가인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경계의 음악》 첫 번째 평론 ‘음악 그 자체: 글렌 굴드의 대위법적 비전’에서 ‘그는 다른 그 어떤 피아니스트와도 닮은 소리를 절대로 내지 않았고, 내가 판단하기로는 아직 그 누구도 그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굴드의 연주는 그의 경력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자수성가형이었고, 심지어 기존의 시대에 조금도 빚진 바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외부 운명에 구속되지도 않은 채로 스스로 발아하고 성장한 것이었다’라고 썼다(《경계의 음악》, 에드워드 사이드, 이석호 옮김, 봄날의 책). 이 글은 고개를 끄덕이게 할 정도로 글렌 굴드의 연주 스타일을 잘 말해준다.
음악가들 중에는 특이한 이력이나 기벽(奇癖), 기행(奇行)으로 유명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글렌 굴드야말로 괴짜나 기인(奇人)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다. 결벽증에다 극도로 의심이 많은 탓에 자신의 건강, 안전과 관련해 과도한 행동을 수없이 했다. 여러 종류의 약을 복용하는 것은 물론, 병원을 세균 온상지로 인식해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동안에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 발작을 일으켰을 때도 병원 가기를 미루다 치료 시기를 놓친 것이라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다.
주변인과의 관계도 당연히 원만치 않았다.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 인터뷰 후 녹음 마이크에 머리가 살짝 닫자 이로 인해 뇌일혈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유난을 떠는가 하면, 스타인웨이 피아노사의 전속 조율사가 굴드의 피아노를 손봐주고 친밀함의 표시로 어깨를 툭 치자 화들짝 놀란 것은 물론 팔과 등, 손가락에 통증과 마비를 호소하며 스타인웨이 피아노사를 고소했다. 이런 낮은 사회성으로 공연에서 대중을 만나는 것조차 기피하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30대에 공연을 중단하고 녹음 작업과 교육, 방송, 저술 등에만 전념했다. 그의 기벽, 기행과 관련한 여러 일화들이 있지만, 1955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 BWV 988) 녹음을 위해 뉴욕의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를 묘사한 글을 보면, 그가 어느 정도로 특이한 사람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6월의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CBS의 녹음 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출처: 나무위키)
어찌 보면 꼴불견이라 할 이런 행동들이 용납되고 그저 웃어넘겨질 수 있는 것은 그의 연주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열 손가락이 각자 자신의 역할이 뭔지 알아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가 싶다가도 서로 긴밀하게 주고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어떤 속도(특히 매우 빠른 패시지)에서도 놓치거나 뭉개는 음 하나 없이 명료한 테크닉, 스타카토는 아니면서 탁탁 끊어 치는 생동감 넘치는 주법,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인 피아노 음색을 낼 지 연구와 실험을 통해 만들어낸 그만의 가볍고 투명한 터치감들이 매력 넘치는 연주를 완성해냈다. 이런 연주는 특히 대위법적인 바흐의 곡에서 진가를 발휘하는데, 20세기 미국의 작곡가 애런 코플런드(Aaron Copland, 1900~1990)는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를 들을 때 마치 바흐가 자신의 곡을 연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바흐의 건반 음악을 굴드의 연주로 듣고 나면 좀체 다른 연주자의 연주에 귀를 내어주지 않게 된다. 로절린 투렉(Rosalyn Tureck)이나 타티아나 니콜라예바(Tatiana Nikolayeva), 안드라스 쉬프(András Schiff) 정도라면 몰라도.
아무튼 굴드의 바흐 연주는 독주곡, 협주곡 등 여러 명연이 있지만, 에드워드 사이드나 서경식 선생에게 첫째가는 음반은 굴드 사망 1년 전인 1981년에 한 그의 마지막 녹음,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인 듯하다. 서 선생은 1980년대 어느 날, 고베의 찻집에서 이 곡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아서 바로 다음날 음반을 구입했다고 한다. 굴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1955년에 처음으로 녹음하고 1981년에 두 번째 녹음을 했다. 완벽주의자인 굴드로서는 1955년 녹음에 보완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터이고, 또한 26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곡 해석의 변화와 녹음 기술의 발전이 있었으니 더 완벽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남기고 싶었으리라. 그런 만큼 1981년 녹음은 불후의 명연으로 남았다.
글렌 굴드의 개성 넘치는 연주에 그의 기행이 기여한 바가 있는지, 그 타당성을 찾을 수 없지만, 그의 뛰어난 연주에 기행이 더해져 하나의 전설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음악 감상]
바흐J. S. Bach / 골드베르크 변주곡The Goldberg Variations BWV 988
글렌 굴드의 1981년 녹음 영상을 보면, 그의 독특한 연주를 이해하게 되는 동시에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늘 가지고 다니는 본인의 낮은 의자에 앉기에 피아노 건반은 자연히 일반적인 연주자들에 비해 높게 위치하고, 그 상태에서 마치 웅크린 듯 보이는 자세로 치는 특이한 모습. 그에 더해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연주에 맞춰 노래한다. 그래서 녹음 기사는 그의 노랫소리가 녹음에 들어가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간간이 나지막이 들리는 그 소리는 어쩔 수가 없으며, 이것이 그의 연주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피아노: 글렌 굴드Glenn Gould)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1995년 늦가을, 나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었다. 계절의 영향도 있겠지만 당시 바르샤바의 색채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오랜 동안 소련의 영향 하에서 서구와 교류가 없던 공산권 국가의 수도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스산함, 경직된 분위기를 강하게 느꼈다. 아니, 처음 디뎌보는 (구)공산권 땅이었기에 내가 경직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머릿수건을 쓴 할
얄팍하고 가벼워서 손에 들면 기분마저 좋아지는 책 《콘트라바스》는 내게는 늘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분은 1985년 라디오 음악 PD로 사회의 첫발을 뗀 나의 멘토였으며 롤 모델인 동시에 스승이었고 선배였다. 38년의 방송국 생활에서 그분처럼 강직하고 성실했으며 열심인 분을 보지 못했다. 1990년대 어느 날, 클래식FM(당시는 1FM) 부장이셨던
새롭거나 놀랄 것도 없이 문학과 음악, 음악과 미술, 음악과 무용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이 영향을 주고받아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킨 예는 허다하다. 그런 가운데서 특별하고 흥미롭게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독일)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소나타(Kreutzer Sona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