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를 떠올리자면 내게는 먼저 혼돈 그 자체다. 주요 인물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와 연관된 다른 인물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의 관계를 헤아리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다음 진도가 나가지 않기 일쑤다. 그래서 궁금하거나 필요한 부분만 단편적으로 찾아 읽다 보니 늘 맥락의 부재로 헤매게 된다. 매번 제대로 기억 못 하고 헷갈리면서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곤 한다. 이렇게 복잡한데도 불구하고 동서고금 남녀노소 불문,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 신화에 빠져드는 이유가 뭘까?
그리스 신화는 수천 년 전 인간도 아닌 신들의 이야기지만, 놀랍게도 시대와 상관없이 지금의 나, 오늘의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신화 속에는 초자연적인 힘, 인간 상식을 뛰어넘는 영웅담도 있지만, 그보다는 모든 유형의 인간상, 사회상이 다 들어 있다는 점이 시대를 초월해 인간의 흥미를 끈다. 세월이 지나도 절대 변치 않는 인간의 갖가지 본성들, 사랑과 분노, 증오, 욕망과 질투, 실패와 좌절, 비겁함과 속임수, 호기심, 의심, 포상과 징계, 복수, 오만, 성장, 차별, 연민, 자애…… 열거하자니 끝이 없다.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친구, 이웃을 만나며 과거와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 신화는 예술과 문학의 마르지 않는 소재다.
서양 예술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두 가지, 그리스 신화와 성경을 모른 채 넘어갈 수 없다. 배경 스토리를 모른 채 예술 작품을 본다면 피상적·감성적 감상에 그칠 뿐, 예술 감상을 통해 얻게 되는 사고의 깊이와 지적인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우선 제목부터 신화의 인물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신화를 모르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의 절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시사하듯, 제목이 뜻하는 바가 뭔지도 모르면서 작품을 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제였을까? 그 음악을 처음 들은 것이. 때와 상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감미롭고 우아한 음악이 있는가. 너무 감미로운 나머지 몸이 오글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오글거림은 발레를 위한 것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오르페우스를 소재로 한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에 나오는 발레 음악 〈정령들의 춤〉이다.
그리스 신화 속 최초의 예술가 오르페우스는 늘 손에 음악의 신 아폴론으로부터 받은 황금 리라를 들고 있다.
오르페우스 (출처: 위키백과)
리라를 연주하며 부르는 그의 노래는 초목과 짐승을 감동시키고 괴물을 잠재울 정도로 뛰어났다. 이 최초의 뛰어난 음악가 오르페우스가 음악의 소재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게다가 오르페우스에겐 독사에 물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각국 언어에 따라 에우리디체, 유리디체, 외리디스 등등으로 불림)를 못 잊어 자신의 연주로 지하 세계의 신들과 왕 하데스마저 감동시키고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데리고 나온다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안타깝게도 뒤따라오는 에우리디케를 돌아봐선 안 된다는 하데스의 경고를 어기고 돌아보는 바람에 결국 아내를 지상으로 데려오지 못하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음악적 소재로 쓰기에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는 흔치 않다.
이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음악사에 남긴 첫 작곡가는 16, 17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다. 1607년 오페라 〈오르페오L’Orfeo〉를 발표했는데, 음악사에선 이 작품을 오페라의 효시로 본다. 이뿐 아니라 텔레만, 카치니, 하이든 같은 작곡가가 오르페우스를 소재로 작곡했고, 낭만파 작곡가 리스트는 ‘오르페우스Orpheus’라는 제목의 교향시를, 19세기 프랑스 작곡가 오펜바흐는 이야기를 비틀어 희화화한 오페레타 〈지옥의 오르페오(Orphée aux enfers)〉를 작곡했고, 20세기의 스트라빈스키는 발레 음악으로 만들었다. 21세기에도 이 스토리는 여전히 창작자들을 자극, 2019년 토니 어워드 작품상과 연출상 등 8개 부문을 휩쓴 브로드웨이 뮤지컬 〈하데스타운(Hadestown)〉으로 탄생했다. 또 〈카니발의 아침(오르페의 노래)〉이라는 불후의 명곡을 남긴 1959년 영화 〈흑인 오르페(Orfeu Negro)〉 역시 오르페우스 신화로부터 출발했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 이후 오르페우스 신화를 다룬 음악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작품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 오스트리아)가 작곡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다. 글루크는 대대로 귀족 소유의 숲을 관리하던 삼림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음악과 전혀 연관이 없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10대에 집을 떠나 프라하, 빈 등에서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익혔다. 그러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멜치 후작의 관현악단 단원이 됐고, 1741년에는 첫 오페라 〈아르타크세르크세스〉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첫발을 뗀다. 이후 밀라노·베네치아·크레모나·토리노 가극장으로부터 작곡을 의뢰받는 등 이탈리아에서 지휘자와 작곡가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글루크의 초상화, 조세프 뒤플레시 그림, 1775년 (출처: 위키백과)
큰 어려움 없이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쌓은 글루크가 이룬 뚜렷한 음악사적 업적은 ‘오페라 대개혁’이다. 당시 오페라는 대중의 인기를 얻은 성악가들이 노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한 아리아 중심의 바로크 오페라였다. 극의 짜임새와 음악적 긴장감은 왕왕 무시됐다. 글루크는 이런 오페라를 지양하고, 극의 흐름을 중시하고 음악의 단순함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려는 고전주의적 오페라로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아울러 오페라의 서곡은 단순히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어서는 안 되고, 관객에게 앞으로 펼쳐질 오페라의 내용을 예고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루크의 오페라 대개혁은 1761년 오페라에 대한 이해와 안목이 뛰어났던 극작가 라니에리 데 칼차비지(Ranieri de Calzabigi, 1712~1795)를 만났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페라 개혁은 원래 칼차비지의 개념이었으며, 글루크 이름을 오늘날까지 기억하게 만든 명작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도 칼차비지의 대본으로 탄생했다. 오페라 개혁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이 작품에서 글루크는 말의 뉘앙스를 중시하고, 음악이 언어와 조화를 이루도록 가수의 지나친 기교와 불필요한 음악적 장식을 없애고 자연스러운 톤으로 노래하게 했다. 동시에 단순한 작곡 기법으로 극의 효과를 올렸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1762년 빈에서 초연됐지만 이후 글루크가 파리에서 명성을 얻자 1774년에는 언어, 오케스트라 파트, 합창 등 부문별로 손을 봐서 프랑스어판을 만들었다. 빈에서는 오르페오 역을 ‘카스트라토(거세 남성 가수)’가 담당했는데, 파리에서는 카스트라토를 싫어하는 관객의 취향에 맞춰 ‘테너’로 바꾸고 발레곡을 추가한 것도 눈길을 끄는 변화였다. 이는 자신의 개혁 철학을 모든 곳에서 관철하려고 도시마다 관객의 입맛에 맞추고자 한 글루크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 나오는 발레곡 〈정령들의 춤〉은 파리 개정판의 2막 2장, 오르페오가 지옥의 신들을 설득해 사후세계의 낙원(Elysian Fields)에 도착했을 때 등장하는 음악이다. 지하세계에 떨어진 아내를 찾아오려는 오르페오의 절박한 심경과는 대조적으로 정령들은 극히 아름다운 멜로디에 맞춰 우아하게 춤을 추는 장면이다. 단순하면서도 감미로운 멜로디가 반복되면서 듣는 이의 감정을 파고든다.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 이념이 잘 반영된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춤곡의 소박하면서 서정적인 선율은 단번에 귀에 착 감기면서 뇌리에 남게 되는지라 ‘멜로디(Melody)’라는 제목으로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독주곡으로 편곡되어 자주 연주된다.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천재성이 있고 실력이 있다고 해서 다 개혁을 이끌 수는 없다. 시대를 잘 읽고 시대가 요청하는 바를 자신의 작업을 통해 집요하면서도 끈기 있게 실행시켜야 하고,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 치밀한 전략도 짜야 한다. 그 과정에 운도 따라줘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글루크가 시도한 오페라 개혁은 이 모든 것이 다 잘 맞아떨어졌다. 거기에 중요한 것 하나, 사람을 잘 만난 것도 빼놓을 수가 없다. 오페라 개혁의 오리지널리티는 글루크보다는 오히려 극작가 칼차비지에게 있었던 바,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의견에 마음을 열지 않았더라면 글루크는 오페라 개혁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개혁 같은 것은 상상으로도 못 할 일이지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말에 귀 기울이고 배울 점이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해본다.
[음악 감상]
글루크(C. W. Gluck) /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중 2막 〈정령들의 춤〉(6:19)
지휘: 네빌 마리너(Sir Neville Marriner) / The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 무용과 음악 감상
피나 바우쉬(Pina Bausch) 무용단의 〈정령들의 춤〉 (8:26)
2008년 파리오페라극장 Palais Garnie 공연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기억 속 첫 번째 책은 무엇인가.A 정확한 전집 타이틀이 기억나진 않지만, 초등학생 시절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학생백과》와 《소년소녀 세계
해마다 5월이 되면 클래식FM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기다렸다는 듯이 플레이리스트에 올리는 곡이 있다. 로베르트 슈만(R. Schumann)이 하이네(H. Heine)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의 첫 곡 ‘아름다운 오월에(Im wunderschönen Monat Mai)’다. 1840년에 작곡됐다. 그 해는 슈만과
우리나라의 겨울 중 가장 추운 달은 언제일까? 기상청 통계를 보니 예상대로 1월의 평균기온이 가장 낮다. 지금이 겨울의 한가운데, 가장 추울 때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 매서운 칼바람이 1월의 모습이다. 이즈음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 빠지지 않고 선곡되는 음악이 있다면, 바로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오스트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