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올해 SBS에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33년 만에 폐관하는 ‘학전’에 관한 최초의 다큐멘터리 작업에 함께했는데, 시민들의 반응이 이렇게 좋을 거라고 예상했나?
A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학전’이라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뮤지컬이나 콘서트를 봤던 4, 50대 관객들은 이번 다큐멘터리를 좋아해줄지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김민기’를 1970년대 최고의 슈퍼스타로 추억하는 6, 70대 시청자들이 공감해주시길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연령층에서 화제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Q 그렇게 바쁜 가운데 지난해 에세이 《월급쟁이 이피디의 사생활》을 출간했다. 이후 도서관 등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는데, 프로그램 연출과 책 집필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A 둘 다 여전히 너무 어려운 일이다. 애초에 나는 뭔가를 창작하는 데 재능을 가진 사람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뭘 하든 항상 ‘방망이 깎는 노인’의 심정으로 스스로를 갈아 넣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굳이 비교를 하자면, 책은 고작 두 권을 출간했지만 방송국은 무려 13년째 다니고 있다. 제작에 참여한 크고 작은 프로그램을 다 합하면 수십 편은 될 거다. 그런 면에서 ‘작가’보다는 ‘피디’의 생활이 조금 더 익숙한 것 같다. 하지만 익숙함과는 별개로, ‘피디’로서 느끼는 부담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항상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여전히 숨 막힐 정도로 버겁다. 그래서 매번 회사 생활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피디라는 직업을 밥벌이로 선택한 것에 대해 자책을 하곤 한다.
덧붙이자면 작년에 출간한 《월급쟁이 이피디의 사생활》은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이 아니다. 평소 방송국에 취직해 ‘월급쟁이’로 살게 된 내 삶을 후회하며 신세 한탄용으로 몰래 써둔 습작들이었다. 근데 그게 우연한 기회에 책으로 묶여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책을 내기로 결정한 이후 출간의 압박마저 느끼며 또 자책을 하긴 했지만.
Q 대학생 때 210일 동안 전 세계의 NGO 단체를 돌며 여행을 했다.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있던 베트남 지역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고, 멕시코에서 돈벌이로 도난당하는 바다거북의 알을 지켰는데, 그때의 경험이 지금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에 영향을 미치고 있나.
A 그 시절의 경험은 지금도 나를 버티게 해주는 매우 큰 원동력이다. 사실 20대의 나는 조금 삐딱한 젊은이였다. 친구들이 모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간다기에, 그저 튀고 싶다는 욕심에 무작정 찾아간 곳이 아프리카 케냐의 어느 마사이족 마을이었다. 그걸 시작으로 전 세계의 현지 NGO를 찾아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만 여섯 번을 갔고, 때론 슬럼가를 전전하기도 했다. 2개월 간 배를 타고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을 항해한 적도 있었다. 한때는 라틴아메리카에서 5개월을 지내며, 바다거북이와 야생 곰을 구하기 위해 곳곳을 누비기도 했다. 심지어 겁도 없이 밤마다 총소리가 들리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노벨평화상 후보를 찾으러 가기도 했다.
어딜 가든 한국인은 항상 나 혼자였다. 하지만 어느 현장에서건 동료가 생기고, 친구를 만났다.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놀며, 울고 웃었다. 나중에 세어보니 배낭 메고 돌아다닌 기간만 총 2년이 넘었다. 그때의 경험들이 매번 낯선 사람을 찾아가 설득하고 인터뷰해야 하는 피디라는 직업에 큰 뒷받침이 된다고 생각한다.
Q 책 선택의 기준과 책을 읽는 방식이 궁금하다.
A 책을 고르기 전 저자의 이름과 약력, 목차를 꼼꼼히 읽어보게 된다. 중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며 생긴 습관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한 기회로 학교 도서관의 사서가 되었다. 사서에겐 신간 책들을 학교 시스템에 빠르게 등록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때 필요한 정보가 저자의 이름, 약력, 그리고 목차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들만 보면 책의 내용이 모두 유추가 되곤 했다.
그때 생긴 또 다른 습관이 있다면,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다는 것이다. 사서는 학교 수업이 끝나고 바로 집에 갈 수 없었다. 적어도 4시, 늦으면 6시까지 도서관을 지키다 자물쇠로 문단속까지 끝낸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때 혼자 도서관에 남아 온갖 책을 다 읽었는데, 욕심이 많아 여러 권의 책을 잔뜩 쌓아두고 읽곤 했다. 그 책들을 3, 40분에 한 권씩 번갈아가며 읽었다. 그 시절 습관이 여전해서 지금도 아침에 읽는 책, 지하철에서 읽는 책, 그리고 자기 전 읽는 책이 모두 다르다.
Q SBS의 대표 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마니아층이 많다. 언젠가 다른 방송에 출연해서 “취재를 위해 전과자도 만난다”는 말을 듣고 흥미로웠다. 피디는 결국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탐구하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동원 피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감히 짐작해본다.
A 전혀 모른다. 나는 생김새와 달리 사람들에게 정말 잘 속는다. 뒤통수를 맞는 일도 허다하다. 최근에도 크게 맞았다. 내가 진정성 있게 상대를 대하면 상대도 나를 진실하게 대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만큼 남들보다 훨씬 더 뒤통수를 많이 맞고 산다. 그때마다 스스로 묻곤 한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전혀 답은 모르겠다. 누가 꼭 알려주면 좋겠다.
Q 미래의 직업으로 방송사 피디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이 직업의 애환을 가장 잘 알려줄 수 있는 책이나 영화를 소개해준다면? 물론 《월급쟁이 이피디의 사생활》도 포함해서.
A 이 직업의 리얼한 모습이 담긴 책이나 영화를 잘 모르겠다. 아마 이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굳이 내 직업과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일단 다른 걸 찾기 전에 먼저 《월급쟁이 이피디의 사생활》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이 직업의 고통을 담은 책이다. 방송사 피디를 꿈꾼다면 이런 일쯤은 각오(?)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싶다.
뭐 아니면 다른 피디들이 최근에 출간한 《카메라로 지구를 구하는 방법》이란 책도 있다. 아! 입사 동기가 쓴 《오학준의 주변》이란 책도 있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피디들이 쓴 책이 많은 것 같다.
Q 노래를 좋아하나. 김민기 선생님의 노래 중 어떤 노래를 좋아하고, 가사를 전부 외울 수 있는 노래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A 노래를 좋아한다. 한때 ‘뮤지컬 배우’의 꿈을 품어본 적도 있다. 물론 내겐 춤과 노래의 재능이 없다는 걸 금세 깨닫고 포기하긴 했지만.
당연히 김민기 선생님의 노래를 좋아한다. <아침이슬> <상록수>처럼 가사를 외우는 곡도 꽤 있다. <가을편지> <친구> 같은 노래 역시 자주 듣는다. 하지만 올해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는 <봉우리>다. 러닝타임 6분이 넘는 이 곡은 특이하게 내레이션이 많다. 가사 자체가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내용이다. 그래서 월급쟁이 생활을 때려치우고 싶은 퇴근길마다 열심히 들었다. 이번 다큐를 제작하며 만난 배우 황정민 씨도 힘들고 지칠 때마다 꼭 <봉우리>를 틀어놓고 소주를 마시며 마음을 달랜다는 얘길 했다. 여튼 요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곡이다.
Q 지금 우리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어디서든 자신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용기. 그래서 그 어려운 걸 지금껏 해내온 ‘김민기’라는 인물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A 세상에 없는 방송 프로그램도 더 만들고 싶고, 책도 몇 권 써보고 싶다. 머지않은 미래에 드라마 작가에도 도전할 거다. 여전히 하고 싶은 게 참 많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오래도록 열정적으로 살 수 있는 행운이 내게 있길 바랄 뿐이다.
이동원이 추천하는 책 다섯 권
《나의 도시계획 이야기》 1~5권(손정목)
6.25 전쟁 이후 서울이라는 도시가 재건되는 과정에 참여한 전 서울시청 공무원이 당시의 기록을 남긴 책. 도시가 개발되는 과정을 통해, 한국 현대사가 새롭게 읽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시절의 리얼하고 세세한 기록에 반해 밤늦도록 읽고 또 읽었다. 단, 오래전 책이라 구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읽는 기쁨》(편성준)
내가 참 좋아하는 편성준 작가의 신간. 다른 수십 권의 책을 추천해주는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딱딱한 책 얘기를 위트 있게 풀어가는 작가의 글맛이 워낙 매력적이다. 그의 필력은 정말 질투가 날 만큼 부럽다.
《여운형 평전》(이기형)
스무 살 때 읽었던 책 중 지금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책. 여운형의 정치적 성향이나 사상에 대해서 동의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전후 혼란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그의 지혜가 참 인상적이다. 특히 60세가 넘은 나이에 마라톤에 도전하고 20대 젊은이들과 친구처럼 어울리고자 노력했던 여운형의 모습은, 요즘 시대에 꼭 필요한 메시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나의 아저씨》(박해영)
방송국 피디로 일하며 가장 많은 본 드라마가 <나의 아저씨>다. 나와 직업은 다르지만, 각각의 캐릭터가 표현하는 삶의 고민들이 꼭 나의 이야기 같아서. 그래서 이 드라마의 대본집이 내겐 참 소중하고 귀하다.
《교도소에 들어가는 중입니다》(김도영)
현직 교도관이 직업적 애환을 담은 책. ‘교도소’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수용된 범죄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고민에 큰 공감이 간다. 그래서 두 번 읽었다. 작가의 다른 책들도 모두 읽었다. 약간의 어둡고 우울한 감정이 깔려 있지만, 그 속에서 삶의 깊은 고민들을 만나게 된다.
이동원_방송국 피디
방송국 프로듀서. 한 번 사는 인생, 서울에서 폼 나게 살아보는 게 유일한 꿈이었던 지방사람. 오로지 서울 상경을 목표로 학창시절을 보냈고, 수능 재수에 추가합격의 행운까지 얻으면서 가까스로 ‘서울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늘 공부보다 딴짓에 관심이 많았다. 방학마다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녔고, 스물다섯 살에는 모은 돈을 탈탈 털어 혼자 세계일주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해 한국에 돌아와 《조금 다른 지구마을 여행》이라는 책을 출간, 여행작가로 데뷔했다. 스물일곱 살에 대학교 3학년으로 복학했지만, 석 달 뒤 덜컥 SBS 공채시험에 합격해 회사와 학교를 동시에 다니게 되었다. SBS 교양국에서 13년차 월급쟁이로 아직도 일하고 있으며,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그것이 알고 싶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등을 연출했다. 그리고 작년엔 두 번째 책 《월급쟁이 이피디의 사생활》을 출간했다.
4월 [도서관과 건축] 특집 인터뷰 코너에서는 ‘친환경 건축’을 주제로 건축가 김정임을 만난다. 김정임이 지은 공원 속 ‘책쉼터’는 원래 터를 지키고 있던 수형이 예쁜 감나무를 중심으로 설계되었고, 어두웠던 공원 한 켠을 은은하게 밝히는 오두막집처럼 존재한다(넘은들공원 책쉼터). 주민들의 일상과 주변의 환경을 껴안으며 구불구불 어우러지는 ‘공원 같고 거실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5월호에서는 최규승 시인을 소개한다. Q 시인 최규승을 소개한다면?A 4년 정도의 습작기를 거쳐 2000년부터 시를 발표해왔고, 또 몇 권의 시집을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4월호에서는 최평순 환경·생태 전문 PD를 소개한다. Q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하고 있던 대학생 때 24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텀블러 라이프〉를 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