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 · 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
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신구도서관재단 이창경 이사가 조병화문학관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7월호에 싣는다.
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편운 조병화 선생의 시 한두 편 가슴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의자>를 비롯해 <사랑이 가기 전에> <공존의 이유> <밤 이야기> <남남> 등 많은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랑과 그리움, 쓸쓸함과 고독은 우리의 마음이었다. 문득 가슴에 남아 있는 선생의 시를 떠올릴 때면 그 사람, 같이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난다. 선생의 시는 이미 우리의 시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큰 울림과 지속성을 가졌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잊어버리자고/바닷가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하루 이틀 사흘’. 선생의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에 수록되어 있는 <추억> 일절이다. 이 시와 처음 만났을 때는 사춘기 중학생이었다. 사랑에 눈떠갈 무렵, 쓸쓸한 겨울 바다, 잊으려 할수록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첫사랑의 얼굴, 계절이 바뀌어도 여전히 말 못 하고 머뭇거리는 안타까운 그리움, 그 쓸쓸한 겨울 바다를 걷고 있는 시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수없이 외우고 일기장에 적었다. 최영섭 선생이 곡을 붙인 가곡 <추억>도 듣고 또 들었다. 첫사랑의 아픔을 견디며 사춘기를 보낼 수 있게 한 것은 선생의 시였다.
편운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0년이 넘었다. 여전히 시선집, 수필선집이 세련된 디자인으로 간행되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많은 시낭송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고 조회수도 많다. 매체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도 선생의 시는 독자와 함께하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선생의 시가 지니고 있는 공감력 때문일 것이다. 선생의 시는 결코 난해하거나 어렵지 않다. 생활이 시였고, 철학이 시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시는 쉬워야 해요. 쉬워야 제대로 다른 이들에게 전달이 돼요”라 한 적이 있다. 쉽다고 해서 깊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인간 정신의 가장 근원적인 아름다운 철학이며 그 말인 것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라 우리들 생명 속에 본래부터 가지고 나온 가장 장식 없는 말인 것이다(《마음이 외로울 때》, 1989). 만남, 이별, 고독, 사랑, 죽음, 어머니 등 보편적 정서가 선생의 시에서는 쉬운 말로 다가와 화석이 되어 빛난다.
살은 죽으면 썩는다
조병화문학관을 찾은 날은 비가 내렸다. 이번에도 창운 선생과 동행하는 문학관 답사길, 45번 국도를 달리는 동안 비는 계속 내렸다. 서울을 벗어나 안성 양성면 난실리 문학관에 도착할 때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문화관광해설사 조성식 선생이 빗속에 기다리고 있었다.
난실리에 조성된 편운동산은 선생의 삶과 문학이 압축된 꿈의 동산이다. 건물, 전시품, 나무와 풀, 선생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시의 동산에는 조병화문학관을 비롯해 편운재, 청와헌 등의 단독 건물과,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선생이 잠들어 계신 묘소가 있다.
가장 먼저 세운 건물은 편운재다. 1962년 어머니를 이곳 장재봉 기슭에 모시고 이듬해 지은 묘막이다. 유럽풍 지붕, 흰 회벽, 소박한 건물에 담쟁이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건물 옆에는 모자상이 서 있고 출입문 벽에는 선생의 삶이기도 했던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어머니 말씀을 새겼다. 조진형 관장은 편운재의 내력을 들려준다.
“선친께서 산막을 지으실 때, 가까이 있는 이동저수지에 나가셨나 봐. 멀리 용인 쪽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 한 조각 흘러가고 있었지. 어머니 보내드리고 많이 허전하셨을 거야. 인생은 저런 거구나. 뜬구름 같은 거구나. 그래서 조각구름이 머무는 집, 편운재라 하신 거지.”
선생에게 어머니는 종교였다. 세상 물결에 지치고 쓸쓸할 때,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세상은 잠깐이다. 그리 쓸쓸할 거 없다. 사는 거다. 지치지 말고 사는 거다. 착하게 사는 거다. 부지런히 사는 거다.”(<어머니는 나의 종교처럼>, 1987) 선생께서 어린 시절 난실리를 떠나 83세 다시 이곳에 묻힐 때까지 어머니는 선생의 거룩한 종교였고 시였다.
2016년 조진형 관장은 편운재를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하고 ‘편운재 예술혼展’을 개최했다. 어머니와 조병화, 예술 혼을 펼친 방, 문인들의 사랑방, 편운재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테마로 건물 내부를 구성했다. 예술 혼을 펼친 방이 서재다. 선생의 글 <나의 서재>에서 보여준 바로 그 서재다. 선생님이 거기 앉아 계신 듯하다. 따뜻한 정감으로 다가온다.
‘이 방엔 벽난로가 있고 양주가 있고, 골통 담배가 있고, 그럭저럭 쓸 만한 파이프가 있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에 쓰던 창이 있고, 승마하던 시절의 묵은 장화가 있고, 고사(高師) 시절의 럭비부 부기(部旗)가 구멍 난 채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군데군데 친구들의 그림들이 옛정 그대로 걸려 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님의 사진, 국제회의에 참가한 기록의 사진들이 띄엄띄엄 서가에 놓여져 있다.’(<나의 서재>, 1984)
이제 어머니 심부름 마치고
편운재 바로 아래쪽에 청와헌이 있다. 편운재가 노후하고 협소해 새로 지은 것으로 선생께서 독서하고 글을 쓰던 곳이다. 건물 앞 작은 공원에 <꿈의 귀향> 시비가 세워져 있다. 생전에 써둔 자찬묘지명인 셈이다.
건물 입구 벽면에는 일중 김충현 선생이 쓴 ‘청와헌(靑蛙軒)’ 현판이 있어 품격을 더한다. 현관을 들어서면 벽난로가 있고, 들판으로 향한 큰 창이 나 있다. 여기서 선생은 깊은 밤 개구리 울음 들으며 시를 썼을 것이다. ‘아, 네가 그렇게 흐느껴 울어대면 난들 어떻게 하라고’. 벽면에 걸린 서산대사의 입적송을 쓴 서예 작품이 유독 눈길을 끈다.
1층 주전시실 입구에는 선생의 휘호 ‘계명일성동일월(鷄鳴一聲動日月)’이 걸려 있다. 1993년 편운회관을 준공하고 감회와 큰 포부를 나타낸 것이다. 전시실 내부로 들어서면 평생 집필하신 저서, 유품들이 유리 케이스에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요란함도 화려함도 없다. 그냥 그대로 소박하다. 어찌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일 수 있으랴. 선생께서는 1949년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시작으로 2002년엔 52번째 시집 《남은 세월의 이삭》을, 작고하신 해인 2003년엔 수필집 《편운재에서의 편지》를 출간했다. 2005년에 유고 시집으로 간행된 《넘을 수 없는 세월》을 포함해 창작 시집만 53권이다. 수필집, 선시집, 번역시집, 시화집까지 포함하면 160권의 저서다. 개인의 창작물로는 엄청난 양이다.
전시실 한 벽면에는 월계관을 쓴 선생의 흉상이 이 많은 저서들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다. 선생은 1981년 7월 세계시인대회에서 계관시인으로 추대된 바 있다. 1986년에 제작된 이 흉상은 조각가 백문기의 작품이다. 흉상 받침돌에는 <나의 자화상>이 새겨져 있다. ‘버릴 거 버리고 왔습니다. 버려서는 안 될 거까지 버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 선생은 이 문학관에서 지금 보는 바와 같다.
이 많은 시집에 사연인들 없을까. 1955년에 《사랑이 가기 전에》가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의 시대였다. 이 막막한 현실 앞에 《사랑이 가기 전에》는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사랑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선생의 회고다. ‘나로서는 슬픈 작별의 인사였다. 그런데 그 시집이 그렇게 많이 팔리다니. 숨 가쁘게 인지에 도장을 눌렀다.’(《나의 생애 나의 사상》, 1991)
당시 여고생은 거의 한 권씩 갖고 있었고 택시 기사도 갖고 다녔다고 한다. 책은 많이 팔려 나갔지만 선생은 인세를 하나도 받지 않았다. 한때 사랑했던 여성과의 작별 인사로 쓴 시라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59년 독일에서 국제 P.E.N 대회가 열렸다. 선생은 꼭 가고 싶었다. 이를 안 정음사 최영해 사장은 그동안 쌓인 인세를 한꺼번에 내주었다. 그것으로 펜대회 참여는 물론, 두 달 유럽 여행을 하고도 남았다고 한다. 그해 11월에는 유럽 아시아 기행시화집을 출간했다.
현재 문학관에서는 ‘조병화의 시간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주제로 두 번째 사진전을 개최하고 있다. ‘한국문단 반세기’란 부제를 달았다.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35년에 걸쳐 선생과 함께 걸어온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람도, 책도, 시도 인연에 따라 흘러간다는 생각을 한다.
함께 지켜가야 할 정신의 유산
조병화문학관 조진형 관장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선생의 시 정신 확산에 힘을 쏟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조병화시축제가 문학관에서 개최된다. 그 기간 중에는 편운문학상 시상, 전시회, 강연회, 시낭송회, 백일장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올해 21회를 진행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편운문학상 시상이다. 많은 문학상이 제정, 운영되고 있지만 이 상의 의미는 크다. 선생은 자신의 고희가 되는 1990년 상을 제정하고 이듬해 제1회 시상식을 가졌다. 금년 34회째 이어지고 있다. 선생은 <시는 영혼의 화석>이란 시를 썼다.
‘지금 인생을 마무리 지으려는 나는
그 많은 은혜를 다 합쳐 보답도 하고
다시 가진 거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이 상을 마련했습니다.
“시는 영혼의 화석”이라는 황금의 메달을 달아서’
후학들을 격려하는 큰 뜻이 있다. 수상자 선정도 ‘사람’을 중시했다. ‘우선 인간적으로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시인다운 인간, 문인다운 인간, 그러한 인간으로 이어져가길 바라고 있는 겁니다.’(<시는 영혼의 화석>,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1996)
그동안 문학관은 여러 종의 관련 도서를 간행했다. 2005년 간행된 《편운 조병화의 시생애》는 창작 시집 53권 각각을 발행할 무렵의 사진 자료, 대표 시, 서문과 함께 편집해 통시적 흐름과 당시의 분위기를 알게 하고 있다. 2012년에 간행한 《시로 쓰는 자서전》은 생애의 흐름에 따라 관련 시를 선정하고 여기에 맞는 그림과 사진을 수록했다. 이 두 종의 책은 시인으로 살아온 선생의 생애를 시로 들려주는 책이다. 생활이 곧 시라고 생각하고 시를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8년에 간행한 《조병화의 시간 속에 만난 얼굴들》은 활동사진을 해설과 함께 엮는 사진집이다. 문단 반세기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이름의 두 번째 책이 2024년에 간행된다. 전국에 있는 선생의 시비를 소개하는 《영원 속에 살다》는 두 권째 발행했고 시낭송과 해설용으로 만든 《조병화의 대표시를 말한다》도 3권 간행했다.
경제 논리가 우선인 시대에 가치를 지켜가기는 어려운 일이다. 조진형·김용정 부부는 묵묵히 이 편운동산을 지켜왔다. 편운동산과 같이 한 시인의 위대한 생애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은 없다. 우리가 함께 지켜가야 할 이 시대의 정신유산이다.
사랑은 끄집어 올려주는 것
선생에게 ‘어머니의 심부름’은 무엇이었을까? 또 고독은 무엇이었을까? 편운동산을 일궈가는 것이 어머니의 심부름은 아니었을까. ‘시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갖고 싶은 거야. 시인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독한 거야.’(<조병화 시인과의 대담>, 《문예운동》, 2001). 이것이 선생이 평생 씨름해온 고독의 의미는 아닐까.
꿈과 사랑의 시인 선생은 작고하기 몇 해 전 <고요한 참회>를 발표했다. 주어진 삶의 끝머리에서 ‘삶을 알고, 인생을 알고,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하는 탄식을 덧붙였다. 선생의 영혼은 여기 살아 있다. 시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고 계실 것이다. 부지런히 시를 쓰고 계실 것이다.
편운동산을 내려온다. 비는 그치지 않고 더욱 거세게 내린다. 창운 선생과 나는 잠시 빗속의 편운동산 바라본다. “사랑은 서로를 끄집어 올려주는 거야.” 선생의 음성이 들린다. 그렇다. 선생이 만년에 알게 되었다고 하는 사랑은 서로 자극을 주고 끄집어 올려주는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문학관 주변 맛집, 로스 가든
문학관을 나와 찾은 곳은 미리내성지로에 위치한 ‘로스 가든’이다. 선생은 평소 토속음식을 좋아했다. <나의 식성>이란 글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소개한 적이 있다. ‘내가 그래도 좋아서 골라 먹는 것들이 제법 열 가지 정도는 되는 것 같다. 토장국, 시래깃국, 물고기찌개, 얼절이, 미역무침, 산나물무침…… 이런 것들을 비벼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시간 속에 지은 집》, 1990)
이런 선생의 식성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로스 가든을 찾는다. 미산저수지 가에 자리잡은 로스 가든(800여 평)은 레스토랑과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앞에 저수지 풍경이 펼쳐지고 건너편 갈미산(332m)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로스 가든의 장점이다. 레스토랑은 길가에 있고, 저수지 쪽으로 내려가면 카페가 있다. 내려가는 길 오른편에 로스팅실이 있어 간혹 카페 건물인가? 생각하게 되지만 소나무 숲길을 따라 아래로 더 내려가야 카페 건물이 나온다. 추천 메뉴로는 겨울 시즌에 ‘대추생강차’를, 여름 시즌에 ‘딸기라떼’가 좋을 듯하다.
레스토랑(Garden Kitchen)의 메인 음식은 로제, 크림, 까르보나라, 알리오올리오, 봉골레 등의 수식어가 붙는 이탈리아 대표 음식 파스타다. 다양한 식재료와 소스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우리는 이 중에서 ‘지중해식 해산물 스튜 파스타’와 피자를 주문했다.
역시 건강과 힐링의 음식이자 에너지 충전용 한 끼로는 손색이 없다. 유럽의 지중해식 식단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 식단으로 지중해 연안에서 나는 풍부한 자연식품을 위주로 한다. 파스타, 과일, 야채에 올리브유, 견과류, 생선 등을 곁들인다. 여기에 레드 와인 한 잔이면 더 좋다.
이 레스토랑의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 소스에 찍어 먹은 식전 빵과 화덕에서 갓 구워낸 고르곤 졸라 피자는 넉넉한 힐링의 맛을 더해준다. 이곳이 왜 ‘로스 가든’일까? Roh’s garden, 일명 배우 노주현 카페다. 노주현이 공기 좋고 자연이 수려한 이곳에 몇 년 전 조성한 것이다. 토장국, 시래깃국 좋아하셨던 편운 선생께서도 살아 계시다면 한 번쯤은 들르실 것 같다. 물론 여기서 시도 한 편 쓰실 것 같다.
로스 가든
· 주소: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299-1
· 전화: 031 674 3369
이창경_신구도서관재단 이사, 수필가
신구도서관재단 이사, 한국출판학회 고문, 수필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에서 수학했다. 1991년 《추강 남효온 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04년 《문예운동》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고전 편찬 일을 도왔고 1989년부터 신구대학교 미디어콘텐츠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출판 교육, 출판 역사에 관심을 갖고 이 분야 연구에 힘써왔다. (사)출판문화학회 회장, (사)한국출판학회 회장, (사)아시아민족조형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쓴 책으로 《함께 걷는 책의 숲》과 《세계의 식물원 산책 1》(공저)이 있다.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신구도서관재단 이창경 이사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10월호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지난여름 한탄강
이효석 선생을 만나러 봉평으로 떠나는 아침. 가을비가 촉촉이 내렸다. 몇 해 전 겨울, 이효석문학관을 찾은 적이 있다. 그날은 발목이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렸다. 메밀꽃이 없는 봉평, 허생원과 동이가 건너던 냇물이 없는 봉평의 겨울은 한없이 적막했다. 그 겨울바람 속에서 메밀꽃이 필 때쯤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선생은 소금을 뿌린 듯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야트막한 야산을 뒤로하고 자리 잡은 한가로운 농촌 마을이다. 마을 길로 들어서면 초입에 2층 붉은 흙벽돌집이 눈에 들어온다. 고향집에 들어선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지는 이곳이 농민문학기념관이다. 바로 옆에 노천상리마을회관이 있어 더욱 정겹다. 작지만 큰 역할을 하는 농민문학기념관은 국내 유일의 농민문학 전문 문학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