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장송의 프리렌》을 설명하는 방법도 수십 가지는 될 텐데, 다른 무엇보다도 ‘선의의 기원’을 주제로 이 작품을 말하고 싶다.
《장송의 프리렌》은 천 년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 이상의 시간을 살아갈 마법사 ‘프리렌’이 함께 모험을 했던 용사 ‘힘멜’을 이해하고 싶어 떠나는 두 번째 모험담이다. 엘프인 자신의 수명에 비해 찰나를 사는 인간의 감각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기에, 프리렌은 줄곧 동료들을 무심하게 대했다. 그러나 힘멜의 장례식에서 그 무심함을 자책하게 되고 뒤늦게나마 그가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프리렌은 망자와 대화할 수 있다는 북쪽으로의 모험을 결심한다. 죽은 이를 만난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판타지 만화로서 아주 터무니없지는 않은 기대를 품고서.
프리렌은 인간의 감각에는 무딜지언정 배운 바를 잊지 않는 현명한 엘프다. 이제는 남은 동료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며 ‘하이터’의 임종을 지키고 ‘아이젠’과의 만남을 이어간다. 그리고 벗들의 뜻대로 그들의 제자들과 동료가 되어 새로운 모험을 떠난다. 자연스레 작품은 두 줄기의 시간으로 그려진다. 현재 시점의 모험을 그리는 동시에, 여정의 크고 작은 국면마다 힘멜 일행과의 지난 모험이 회고된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익숙한 풍경이 힘멜의 흔적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프리렌은 힘멜과 함께하던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의 다정한 선의를, 시차를 두고나마 더듬더듬 이해해나간다. 《장송의 프리렌》을 읽은 것은 한 기사1) 때문이었다. 기사는 대만의 일로, 지하철에서 흉기로 난동 피우는 이를 제압한 용감한 청년의 인터뷰를 담았다. 용기의 흔적으로 얼굴에 상처를 입은 그는 꽤 덤덤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용사 힘멜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했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가 보여준 선의는 만화 속 힘멜이 보여준 선의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말은 힘멜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곧잘 하는, 작품의 중추가 되는 대사다. 힘멜은 프리렌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했거나 은혜를 입은 모든 이들이 그리워하는 다정히 빛나는 영웅이다. 그의 존재감을 가장 잘 들려주는 것이 바로 이 대사다. 악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선의를 보여준 이에게 누군가 이유를 물을 때, 냉정하고 무심하던 이가 다정하고 섬세해진 계기를 설명할 때,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힘멜을 따라 그랬다고 답한다.
프리렌이 옛 동료 하이터의 제자인 ‘페른’을 새 동료로 삼는 과정은 《장송의 프리렌》이 보여주는 선의의 연쇄를 명료하면서도 울림 있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페른은 전쟁고아로 혼자가 된 처지를 비관해 어린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치려 하는데, 그때 그를 막아 세우며 하이터가 꺼낸 말도 힘멜에 관한 것이었다.
저와는 달리 늘 올곧고 성실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었지요. 제가 아니라 그가 살아남았다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을 거예요.
저는 그와 달라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그에게 배운 용기며 의지며 우정이며 소중한 추억마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당신 안에도 소중한 추억이 있다면, 죽는 건 아깝다고 생각해요. (《장송의 프리렌》 1권, 65-66쪽)
하이터가 내민 손길로, 페른은 산다. 살아 하이터의 가족이 되고 “올바른 일”(67쪽)을 했던 하이터가 자신을 구한 것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 페른의 성실함과 정의로움은 하이터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이터의 이야기를 들은 프리렌 또한 페른을 맡아달라는 하이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힘멜과 하이터, 페른을 떠올린 프리렌은 이렇게 말한다. “그럼 나도, 그렇게 하기로 할까.”(73쪽) 힘멜은 누구라도 사랑할 만한 멋진 영웅이자 다정한 인간이지만, 나는 힘멜 한 사람보다는 그에게서 출발한 선의가 어디까지 퍼져나가는지 헤아리는 일을 좋아한다. 힘멜에게서 힘멜의 동료들로, 그 동료와 제자들에게서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조연들까지. 주인공이 힘멜을 가장 오랜 시간 기억할 수 있는 프리렌이라는 사실은, 이 만화가 그 선의의 경로를 얼마나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는지 말해주는 듯하다. 무엇보다 이 만화에서 나를 가장 기쁘고 설레게 한 것은, 그 선의를 가능하게 한 것이 ‘우연’이라는 묘사다. 사실 어린 시절 힘멜은 길 잃은 숲속에서 프리렌을 만난 적이 있다. 겁에 질린 힘멜에게 위로 하나 건네지 않은 채 돌아갈 길만 알려준 프리렌을 냉정하다고 여길 찰나, 프리렌은 마법을 통해 꽃밭을 만들어 힘멜을 달랜다. 프리렌 본인은 기억조차 못 하는 이 사소한 일이, 힘멜로 하여금 프리렌을 동료로 선택하게 했고, 그 선택이 마왕을 무찌르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다. 어떤 우연까지 의미를 부여해도 될까. 어린 힘멜이 프리렌을 만난 것? 냉정한 프리렌이 마침 변덕인지 친절인지를 베풀어 꽃을 보여준 것? 그것이 프리렌의 스승이 가장 좋아하는 마법이었다는 것? 대개 의미 있는 우연이란 사후적으로 발견될 때가 많다. 그러니 프리렌이 우연히 만난 어린이를 위해 베푼 선의가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다는 것은 정말로 판타지에나 걸맞은 허황된 추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힘멜이 다시 프리렌을 찾은 데는 분명 힘멜의 의지가 개입되었다. 프리렌이 꽃피우는 마법을 가장 좋아하게 된 것도, 우연이라기보다는 스승과 힘멜을 향한 애정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많은 일들은 확실히 우연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타인을 살리는 선한 의지가 바로 그 우연을 타고 전해진다는 것만큼은 어렵지 않게 인정할 만한 사실이며,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일을 늘 기쁘게 생각한다. 우연은 세상을 구하기에 너무도 미약한 계기지만, 미약하기에 유약하고 서툰 이들도 꿈꾸고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대만의 지하철에는 힘멜을 기억하던 한 명의 청년뿐 아니라 용기를 낸 16명의 시민이 함께 있었다. ‘우연’히 동승했을 뿐인 17명의 시민들이 의지를 발휘해 지하철 한 칸만큼의 세상을 구했다. 그 영웅담이 있기까지 그들이 거친 다정한 선의의 여정은 무엇이었을지 상상하는 것이 《장송의 프리렌》이 되새겨준 즐거움이다.
1) JTBC News, ‘지하철 흉기 난동’ 제압한 ‘오타쿠’의 한 마디······ “그 만화 주인공이라도 그랬을 것”, ttps://youtu.be/a3-N-AbTF8E?si=yjwcahpnz4x0pHD5, 24.06.06.
최윤주_만화평론가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만난 인물들에게 현실의 인연만큼 선명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 재주를 살려 평론을 쓰게 됐다. 웹툰을 읽을 때 댓글을 꼭 함께 읽는 습관이 있고, 가끔 베스트 댓글이 되는 것이 작지 않은 즐거움이다. 어떤 연결감 속에서 읽는 일의 의미를 고민한다.
만화 《극락왕생》은 불교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만화다. 당산역 귀신 ‘박자언’이 1년 간 지난 생을 다시 살면서 극락왕생을 도모하는 이야기로, 삶과 죽음을 다뤘다. 친구의 장례식이 끝나고 줄곧 이 만화를 떠올린 것은, 그러니 진부할 정도로 필연적인 발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볼 때부터 눈물이 났던 에피소드가 마치 예약 메일이라도 되는 듯 시의
많고 많은 만화의 장르 중 가장 다정하고 보드라운 것을 고르라면 조금도 고민 않고 순정만화라 답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위로와 교훈을 순정만화로부터 빚져왔다. 올해 가장 많은 신세를 진 작품은 《스킵과 로퍼》다.주인공은 중학교의 동급생이 겨우 여덟 명밖에 되지 않는 시골에서 진학을 위해 상경한 ‘미츠미’이지만, 굳이 주인공을 짚으려니 어색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때때로 비현실적일 정도로 과장된 일, 혹은 너무나 천진난만한 일 앞에서 ‘만화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 나도 그렇다. 만화를 업으로 삼으며 다양한 작품을 여러 방식으로 접하는 만큼 내게는 만화가 훨씬 복잡한 의미를 가지는데도, 무심코 ‘만화 같다’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일흔 살 노인이 발레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 웹툰 나빌레라를 보면서도 ‘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