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극락왕생》은 불교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만화다. 당산역 귀신 ‘박자언’이 1년 간 지난 생을 다시 살면서 극락왕생을 도모하는 이야기로, 삶과 죽음을 다뤘다. 친구의 장례식이 끝나고 줄곧 이 만화를 떠올린 것은, 그러니 진부할 정도로 필연적인 발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볼 때부터 눈물이 났던 에피소드가 마치 예약 메일이라도 되는 듯 시의 적절하게 떠올라 내내 맴돌았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에피소드는 자언의 담임교사인 ‘서이정’의 이야기다. 그의 별명은 ‘싸이정’이다. 우중충한 표정으로 매일 까만 정장만 입는 이유가 사이비 종교를 믿기 때문이란 소문이 돌아서다. 학교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도는 시시콜콜하고도 폭력적인 소문들이 으레 그렇듯 진실은 소문과 달랐다. 이정에게 검은 옷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친구를 애도하기 위한 상복이었다. 증명 불가하고 헛되다고도 여겨질 마음을 붙들고 일상을 사는 것이 어쩌면 종교적일지도 모르겠으나, 사이비 종교 같은 말로 설명되기에 이정이 붙들린 기억의 시간은 너무도 외롭다. 매일매일 상복을 입은 채 ‘전하지 못하는 말을 가슴에 품고 아직도’ 친구가 ‘떠난 그날에 멈춰 살’아가는 시간. 이정을 떠올린 것은 사실 나 역시 영영 그런 시간을 살게 될까 봐 두렵고 막막했기 때문이다.
떠나간 친구 때문에 영영 한 시절에 멈춰선 이정은, 그런 자신을 걱정해 귀신이 된 ‘지애’와 마침내 학교 앞 폭우 속에서 재회한다. 빗속에서 지애를 알아본 이정은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무수한 원망의 말들을 떠올리다 마침내 한 가지 말만을 내뱉는다. “지애야. 아직도 비만 오면 네 생각을 해.” 그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지애를 위로하기 위해 건넨 말이었지만, 지애가 떠난 후 이정이 보냈던 시간을 설명하는 있는 그대로의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몇 해씩이나 빗줄기 속에서 지애의 헛것을 보길 반복하고 검은 상복 외에는 입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시간을 살던 이의 마음이란 얼마나 젖어들기 쉬운 것이었을까.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내내 비와 눈물로 고여 있었을 시간이 다시 흐르기까지 이정이 견뎠을 나날을 헤아려본다.
2년 전 이태원에서 일어났던 참사와 거의 비슷한 시기였던 탓일까.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엉거주춤하던 시간 동안 가장 많이 떠올렸던 또 하나는, 이태원역 앞의 추모 공간에서 마주친 편지 한 통이었다. 갑작스런 참사로 친구를 잃은 이름도 모를 시민이 썼던 ‘나 진짜 갈게. 사랑해. 보고 싶어’라는 말. 장례식에 다녀온 뒤 추모 현장까지 왔는데도 아직도 네가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문장들 끝에서 마지막으로 적혀 있던 말이었다. 그 ‘진짜 간다’는 말에 붙들려, 추워지는 늦가을의 거리에서 오래도록 서 있던 기억이 난다.
지애가 떠나고 멈춰진 시간을 살아야 했던 이정의 마음을 차마 전부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간다는 말 앞에 ‘진짜’라는 말을 적어두고 발길을 돌렸을 누군가의 마음 역시 함부로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친구의 장례를 치르기 전이나 마지못해 일상으로 돌아오는 중인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익숙한 말의 무게가 내 안에서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 말이 발이 아니라 가슴 부근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왜 전에는 몰랐을까. 바보 같은 깨달음 속에서 매일매일 놀라다 정신을 차리니 겨울이었다.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혼란스러운 환절기 동안 나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봄이었다. 비만 오면 네 생각을 한다던 이정처럼 나 역시 마지막으로 그 애를 응시할 수 있던 현관에서 발길을 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상으로 돌아가 밥도 먹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간다는 말 앞에 ‘진짜’라는 말을 붙일 용기도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올해를 보내고 새로 봄을 맞을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그 두려움은 주인공 자언의 마음과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극락왕생을 도모하는 자언의 1년짜리 새 삶은 사실 보살의 명령을 따른 것일 뿐 원한 것이 아니었다. 선물보다는 낭패에 가까운 갑작스러운 시간 속에서 한계에 내몰린 자언이 혼란과 두려움을 담아 묻는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아침은…… 아침이…… 아침이 계속 오는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언에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귀신이 보였다가 만져졌다가 기억도 명멸하게 된 이상한 상황에서 나이를 세는 일조차 쉽지 않다. 지난 생에서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곁에 있는데, 곁에 있던 이들은 만날 수 없고, ‘극락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데 가지 않으면 안 되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던 것이 전부 가짜같이 느껴진다. 매일 아침이 찾아오면 거울을 보며 자신의 정체를 더듬거려야만 스스로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자언이 한밤중 벤치에 앉아 허망하고 분에 차 내뱉었던 말들이, 나도 알고 있는 평범한 현실의 삶을 고백하는 말처럼 읽혔다. 뜻대로 되지 않는 만남과 이별이 도처에 널려 있고, 맞고 그름을 가늠할 수 없고, 반복해 길을 잃고, 잃었으나 멈출 수는 없고, 멈출 수 없으나 겁이 나고, 지쳐서 걸음 뗄 엄두가 나지 않는, 아직 오지 않은 아침과 봄이 두려운 매일매일의 막막한 현실. 그건 극락과 지옥을 오가지 않아도 알고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 막막한 고백을 엿보며 위로를 얻었다는 것이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 헤매는 이가 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진부하지만 절실한 위로였다. 만화 속 인물일지라도 내게 위로의 무게는 같다. 허구의 인물을 실제처럼 읽어내는 일에 능하고, 애초 그 말들을 남겼을 사람이 현실의 작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직 빗속에 멈춰 있다는 이정의 이야기에도, 발길을 떼보겠다 말하던 이태원의 편지에도, 공평히 마음을 기댔다.
이 연재 에세이의 제목이 ‘마음 빚을 진 만화들’인 이유를 이제야 밝힌다. 매번 이런 식으로 너무나 많은 사연과 말들에 빚을 져왔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지난하고 혼란한 시간들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했던 2024년은 12월 3일의 갑작스런 소식에 또 한 번 알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봄이 더 두렵다고 한들 겨울이 춥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영하로 떨어진 거리 위에서 버티는 일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그날 국회 앞에도 내가 마음 빚을 졌던 이야기의 주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만나보지 못한 채로도 아는 사이일 수 있다. 누군가와는 같은 문장을 읽은 사이일지도 모른다. 멋대로 졌던 빚을 갚을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서툴고 더디게 써왔던 내 문장들도 다른 누군가에게 다정한 빚이 되길 바란다. 당연히 갚지 않아도 되니까, 몹시도 추운 겨울 밤 거리에서 당신이 기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최윤주_만화평론가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만난 인물들에게 현실의 인연만큼 선명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 재주를 살려 평론을 쓰게 됐다. 웹툰을 읽을 때 댓글을 꼭 함께 읽는 습관이 있고, 가끔 베스트 댓글이 되는 것이 작지 않은 즐거움이다. 어떤 연결감 속에서 읽는 일의 의미를 고민한다.
많고 많은 만화의 장르 중 가장 다정하고 보드라운 것을 고르라면 조금도 고민 않고 순정만화라 답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위로와 교훈을 순정만화로부터 빚져왔다. 올해 가장 많은 신세를 진 작품은 《스킵과 로퍼》다.주인공은 중학교의 동급생이 겨우 여덟 명밖에 되지 않는 시골에서 진학을 위해 상경한 ‘미츠미’이지만, 굳이 주인공을 짚으려니 어색하게 느껴진다.
풍성한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장송의 프리렌》을 설명하는 방법도 수십 가지는 될 텐데, 다른 무엇보다도 ‘선의의 기원’을 주제로 이 작품을 말하고 싶다.《장송의 프리렌》은 천 년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 이상의 시간을 살아갈 마법사 ‘프리렌’이 함께 모험을 했던 용사 ‘힘멜’을 이해하고 싶어 떠나는 두 번째 모험담이다. 엘프인 자신의 수명에 비해 찰나를 사는
우리는 때때로 비현실적일 정도로 과장된 일, 혹은 너무나 천진난만한 일 앞에서 ‘만화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 나도 그렇다. 만화를 업으로 삼으며 다양한 작품을 여러 방식으로 접하는 만큼 내게는 만화가 훨씬 복잡한 의미를 가지는데도, 무심코 ‘만화 같다’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일흔 살 노인이 발레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 웹툰 나빌레라를 보면서도 ‘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