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거나 놀랄 것도 없이 문학과 음악, 음악과 미술, 음악과 무용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이 영향을 주고받아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킨 예는 허다하다. 그런 가운데서 특별하고 흥미롭게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독일)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소나타(Kreutzer Sonata)>다. 이 작품은 장르 간 영감을 주고받기를 일회에 그치지 않고 음악에서 소설로, 소설에서 그림, 또 음악으로 이어지면서 마치 끝말잇기처럼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베토벤이 1803년에 작곡한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영감을 받아,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는 86년 뒤인 1889년에 소설을 썼고, 톨스토이의 소설을 토대로 화가 프리네(René François Xavier Prinet, 1861~1946, 프랑스)는 1901년에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소설이 나온 34년 뒤, 1923년엔 체코의 작곡가 야나체크(Leoš Janáček, 1854~1928)가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현악 4중주곡을 작곡했다. 물론 톨스토이의 소설은 연극,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보통 앞선 예술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작품에는 새로운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작품들은 다 ‘크로이처 소나타’라는 베토벤 원 작품의 제목을 그대로 달고 있다.
베토벤은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곡가다. 그는 기존 시대(고전주의)의 스타일을 가장 완벽하고 세련되게 완성하는 동시에 다가오는 새 시대(낭만주의)에는 실험적 스타일을 선구적으로 제시했다. 서른세 살이던 1803년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고 악보 스케치북에 이렇게 적어놓는다. ‘거의 협주곡처럼, 매우 협주곡 같은 스타일로 작곡된 바이올린 오블리가토에 의한 피아노 소나타’라고. 이 지시어를 두고 피상적이나마 짐작하게 되는 것은,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협주곡에서처럼 경쟁적이거나 보조적으로 연주하되 바이올린보다는 피아노에 힘이 실려 있다는 것, 협주곡 정도의 장대한 스케일을 요한다는 것이다. 이 곡이 바로 ‘크로이처 소나타’라고 불리는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이다.
이 곡은 당시에 베토벤이 호감을 가진 바이올리니스트 조지 브릿지타워(George Bridgetower, 1778–1860, 영국)에게 헌정할 요량으로 만들어져, 브릿지타워가 초연도 마쳤다. 허나 친한 사이라도 말조심을 해야 하는 법. 초연 후 술자리에서 브릿지타워가 베토벤이 아끼는 여성을 두고 모욕성 발언을 하는 바람에 둘은 갈라섰고, 베토벤은 이 곡을 브릿지타워가 아닌 당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인 로돌프 크로이처(Rodolphe Kreutzer, 1766~1831, 프랑스)에게 헌정하고 만다. 그러나 크로이처는 이 곡의 악보를 보고 ‘난폭하고 무식한 곡’이라고 하면서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그는 이 대작을 연주 한 번 하지 않고 영원히 자신의 이름이 붙은 채 후대에 남겨지게 했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아니 복(福)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에피소드가 없었으면 오늘날 그 누가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름을 기억하겠는가 말이다. 사람의 이름값, 운명이란 인간이 기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결코 기획자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크로이처 소나타는 여느 소나타처럼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주 시간은 베토벤이 ‘거의 협주곡처럼’이라고 썼듯 장장 40분에 달한다. 소나타로서는 긴 시간이다. 이 곡은 선율이 아름다워 노래하듯 진행되는 소나타가 아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서로 경쟁하듯 공격적으로 연주한다. 제어 불능으로 내달리듯 격정적이다.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가 불꽃 튀듯 연주하는 이 곡을 듣고 나면 장대한 스케일의 드라마를 한 편 끝낸 느낌이 든다. 여기에는 당연히 연주자의 뛰어난 기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부드럽고 형식적이며 아름답기만 한 고전주의 소나타와는 마냥 다른 모습을 보이니, 감상자는 이 곡이 이미 낭만주의로 넘어가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1악장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로 바이올린이 더블 스토핑(동시에 여러 음을 연주하는 것)으로 서주를 시작하면 이어서 강한 터치로 피아노가 들어와 느린 템포로 도입부를 몇 마디 연주하다가 본격적인 단조의 프레스토로 들어간다. 1악장에서부터 두 악기가 격렬하게 부딪친다.
다섯 개의 변주가 있는 안단테 악장인 2악장은 1악장의 격렬함에 비해 가볍고 부드럽게 연주된다.
그리고 다시 빠른 속도의 3악장 프레스토는 아주 활기차고 경쾌하게 진행되어 크로이처 소나타를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곡으로 만든다.
[음악 감상]
베토벤 L. van Beethoven <바이올린 소나타 9번 A장조 op.47 “크로이처” 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 9 in A major, Op. 47 “Kreutzer”>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베토벤의 음악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기에 소설의 소재로 쓰고, 제목까지 그대로 붙인 것일까? 톨스토이는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를 1889년에 발표하고 이듬해 <크로이처 소나타 에필로그>라는 글을 통해 소설을 쓴 의도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상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요점만 정리하자면, 첫째는 성관계가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짓된 과학적 주장이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것, 둘째는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인격모독적인 동물적인 행위라는 것, 셋째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필수 조건인 금욕적인 삶이 결혼생활에서도 더더욱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 넷째는 자식을 인간의 아이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 다른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것, 다섯째는 육체적 사랑은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가치 있는 목적 달성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톨스토이의 각별한 도덕적 신념과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감안한다 해도 21세기를 사는 사람으로서 느끼게 되는 솔직한 심정은 “이 무슨 안드로메다 같은 말씀들인가?” 하는 것이다. 출간 당시 많은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발간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는 이 소설의 탄생에는 그의 사상이 주요 토대가 되었겠지만, 당시 러시아 사회에 만연한 성도덕의 문란이 한 몫을 했으리라 추측해본다.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는 화자(話者)인 ‘나’가 같은 기차를 타고 가게 된 한 귀족의 이야기를 듣는 설정으로, 소설의 내용은 그 귀족 뽀즈드느이셰프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그에게는 가정생활에 충실한 참한 아내가 있었는데, 잦은 출산과 피곤한 가정사로 건강이 안 좋아져서 의사의 권유로 더 이상의 출산을 못 하게 됐다. 출산에서 해방되자 그 부인은 여유가 생기면서 예전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중단했던 피아노 연주도 다시 시작했다. 어느 날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온 바이올리니스트와 이중주를 하게 되면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그는 아내가 그 바이올리니스트와 불륜을 저지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갖 부정한 상상을 현실로 인식하면서 광기로 치달아 그는 결국 아내를 죽이고 만다. 뽀즈드느이셰프가 아내를 의심하게 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다. 피아노를 치는 아내와 바이올리니스트 두 사람이 연주하는 크로이처 소나타의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 1악장 프레스토 부분이 바로 현실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격정적인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의심과 질투가 가져오는 망상, 자학, 파멸의 과정이 세밀한 심리 묘사와 함께 잘 그려진 점에서, 비슷한 또 하나의 고전인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셀로》에서 질투를 부추기는 역할을 이아고라는 인물이 한다면, 이 소설에서는 흥미롭게도 베토벤의 음악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러시아 사회에 만연한 성 풍속과 결혼관, 연애관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처럼 이 소설은 뽀즈드느이셰프가 아내를 살해한 사건의 스토리보다는 그가 당시 러시아 사회, 특히 자신이 속한 귀족사회의 가식, 위선, 성 인식 등을 비판하는 대목에 요점이 있는 듯하다.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가 정작 하고픈 말이었을 것이다.
그 외 의사들에 대한 불신, 음악에 대한 톨스토이의 생각 등이 간간이 뽀즈드느이셰프의 입을 빌려 등장하는데, 그는 음악을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기는커녕 끔찍한 것이라고 하면서 음악은 그저 춤곡이면 춤, 군대 행진곡이면 행진 같은 소기의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견해를 펼친다. 과연 그럴까? 음악은 우리의 감정을 흥분 상태로 이끌기도 하지만, 위안을 줄 뿐만 아니라 숭고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신과 삶에 대한 찬미, 기도가 되기도 한다. 뽀즈드느이셰프의 말대로 음악이 소기의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것이라면,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는 후대에 누군가가 소설을 쓰라는 목적으로 작곡된 곡이 아닌 다음에는 역시 끔찍한 것, 흥분만 돋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가 출판된 이후, 프랑스의 화가 프리네(René François Xavier Prinet, 1861~1946)는 1901년, 소설에서 불륜으로 의심받는 두 남녀의 모습을 그려냈다. 실제로 둘이 사랑을 나눴는지는 소설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바, 아마도 뽀즈드느이셰프의 상상이 만든 일에 불과했을 것이다. 프리네가 그린 것은 바로 이런 상상에서 나온 장면이다.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가로는 프리네 말고 또 한 사람의 유명인이 있다. 체코의 작곡가 레오시 야나체크(Leoš Janáček, 1854~1928)다. 그는 1923년에 작곡한 현악사중주 1번에 ‘크로이처 소나타’라는 부제를 붙이고,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밝혔다.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소설뿐 아니라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에서도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나체크는 체코 모라비아 출신으로 드보르작, 스메타나와 더불어 체코가 자랑하는 작곡가다. 어린 시절부터 성가대 활동을 비롯한 음악 공부를 꾸준히 했지만, 주요 작품은 대부분 예순이 넘은 10년 동안에 작곡한 대기만성형 작곡가다.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예누파>, 두 곡의 현악사중주, 랩소디 <타라스 불바> <신포니에타>(이 곡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등장해 유명해졌다), 바이올린 소나타, 다수의 모라비아 춤곡 등이 있다.
그의 생애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은 60대에 만난 38세 연하의 여인 카밀라 슈퇴슬로바와의 연정인데, 이 감정이 그의 여러 작품에 모티베이션이 됐기 때문이다. 이 두 연인은 각자 배우자가 있는 상태로 만나 10년 동안 비밀 연애를 이어갔다. 카밀라를 향한 야나체크의 사랑은 무려 700통의 연애편지를 보낼 정도로 각별한 것이었다. 카밀라에게 보낸 편지에는 야나체크의 감정과 일상이 세세히 담겼는데, 그 가운데는 현악사중주 1번 <크로이처 소나타>에 관한 부분도 있다. ‘나는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가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묘사한 것처럼, 고통받고 아파하며 쓰러져 있는 가련한 여자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야나체크는 불륜으로 의심받아 남편에게 살해당한 소설 속 여인을 보면서 혹시 카밀라를 머릿속에 떠올린 것이 아닐까? 이 곡에서 현이 날카롭고 불안하게 울리며 갈등의 순간 감정적인 폭발 같은 심리 상태를 잘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카밀라를 향한 야나체크의 불안하고 애절한 심정이 이 작품에 투영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예술 장르의 구분 없이 다른 예술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베토벤의 음악이, 톨스토이의 소설이 그랬다. 아니 꼭 위대한 작품이 아니어도 우리가 부르는 동요와 민요 한 자락도 위대한 예술가에 의해 훌륭한 작품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음악을 감상할 때 그 작품 자체만을 즐기는 것으로도 충분하지만, 작품 탄생의 배경과 연결 고리까지 알고 들으면 훨씬 흥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친구를 사귈 때 친구의 현재 모습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가 자라온 배경, 누구와 친한지, 또 그의 취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게 되면 그 친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예술 작품들을 만나 그 연결 고리를 찾아보는 것은 작품을 보다 재미있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1995년 늦가을, 나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었다. 계절의 영향도 있겠지만 당시 바르샤바의 색채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오랜 동안 소련의 영향 하에서 서구와 교류가 없던 공산권 국가의 수도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스산함, 경직된 분위기를 강하게 느꼈다. 아니, 처음 디뎌보는 (구)공산권 땅이었기에 내가 경직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머릿수건을 쓴 할
현실은 버겁고 미래 또한 확신할 수 없었던 젊은 시절에 사주 잘 본다는 역술인을 찾은 적이 있다.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나도 알아채지 못한 내 성향,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줄줄이 얘기해주는데다 득이 되고 해가 될 일까지 삶의 해법을 제시해주는 역술인의 명쾌한 화술에 그만 마음을 빼앗겼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그때 역술인의 얘기는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기억 속 첫 번째 책은 무엇인가.A 정확한 전집 타이틀이 기억나진 않지만, 초등학생 시절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학생백과》와 《소년소녀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