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고 많은 만화의 장르 중 가장 다정하고 보드라운 것을 고르라면 조금도 고민 않고 순정만화라 답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위로와 교훈을 순정만화로부터 빚져왔다. 올해 가장 많은 신세를 진 작품은 《스킵과 로퍼》다.
주인공은 중학교의 동급생이 겨우 여덟 명밖에 되지 않는 시골에서 진학을 위해 상경한 ‘미츠미’이지만, 굳이 주인공을 짚으려니 어색하게 느껴진다. 대가족이 나오는 단란한 시트콤처럼, 십수 명의 주·조연들이 비중과 매력을 공평히 나눠 갖는 만화이기 때문이다. 비중과 매력을 공평히 나눠 갖는다는 것은, 이들이 각기 다른 외모와 성격을 가졌으며 저마다의 강점과 약점, 사연과 상처를 가진 존재로 그려졌다는 뜻이다. 믿기 어려울 만큼 명랑하고 올곧은 미츠미는 장녀이자 고향의 수재로서 과도한 책임에 짓눌리기도 하고, 의욕이 앞서 실수를 저지를 때도 많다. 전교생이 주목하는 미인 ‘유즈키’와, 현실의 인간보다 소설이 편한 ‘쿠루메’는 서로 다른 이유로 친구 사귀는 일을 두려워한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인물도 셋이나 있다.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역 배우 일을 했지만 상처만 남아 과거를 덮어둔 ‘시마’. 뚱뚱하다 놀림당한 기억 탓에 강박적으로 자신을 가꾸는 ‘에가시라’. 오랜 고립과 방황 끝에 이제는 삼촌이 아닌 고모로 살아가는 ‘나오’. 이들 셋은 미츠미뿐만 아니라 다른 조연들과 비교해서도 유독 상처를 쉽게 넘어서지 못한다. 사연 자체가 유난히 굴곡진 면도 있겠지만 특별히 섬세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주변 눈치를 많이 보고, 마지못해 마음에 없는 표정을 짓고, 상처 입은 과거에 붙들려 주눅 든다.
그런데 이렇게나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의 고민이, 의외로 하나의 공통된 문장으로 요약된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아닌 삶’을 가정하고 만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성실하고 유능했다면, 평범하고 자유롭게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면, 모두가 쉽게 호감을 느끼는 외모였다면, 상처받은 유년 같은 건 없다는 듯 순수하게 앞만 보고 달려 나갈 수 있다면, 뭐가 됐든 지금보다 나아져 사랑받을 수 있다면, 당연하다는 듯 사랑 이야기를 하고 가족의 응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그러니까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스킵과 로퍼》 속의 그 많은 인물 모두가 크고 작게 서로를 질투한다. 그런데 상대를 좋아하기도 해서 결국 상대를 미워하는 자신을 미워하고 만다. 그 과정에서 행복을 단념하기도 하고 미래는커녕 현재를 마주하는 일도 두려워 움츠러든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순정만화들이 그렇듯, 《스킵과 로퍼》의 인물들도 결국은 괜찮아진다. 다만 어떻게 괜찮아질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게 난감하다. 그저 함께 학급 활동을 하고, 주말에 만나 어딘가를 놀러 가고,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며 속내를 나누고, 여름엔 바다를 가고, 파자마 파티를 하기도 하고, 나란히 같은 거리를 걸으며, 지극히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특별한 사건이 없는 덕분일까. 넉넉한 시간의 여백 속에서 각 인물은 상대와 자신을 충분히 응시한다. 응시를 통해 강점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던 약점을 발견한다. 거창하지 않은 규모로 싸우고 화해하며, 서로의 실수를 용납하거나 한계를 인정하기도 한다. 그런 시간을 거쳐 미세한 속도로 성장하고 회복해나간다. 그 일들 대부분은 버겁기보다 들뜨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걸 읽는 독자인 나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세상이 현실적이면서도 공평하게 굴러간다면 삶의 아주 많은 것들은 지난한 인내와 대가를 통해서만 결과를 내어준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은 선물처럼 뜻밖의 좋은 것들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나는 《스킵과 로퍼》가 보여준 회복과 성장이 바로 그런 것이라 느꼈다. 조금 힘을 내서 걸어야 할 뿐 아주 가파르지는 않은 오르막을 걷다가 차분히 마주친 절경처럼, 너무 큰 고통 없이도 가능한 회복과 성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파자마 파티와 평화로운 밤바다 앞에서 울던 자신의 과거를 용납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단지 다정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통과하는 것만으로 나까지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기분이 들었다.
이 만화를 보며 특히나 무심히 대할 수 없던 것은 생생히 묘사된 표정들이다. 《스킵과 로퍼》는 표정에 대한 해상도가 정말, 정말 높은 작품이다. 각 인물들의 결정적인 순간에 포착되는 표정이 너무도 정확해서 그들이 당장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단박에 이해시켜버린다. 이를테면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자신이 질투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시마의 울컥하는 표정. 앞을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어금니를 악물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유즈키를 향해 우정을 고백하는 쿠루메의 표정 같은 것들을. 당사자들에게는 숨기고 싶은 민망하고 미숙한 찰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끼는 친구의 중요하고 내밀한 표정을 본 것처럼 오래 그 앞에 머물렀다. 각자의 깊숙한 곳에서 길어 올려졌을, 가장 자기 자신에 가까울 표정들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최근 시마는 어딘지 조금 밝아졌다. 선명해졌다고 할까.”(5권, 26쪽) 10쪽에 한 번은 꼭 받아 적고 싶은 글귀가 등장하는 《스킵과 로퍼》에서 하필 이 문장이 가장 깊이 새겨진 건 이런 맥락에서였다. 행복을 단념했던 시마가, 새로운 학교생활이 즐겁다고 고백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로 할 즈음 미츠미가 한 말이다. 근심을 덜어낸 사람이 밝아졌다고 말하는 건 식상할 정도로 익숙한 표현이다. 하지만 ‘선명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새로웠고, 이 선명해졌다는 단어야말로 《스킵과 로퍼》를 관통하는 말처럼 들렸다.
만화를 보는 내내, 자기 자신이 아니길 원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실은 더 선명한 자신이 되고 싶었을 뿐이라는 생각에 동의가 됐다. 가감 없이 드러난 솔직한 표정들을 목격하는 동안, 내 안에서 그 표정의 주인 한 명 한 명이 정말로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숨길 수 없어 기어코 터져 나오는 표정들을 지을 때마다, 시마와 에가시라, 나오와 미츠미, 유즈와 쿠루메는 점점 더 선명한 자기 자신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응시하는 나 역시 조금 더 나 자신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보드라운 다정함 속에서 조금 더 선명해졌으면 좋겠다고, 몹시도 순정한 마음으로 전하고 싶었다.
최윤주_만화평론가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만난 인물들에게 현실의 인연만큼 선명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 재주를 살려 평론을 쓰게 됐다. 웹툰을 읽을 때 댓글을 꼭 함께 읽는 습관이 있고, 가끔 베스트 댓글이 되는 것이 작지 않은 즐거움이다. 어떤 연결감 속에서 읽는 일의 의미를 고민한다.
풍성한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장송의 프리렌》을 설명하는 방법도 수십 가지는 될 텐데, 다른 무엇보다도 ‘선의의 기원’을 주제로 이 작품을 말하고 싶다.《장송의 프리렌》은 천 년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 이상의 시간을 살아갈 마법사 ‘프리렌’이 함께 모험을 했던 용사 ‘힘멜’을 이해하고 싶어 떠나는 두 번째 모험담이다. 엘프인 자신의 수명에 비해 찰나를 사는
만화 《극락왕생》은 불교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만화다. 당산역 귀신 ‘박자언’이 1년 간 지난 생을 다시 살면서 극락왕생을 도모하는 이야기로, 삶과 죽음을 다뤘다. 친구의 장례식이 끝나고 줄곧 이 만화를 떠올린 것은, 그러니 진부할 정도로 필연적인 발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볼 때부터 눈물이 났던 에피소드가 마치 예약 메일이라도 되는 듯 시의
우리는 때때로 비현실적일 정도로 과장된 일, 혹은 너무나 천진난만한 일 앞에서 ‘만화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 나도 그렇다. 만화를 업으로 삼으며 다양한 작품을 여러 방식으로 접하는 만큼 내게는 만화가 훨씬 복잡한 의미를 가지는데도, 무심코 ‘만화 같다’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일흔 살 노인이 발레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 웹툰 나빌레라를 보면서도 ‘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