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늦가을, 나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었다. 계절의 영향도 있겠지만 당시 바르샤바의 색채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오랜 동안 소련의 영향 하에서 서구와 교류가 없던 공산권 국가의 수도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스산함, 경직된 분위기를 강하게 느꼈다. 아니, 처음 디뎌보는 (구)공산권 땅이었기에 내가 경직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머릿수건을 쓴 할머니들이 시내 길가에 좌판을 벌이고 앉아 깜장 고무줄 같은 이런저런 생활용품을 판매했는데, 그 광경이 딱 우리나라 1960,70년대 같았다.
내게 바르샤바는 어느 번화한 도시에 떠밀려온, 어딘지 어색하고 어리둥절한 시골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 ‘프리데리카 쇼피나(Fryderyka Chopina, 프레데릭 쇼팽)가 있었다. 나는 그해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제13회 쇼팽 국제 피아노 경연대회(일명 쇼팽 콩쿠르)를 취재하러 간 것이었다. KBS 최초의 쇼팽 콩쿠르 취재였다.
쇼팽 콩쿠르는 1927년 1회를 시작으로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피아노 콩쿠르다. 또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제때 대회가 열리지 못한 상황을 빼고는 5년의 주기를 어긴 일이 없으며, 일등감이 아니라면 우승자를 내지 않기도 하는, 매우 높은 수준의 연주력을 요구하는 콩쿠르다. 5년에 한 번 열리는지라 일생에 한 번 참가하기도 쉽지 않아 젊은 피아니스트들에겐 꿈의 대회라 할 수 있다. 20세기와 21세기의 가장 빼어난 피아니스트들 거의가 이 콩쿠르 입상자 출신이다. 귀에 익은 이름만 꼽아도 올 3월에 세상을 떠난 마우리치오 폴리니를 비롯해,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마르타 아르헤리치, 크리스티안 치메르만, 스타니슬라브 부닌이 있고, 2015년 K-클래식이 정점을 찍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인 최초로 조성진이 일등 입상을 한 것이다.
쇼팽 콩쿠르의 특징은 대회 연주곡이 모두 쇼팽 작품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콩쿠르에서는 보통 여러 작곡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연주하는데, 쇼팽 콩쿠르는 오로지 쇼팽 작품으로만 실력을 겨룬다. 1995년 취재 당시 심사위원장인 ‘얀 에키에르(Jan Ekier)’(이 피아니스트 역시 3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다)에게 이 점을 질문했다. 쇼팽 작품만으로 실력을 다 가늠할 수 있는가?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당연하다고 했다. 쇼팽의 피아노 작품에는 피아니스트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들어 있으니, 쇼팽의 작품만으로 연주자의 실력을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피아노에 있어서만큼은 쇼팽이 가장 뛰어난 작곡가이자 연주자, 피아노 그 자체라는 이야기로 이해했다.
2024년, 한국에서 가장 핫한 클래식 연주가를 꼽으라면 누가 거론될까? 거의 이견 없이 임윤찬일 것이다. 지난해 그의 연주회 티켓을 예매하려고 알람을 설정해놓고 창구가 열리자마자 예매를 시도했으나, 대기가 1,600명이 넘는 상황을 경험한 이후로 나는 아예 그의 공연 관람을 포기하고 있다. 차라리 그의 해외 공연 티켓 구하기가 더 수월해 보인다. 실제로 해외로 그의 연주를 보러 가는 열성 팬도 꽤 있다. 임윤찬은 테크닉의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곡에 대한 해석과 연주가 매우 독특해 많은 클래식 애호가를 열광케 하는데, 그가 올해 세계적인 음반 레이블 데카(Decca)를 통해 내놓은 데뷔 앨범이 쇼팽의 24개의 연습곡(Études, op.10 & op.25)이다.
쇼팽 콩쿠르 출신이라면 별날 것도 없겠지만, 그는 2022년 미국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으로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연주가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의 데뷔 음반에는 쇼팽보다는 다른 작곡가의 곡이 수록되리라 예상했는데, 쇼팽이라니! 과연 피아니스트들에게 쇼팽이란 뭔가 특별함이 있는 모양이다. 임윤찬은 녹음 후 인터뷰에서 그가 존경하는 선대 피아니스트들이 쇼팽의 연습곡을 연주했고, 언젠가 그들처럼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기에 이 곡을 골랐다고 했다. 그리고 연습곡에 대한 선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 스타일, 그리고 각각의 곡에 자신이 상상한 것을 어떻게 표현했는가를 밝혔다.(음반 해설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 전 쇼팽 콩쿠르의 추억을 더듬다가 올해 나온 임윤찬의 쇼팽 연습곡 음반을 듣노라니 떠오르는 책 한 권이 있다. 지난 세기 프랑스 문단의 새 바람이자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앙드레 지드(André Gide, 1869~1951)의 《쇼팽 노트(Notes sur Chopin)》다. 《좁은 문》 《전원 교향곡》 등 그의 소설은 귀에 익지만, 《쇼팽 노트》라니? 소설인가 싶어 책을 펼치면, 글쎄…… 쉽사리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꽤나 전문적인 비평서다. 이 책은 앙드레 지드가 1890년부터 구상하고 집필한 글을 1931년 12월 음악잡지 《르뷔 뮈지칼(Revue Musicale)》 쇼팽 특집호에 게재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리고 그 후 약간의 수정과 새로운 자료들을 보충해 ‘헌정의 글, 1장 쇼팽 노트, 2장 앙드레 지드의 일기, 3장 쇼팽 노트에 관한 단문들, 해설_쇼팽, 바로크적 낭만주의자?’로 구성했다.
이 책에서 가장 놀란 것은, 지드를 그저 소설가로 알고 있던 내가 얼마나 편협한 지식을 갖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음악학자 못지않게 이론에 해박했고, 아마추어라고 해도 당시 활동하던 젊은 피아니스트 아니크 모리스에게 쇼팽 연주에 대해 레슨을 할 정도의 실력도 갖고 있었다. 또한 음악 전문지에 글을 게재하는 평론가였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쇼팽에 대한 지나친 칭송과 지나친 비하를 다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쇼팽 예찬론자인 지드의 글을 읽고 넉 달 후 다분히 감정적인 표현으로 다른 잡지에 반대 의견을 낸 앙드레 쉬아레스(André Suarès, 1868~1948, 프랑스의 시인, 문필가)의 글도 실려 있기 때문이다. 두 비평가의 글이 얼마나 신랄하고 노골적으로 상대를 가차 없이 깎아내리는지, 20세기 프랑스 문단, 예술 비평계의 풍조가 궁금해질 정도다(시대적 특징인지, 문화적 특성인지, 이 부분을 제대로 알려면 공부가 더 필요하다). 쉬아레스 외에도 서로의 비평에 대한 답글, 반박 글들이 몇 편 더 실려 있다.
지드는 요즘 말로 쇼팽 ‘덕후’다. 그는 쇼팽 음악이 ‘음악 중에 가장 순수한 음악’이라고 강조하면서, 동시대에 활동했던 시인 보들레르와 발레리에게서 쇼팽을 끌어낸다. 본인이 인정하고 좋아하는 예술가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낸 것이다. ‘쇼팽과 보들레르는 둘 다 완벽하려 마음을 썼고, 둘 다 수사법, 과장된 수사, 웅변적 전개를 싫어했다.’ ‘쇼팽 이전의 음악가들(바흐를 제외하고)은 시인처럼 하나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일단 출발해 놓고 뒤이어 그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찾는 시인처럼. 이와 정반대로 단어에서, 구절에서 시작하는 발레리의 방식처럼 쇼팽은 완벽한 예술가로서 음표에서 출발한다(쇼팽이 즉흥적으로 작곡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쇼팽이 발레리보다 한 수 위인 것이, 그는 즉시 이 매우 단순한 자료인 음표에 매우 인간적인 감정을 침투시켜 그것을 웅장함으로까지 확장한다.’
지드는 쇼팽 작품 분석에서 그만의 독자적인 방식을 보여주는데, 연주에 있어서도 호불호의 기준이 확고하다. 그는 기교파 피아니스트들이 쇼팽의 음악을 망친다고 여긴다. ‘쇼팽은 제안하고, 가정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고, 유혹하고 설득하는 음악’이기에 자기 과시적인 뛰어난 기교로 빠르게 연주하면 그 가치와 매력, 본질을 잃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당대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아주 까다로웠다. 한 예로, 임윤찬이 영향을 받았다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하나인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 1877~1962, 프랑스)의 경우다. 그는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사람이지만, 지드는 그의 쇼팽 <전주곡> 연주에 ‘관능 부재’라는 평을 내린다.
이렇듯 글 곳곳에서 자기 확신에 찬 어조로 날카롭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지드의 글을 읽노라면 내 음악 감상의 행태가 너무 느슨하고 누구에게나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음악 감상은 누구에게나 주관적이라는 게 내 입장인 만큼 지드를 본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연주자는 이런 면으로, 저 연주자는 저런 면으로 해석하는 덕분에 음악은 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지며 시간과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확장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무시하거나 공격하기보다는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오늘 우리 사회에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드는 이 책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쇼팽 곡이 어떤 곡인지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일반적인 예상을 빗나가서 흥미롭다. 그는 쇼팽의 가장 유명한 녹턴, 발라드, 환상곡, 폴로네즈 같은 곡들은 자신의 취향도 아니라면서, 쇼팽 음악의 최고봉으로 <바르카롤Barcarolle(뱃노래)>을 뽑았다. 이 작품은 쇼팽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846년, 연인 조르주 상드와 결별하기 전에 약속했던 이탈리아 여행을 생각하며 작곡한 곡이다. 곤돌라의 노 젓는 모습을 리듬감 있게 표현한 곡으로, 서정적인 동시에 힘이 느껴진다. 그는 이 곡이 ‘비범한 기쁨, 일종의 빛나는, 우아하고 든든한 서정성에 푹 젖어 있다’고 말한다.
[음악 감상]
쇼팽 F. Chopin <뱃노래Barcarolle in F sharp, Op. 60>
(피아노: 크리스티안 치메르만Krystian Zimerman)
‘그는 내가 아는 어느 음악가와도 닮은 점이 없었다.’
이것은 쇼팽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가 쇼팽을 두고 한 말이다.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쇼팽 음악의 독창성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나는 그것이 그가 평생 그리워했던 고국 폴란드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국의 민속 춤곡인 폴로네즈와 마주르카 작품을 70곡 가까이 쓴 것도 그의 마음이 늘 폴란드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폴란드에서 났으나 인생의 반을 프랑스에서 살다 세상을 떠난 쇼팽. 그는 죽어서도 육신은 프랑스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심장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는 쇼팽 살아생전 몸은 프랑스에 있었으나 정신은 폴란드에 있었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주변 사람을 모두 황홀에 빠트렸던 그의 음악은 당시 쇼팽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피아니스트도 그 맛을 표현해낼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폴란드 피아니스트가 아니고서는 쇼팽 곡을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고 말하는 폴란드인의 자부심은 바로 쇼팽 음악이 폴란드 정서에 기반한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프랑스 작가인 지드는 이런 의견에 어떻게 반응할까? 그는 ‘쇼팽 작품 전체에서 폴란드적 영감과 분출을 인정한다 해도 그의 곡에는 프랑스적 재기, 프랑스적 문화가 끊임없이 나타난다’고 주장한 만큼 프랑스 지분을 더 강조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드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귀족의 살롱에서 활약했던 쇼팽의 작품에 프랑스적인 요소가 있음은 당연하니까. 그러나 이보다 더 궁금한 것은, 쇼팽 연주에 매우 까다로운 기준을 가진 지드가 우리의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의 쇼팽 연주를 듣는다면 과연 어떤 비평을 내놓을지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영원히 들을 수 없다는 것이 한편 다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쇼팽F. Chopin <연습곡 A-플랫 장조. Etude in A-flat, Op.25-1>
(피아노: 임윤찬)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기억 속 첫 번째 책은 무엇인가.A 정확한 전집 타이틀이 기억나진 않지만, 초등학생 시절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학생백과》와 《소년소녀 세계
10년도 더 된 일인 것 같다. TV의 건강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데, 한 외국 여성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암을 최초로 발견하고 경고한 것은 바로 반려견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다. 반려견이 주인의 몸에서 특이한 냄새를 맡고 계속 경고성 행동을 해서 병원에 가게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암세포에서 발생하는
얄팍하고 가벼워서 손에 들면 기분마저 좋아지는 책 《콘트라바스》는 내게는 늘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분은 1985년 라디오 음악 PD로 사회의 첫발을 뗀 나의 멘토였으며 롤 모델인 동시에 스승이었고 선배였다. 38년의 방송국 생활에서 그분처럼 강직하고 성실했으며 열심인 분을 보지 못했다. 1990년대 어느 날, 클래식FM(당시는 1FM) 부장이셨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