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이 되면 클래식FM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기다렸다는 듯이 플레이리스트에 올리는 곡이 있다. 로베르트 슈만(R. Schumann)이 하이네(H. Heine)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의 첫 곡 ‘아름다운 오월에(Im wunderschönen Monat Mai)’다. 1840년에 작곡됐다. 그 해는 슈만과 클라라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결혼에 이른 뜻깊은 해였고, 슈만이 전례 없이 가곡을 많이 작곡해서 ‘가곡의 해’라는 별칭이 붙은 해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오월에’는 1분 반 정도의 짧은 곡이지만 ‘아름다운 오월에, 온갖 꽃망울이 터질 때, 내 마음에는 사랑이 샘솟았네’로 시작하는 가사 때문에 오월의 대표 곡이 됐다. 노랫말뿐 아니라 간결하면서도 꿈꾸는 듯한 멜로디 또한 마치 봄날의 햇살을 쬐는 듯하다.
우리는 노래를 들을 때 가사에 이끌리는 것일까? 아니면 멜로디나 분위기에 이끌리는 것일까? 무엇에 이끌리든 상관은 없지만 가사의 내용을 알고 들으면 그때부터 그 노래는 확실히 다른 차원의 감상이 된다. 특히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인 예술 가곡들은 노랫말(시)을 알고 들을 때 그 깊이와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다. 문학과 음악의 완벽한 결합을 맛보는 것이다. 당연히 많은 작곡가들이 자국의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였다.
이런 예술 가곡들은 독일에서는 ‘리트(Lied)’, 프랑스에서는 ‘멜로디(Mélodie)’, 러시아의 경우는 ‘로망스(Romance)’ 이탈리아에서는 ‘로만차(Romaza)’라는 용어로 불린다. 독일어권에선 대표적으로 슈베르트, 슈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괴테, 뮐러, 하이네, 뤼케르트, 아이헨도르프, 헤세의 시에 선율을 입혔고, 프랑스어권에서는 포레, 구노, 쇼송, 풀랑크, 안, 뒤파르크 같은 작곡가들이 위고, 말라르메, 보들레르, 베를렌 등의 시에 곡을 붙였다. 러시아의 경우는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가 멋진 가곡을 남기고 있으며, 이탈리아 작곡가로는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 베르디가 오페라뿐 아니라 가곡도 여러 곡 썼다.
생각해보니 나는 가곡의 노랫말을 시(詩) 자체로 감상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아니, 노랫말을 떠나 내 평생에 외국 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얼마나 되던가? 원어는 물론이고 번역 시로도 읽은 기억이 별로 없다. 어쩌다 읽은 번역 시는 공감이 잘 안 되거나 왜 문학성이 높은 건지 이해가 잘 안 갔다. 무엇보다 다른 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 지역의 자연 환경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역사, 관습,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의미와 뉘앙스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시’는 함축적인데다 은유와 상징, 운율이 중요한 장르다 보니 우리말로 된 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게 많은데, 하물며 외국 시는 어떻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이런 외국 시에 대한 거리감, 선입견을 누그러뜨리는 책을 만났다. 장영희 교수의 책 《생일》이다. 이 책은 오래전에 누군가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는데, 미안하게도 서가에 꽂아놓고는 잊고 있었다. 푸른 꽃병에 담긴 화사한 꽃 그림이 왼쪽에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오른쪽 ‘생’ ‘일’이라는 글자 옆엔 두 마리 노랑나비가 귀엽게 날고 있다. 내용만큼 표지도 예쁜 책이다. 표지 타이틀 아래엔 ‘장영희 쓰고 김점선 그림’이라고 쓰여 있다.
장영희, 김점선. 두 이름 앞에서 마음이 아리다. 두 분 다 지금 이 세상에 안 계시기에. 두 분이 생의 마지막에 암 투병을 하신 것도, 2009년 같은 해 3월과 5월에 김 선생님 먼저 가시고 장 선생님 따라 가신 것은 우연이라 해도 너무 가슴 아픈 일이지 않은가. 그저 두 분의 말씀대로 이 책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책’으로 남아, 책을 통해서나마 두 분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음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생일》은 영국과 미국의 시 가운데서 난해하지 않으며 보편적인 주제를 다룬 시들을 선정해 원문과 번역문을 싣고, 시 하나하나에 번역자 장교수의 감상문과 김점선 화백의 그림을 더한 책이다. 이전에 장교수가 한 일간지에 연재했던 칼럼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의 글들이 단행본으로 묶인 것이다. 신문을 읽는 일반 독자를 고려해서일까? 장교수는 학자로서 시에 접근하지 않는다. 일반인의 감성으로 시를 대하고 느낀 바를 적어서 누구나 쉬이 공감하고 가까이할 수 있게 했다. 바로 이 점이 내게 영 멀게만 느껴지던 ‘영시(英詩)’를 읽어볼 만한 것으로 만든 것이다. 더욱이 장교수가 덧붙인 감상의 글은 짤막해서 반 페이지 분량을 넘지 않으니, 가까이하기에 얼마나 적절한지. 이 시집을 읽다가 나는 종종 시를 영어 원문으로 낭송해보곤 했는데, 눈으로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리 내어 낭송하는 것 또한 아주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시선집 《생일》은 마흔아홉 편의 영미시를 수록하고 있는데, 대부분 자연과 주변의 사물, 일상에서 얻는 깨달음 같은 소박하고 다정한 주제들이다. 사랑, 고뇌, 고통, 인내, 희망, 의지, 환희, 기쁨 등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다루기 때문에 공감하기도 이해하기도 쉽다. 책의 타이틀이 된 <생일(A Birthday)>은 19세기 영국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Christina Rossetti)의 작품이다. 이 시인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사랑의 정신을 노래한 아름다운 연시들을 썼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독신으로 살다가 죽은 후에야 2천여 편의 시를 쓴 것이 알려진 미국의 여류 시인 에밀리 디킨슨, 이 밖에도 새러 티즈데일, 앤 머로 린드버그, 에드너 St. 빈센트 밀레이 등 미국의 여류 시인들 작품이 상당수 있고, 17세기 존 던을 비롯해 로버트 브라우닝, T. S. 엘리엇, 테니슨 같은 영국의 대표적 시인들의 작품이 고루 실려 있다. 16세기부터 20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살던 감수성 예민한 시인들의 시를 통해 옛 사람들의 감성, 사랑, 그리고 자연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지금의 우리로부터 시간과 공간이 멀리 떨어져 있는 그네들이지만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들도 때때로 보잘것없는 자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돌아보며 한탄하는가 하면 귀엽고 작은 들꽃, 풀 한 포기에서 사랑과 희망을 발견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시들로부터 위로를 얻는다.
이런저런 생각과 상념, 미소로 시집을 읽다가 몹시 반가운 마음에 살짝 흥분하기까지 했는데, 두 시를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는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1796, 영국)의 시 <새빨간 장미(A Red, Red Rose)>, 다른 하나는 조이스 킬머(Joyce Kilmer, 1886~1918, 미국)의 시 <나무(Trees)>인데, 내가 제작하던 음악 프로그램에서 종종 선곡하던 곡의 노랫말이다. 특히 요즘처럼 여름이 멀지 않은 완연한 봄, 담장을 타고 올라가는 빨간 덩굴장미가 향기를 뿜고, 한껏 물이 오른 초록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여지없이 그 노래들에 손이 가곤 했다.
스코틀랜드 태생의 영국 시인 로버트 번스는 스코틀랜드 서민의 소박하고 순수한 감정을 노래한 시를 써서 스코틀랜드의 국민 시인이 됐다. 그의 시 <새빨간 장미>에 누가 멜로디를 붙였는지 작곡자는 딱히 기재되지 않고 민요라고만 전해지는데, 전래 민요의 선율에 이 시를 얹어 불러왔기 때문이다. 노래의 제목은 시의 첫 문장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를 가져와 붙였고, 여러 가수가 이 노래를 녹음했다.
[음악 감상]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
(노래: 잇지Izzy)
A Red, Red Rose(Robert Burns)
O My Luve’s like a red, red rose,
That’s newly sprung in June;
O My Luve’s like the melodie
That’s sweetly played in tune....
Till a’ the seas gang dry, my dear,
And the rocks melt wi’ the sun;
O I will love thee still, my dear,
When the sands o’ life shall run....
새빨간 장미(로버트 번스)
오, 내 사랑은 6월에 갓 피어난
새빨간 장미 같아라.
오, 내 사랑은 곡조 따라
감미롭게 울리는 가락 같아라.
바다란 바다가 다 마를 때까지, 내 사랑아
바위가 태양에 녹아 없어질 때까지
오, 그대 영원히 사랑하리라, 내 사랑아
내게 생명이 있는 동안은.
(번역: 장영희)
<나무(Trees)>를 쓴 시인 조이스 킬머는 초기에 아일랜드 시인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에는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인들을 본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생애를 찾아보니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프랑스에서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는 내용이 있어 애달픈 마음이 든다. 킬머의 시 <나무>에 곡을 붙인 사람은 오스카 라스바치(Oscar Rasbach, 1888~1975). 미국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다. 그는 20세기 노래들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 많이 알려졌는데, 1922년에 이 시에 곡을 붙였다. 시 <나무>는 당시에 이미 유명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웨일즈 태생의 성악가이자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알레드 존스(Aled Jones, 1970~ )가 보이 소프라노로 활동하던 어린 시절 음반의 연주가 제일 듣기 좋다. 청아한 보이 소프라노의 음색이 이 시 속의 나무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음악 감상]
Trees
(노래: 알레드 존스Aled Jones)
Trees(Joyce Kilmer)
I think that I shall never see
A poem lovely as a tree.
A tree whose hungry mouth is prest
Against the earth’s sweet flowing breast;
A tree that looks to God all day,
And lifts her leafy arms to pray....
Upon whose bosom snow has lain;
Who intimately lives with rain.
Poems are made by fools like me,
But only God can make a tree.
나무(조이스 킬머)
내 결코 보지 못하리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를.
단물 흐르는 대지의 가슴에
굶주린 입을 대고 있는 나무.
온종일 하느님을 바라보며
잎 무성한 두 팔 들어 기도하는 나무.
눈은 그 품 안에 쌓이고
비와 정답게 어울려 사는 나무.
시는 나 같은 바보가 만들지만
나무를 만드는 건 오직 하느님뿐.
(번역: 장영희)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 스승의날, 부부의날이 다정한 이웃인 양 혹은 한 가족인 양 옹기종기 한데 모여 있는 오월. 집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화사한 햇살, 신록의 나무, 화단을 수놓는 꽃들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 싱그러움으로 공기마저 새롭고, 발걸음 또한 가뿐해지니 몸과 마음이 새로 태어나는 느낌이다. 우리는 모두 오월에 생일을 맞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장영희 쓰고 김점선 그린 책 《생일》과 더불어.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내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만난 것은 음악으로였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에서 접한 조르바의 춤이란 곡은 독특한 음색의 악기와 심장이 뛰는 듯한 리듬으로 나를 매혹시켰다. 자연히 그 영화가 궁금해졌고, 이어서 원작 소설도 읽고 싶어졌다. 이렇게 차례로 음악에서 영화로, 마침내 소설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났다. 영화의 마지막,
1995년 늦가을, 나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었다. 계절의 영향도 있겠지만 당시 바르샤바의 색채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오랜 동안 소련의 영향 하에서 서구와 교류가 없던 공산권 국가의 수도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스산함, 경직된 분위기를 강하게 느꼈다. 아니, 처음 디뎌보는 (구)공산권 땅이었기에 내가 경직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머릿수건을 쓴 할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기억 속 첫 번째 책은 무엇인가.A 정확한 전집 타이틀이 기억나진 않지만, 초등학생 시절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학생백과》와 《소년소녀 세계